# 116
116화 의도치 않은 표류(3)
나탈리 왕녀.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겐크 왕국의 왕위 계승 제1 순위에 놓여 있던 사람이다.
외궁에서 하원 의원의 절반을 꽉 잡고 있었고, 비밀리에 개인 암살 부대를 소유하고 있을 정도의 재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왕궁 내에서 가장 사치를 많이 부리던 왕녀였다.
카이둔 국왕의 뒤를 이어 차기 여왕으로 자리매김하던 그녀였으나 한 남자와의 불장난이 과하여 결국 스스로를 태우고 말았다.
당시에 쉐도우 나이트 단장이었던 렌디에게 홀려 그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루크를 암살하려고 했다. 루크는 그걸 고스란히 이용하여 그녀에게 왕족 암살 미수죄를 적용시켜 쉐도우 나이트의 존재를 증명해 버렸고 말이다.
만약에 그녀가 렌디와 불장난을 벌이지만 않았다면 아직까지 제1 계승권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정에 불과하며 말해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족이었다.
지금의 나탈리는 겐크 왕국으로부터 수백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위치에 있는 외딴섬에 유배된 일개 죄인일 뿐이다.
“…….”
사태를 파악하느라 잠시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데 나탈리가 재차 루크에게 말을 붙였다.
“왜 말이 없죠? 절 죽이러 왔다면 빨리 끝내 주세요. 지저분하게 살려 달라고 하진 않겠어요.”
지난 몇 년간 섬에 갇혀 바깥세상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한 탓에 오해가 빚어진 모양이다.
나탈리의 시점에서 루크는 엘리나의 사람이고, 엘리나의 명령이 아닌 이상 이런 외딴섬에 찾아올 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엘리나가 이전에 자신에게 모질게 군 이복 언니를 죽이기 위해서 사람을 파견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더하여 왕녀의 신분으로 다른 왕녀를 죽일 순 없다. 그러니 엘리나가 여왕이 되어 여왕의 권한으로 오래전에 결정된 나탈리의 왕족 암살 미수죄의 판결을 사형으로 바꾼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죽이라며 당당히 가슴을 내미는 나탈리를 두고 루크는 대번에 고개를 내저었다.
“심정은 알겠지만 일단 진정하지그래? 그리고 난 이제 겐크 왕국 사람이 아냐.”
“루크 남작, 못 보던 사이에 농담이 늘었군요. 겐크 왕국의 귀족이 겐크 왕국 사람이 아니면 어디 사람이라는 건가요?”
“남작이라… 그 호칭으로 불리는 것도 오랜만이군.”
“무슨 의미죠?”
“지금은 하니온 공국의 공왕이야.”
공왕이라고 밝히자 나탈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했다.
그러나 이내 곧 납득하듯 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유배된 이후로 오랜 시간이 흐른 데다 루크 정도 되는 자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나탈리는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며 경계심을 풀었다. 그러고는 루크가 이곳까지 흘러들어 오게 된 것에 그만한 사연이 있으리라고 짐작하며 출입을 허가했다.
“들어오세요. 이야기 정도는 들어 주도록 하죠.”
“그래도 되겠어? 우리가 초대를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지 않나?”
“원한이라면 수도 없이 품었죠. 원망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깨달을 때까지 말이에요.”
그녀의 말투에서 초연함이 배어 나왔다.
유배지에 갇혀 있는 동안 온갖 생각을 다 했을 것이다. 그녀의 손목에 남아 있는 날카로운 형태의 흉터들이 지난날 동안 그녀가 느껴 온 절망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다만 흉터는 꽤 오래전의 것이었다. 이는 곧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녀가 자살 기도를 멈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순간 깨달은 것이다.
절망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고. 그냥 모든 걸 받아들이고 숨이 붙어 있는 나날을 초연히 보내자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죽음을 당당하게 받아들이려 한 것이었다.
루크는 열려 있는 대문 안으로 발을 들이며 나탈리의 변화에 대한 감상을 읊었다.
“모난 돌도 구르다 보면 둥글게 된다더니 딱 그 꼴이군.”
* * *
나탈리와 마주치면서 루크는 이곳이 겐크 왕국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외딴섬이라는 것까진 알아냈다.
하지만 겐크 왕국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라는 것만 알지,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모른다. 때문에 이곳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루크는 이 섬이 네튤 제도와 가깝다면 네튤 제도로, 하니온 공국과 가깝다면 하니온 공국으로 갈 생각이다. 후자라 할지라도 하니온 공국으로 돌아가 재정비를 한 다음에 네튤 제도로 가도 늦지 않다.
루크는 나탈리로부터 원하는 바를 취하기 위해 자신의 사정부터 설명했다.
물론 있는 그대로 미주알고주알 알려 주는 우를 범하진 않았다. 진실만을 말하되 중요한 부분은 철저하게 감췄다.
그러자 나탈리가 자신이 들은 바를 간략하게 요약하여 입 밖으로 내었다.
“그러니까 세이렌들과 거래하기 위해 배를 타고 이동하던 중에 배가 난파당했다는 거군요. 표류 끝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기 도착했단 얘기죠? 여기까지 제가 제대로 이해한 거 맞나요?”
“맞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지도 같은 게 있다면 내줬으면 좋겠어. 여기가 어딘지는 알아야 돌아갈 방향을 가늠할 수 있을 테니까.”
“아마 창고에 지도가 있을 거예요.”
“이야기가 너무 순탄하게 흘러가는걸? 뭘 원하지?”
“훗, 이 마당에 속여서 뭐하게요?”
“옛말에 맹독과 대가 없는 호의는 함부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했지.”
“속내를 떠보려는 거면 사양하겠어요. 지금의 전 누군가를 상대로 감정을 소모할 정도로 의욕이 넘치진 않거든요. 그냥 잡음만 없었으면 좋겠어요.”
거짓말을 하는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
분위기만 놓고 보면 마치 산속에서 오랫동안 수양이라도 한 사람 같다.
실제로 계산기를 두드린다 하더라도 루크의 요구를 들어주는 게 이롭긴 하다. 여기서 거절한다고 루크를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원한다면 강제로 뺏어갈 수 있는 힘을 지닌 자 앞에서 구태여 화를 자초할 만큼 어리석은 여자는 아니었다.
나탈리는 티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에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검지로 찻잔의 가장자리를 훑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해 주세요. 이야기를 듣는 대가로 지도를 내드리도록 하죠. 아레나 공국은 어떻게 됐나요? 그 부분은 꼭 좀 듣고 싶네요.”
“로메우라면 반란을 일으켰다가 제압당했지. 아레나 공국의 수도에서 내 손으로 직접 베었어.”
“그것참 쌤통이네요.”
“더 쌤통인 이야기가 있지.”
“뭔데요?”
“렌디 녀석도 내 손에 죽었다.”
“후후후, 그거 알아요? 저 유배 중에 웃은 거 이번이 처음이에요.”
대화를 나누던 중 늙은 집사가 두 사람이 있는 발코니로 나오며 허리를 숙였다.
“왕녀님, 차를 다시 데워 오겠습니다.”
“그래 줘요, 마론.”
이 저택에 나탈리 외에 다른 사람이라곤 집사 한 명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유배 중인 자와 친분을 가지지 말라는 왕명 때문에 시중과 관련된 대화 외엔 응해 주지 않는다고 한다.
괜히 유배보단 사형이 낫다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다.
사형은 찰나에 끝나 버리지만 유배는 긴 시간에 걸쳐 사람을 망가뜨린다.
시중을 드는 집사마저도 1년에 한 번씩 바뀌기 때문에 집사들도 나탈리를 어차피 1년만 보고 말 사람으로 대하고 있다고 한다.
마론이라 불린 집사는 시중과 관련된 이야기 외에 다른 말은 일절 하지 않으며 묵묵히 찻주전자를 가져갔다.
마론이 발코니에서 빠져나가기 직전, 나탈리는 주문을 추가했다.
“그리고 창고에서 지도를 가져와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는 시종일관 사무적인 태도를 취하며 극히 간결한 대답만을 내뱉었다. 자신의 주인은 왕궁에 있는 국왕이지 나탈리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전달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론이 이 근방의 지리와 해류의 흐름을 표기한 지도를 가져왔다.
루크는 두루마리처럼 돌돌 말린 지도를 활짝 펼쳐 정확한 위치를 파악했다. 고맙게도 지도엔 네튤 제도의 위치까지 표기되어 있었다.
현재 위치에서 하니온 공국과 네튤 제도의 거리를 측정해 보니, 둘 중에서 네튤 제도가 훨씬 가깝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하니온 공국까지는 배를 타고 보름 거리, 네튤 제도까지는 배를 타고 사흘 거리였다.
심지어 하니온 공국으로 가는 길목에 네튤 제도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하니온 공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렀다 가면 될 것 같다. 동선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더 이상 저택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루크는 지도를 돌돌 말아 품에 넣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는 길을 알았으니 이만 가 보겠어.”
“부담 갖지 말고 하룻밤 묵고 가지 그래요?”
“그러기엔 내 위치가 예전 같지 않아서 말이지. 나라가 발칵 뒤집히기 전에 복귀하는 게 여러모로 이롭지 않겠어?”
“마음 같아선 지나가는 부랑자라도 붙잡고 얘기를 나누고 싶은 심정이라서요. 짧은 시간이나마 바깥세상 이야기를 들어서 좋았어요. 유배된 처지에 이 이상 바라는 건 욕심이겠죠.”
유배지에 오게 된 건 우연의 산물일 뿐, 오래 머물러서 좋을 건 없었다.
무엇보다도 원래는 끝났어야 할 원정 길을 연장시킨 옥토버들에게 더 이상 시간을 주고 싶진 않았다.
불의에 적의를.
드래프트 영지의 남작이 되면서 가슴 깊이 새긴 신념은 아직도 유효하다.
이번에는 그 대상이 옥토버들이 되었을 따름이다.
나탈리는 사람다운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만족하는지 한결 온화해진 표정을 지었다. 오래전, 겐크 왕국에서 가장 오만하며 허영심이 많은 여자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한 표정이었다.
“루크 남작 말마따나 우리 사이에 하룻밤 묵고 가라고 권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긴 하네요. 아, 이젠 공왕 전하라 불러야 했던가요?”
“그래 주면 고맙지.”
“그럼 공왕 전하, 떠나실 때 타고 갈 배는 있나요? 참고로 제겐 배가 없어요. 이유는 왜인지 아시죠?”
“탈출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후후, 너무 뻔한 질문이었나 보네요. 이런 말하기 좀 뭐한데…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어요?”
“듣기만 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돌아가면 엘리나 그 아이에게 잘해 주세요. 어릴 때부터 고생을 많이 한 아이예요. 제가 이런 말 하면 우습긴 한데, 혼자 있다 보니까 옛날에 잘못했던 일만 자꾸 떠오르더라고요. 그중에서도 엘리나 그 아이에게 못되게 굴었던 게 가시처럼 자꾸 목에 걸리네요.”
“좋은 녀석이긴 하지.”
“그냥… 후우, 언니 노릇 한번 해 보고 싶었어요. 지금까지 언니다운 일을 한 적이 한 번도 없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해 봤어요.”
후회로 가득한 한숨과 함께 씁쓸한 미소를 띠는 나탈리였다. 상을 당했을 때나 입는 검은색 정장 드레스가 유달리 어두워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루크는 그녀의 내면까지 들여다보고 나서 왜 나탈리가 상복을 입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루크는 상복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말을 아끼며 몸 주위에 마나를 배열했다.
“그 말을 꺼낸 것만으로도 언니 노릇은 다한 셈이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플라이 마법을 시전했다.
네튤 제도까지 가는데 구태여 배를 타거나 헤엄을 쳐서 갈 이유가 없다.
그랜드마스터란 경지에 가려지기 십상인데, 루크도 명색이 6서클 마법사다. 6서클 마법에 속한 플라이 마법으로 얼마든지 이동이 가능하다. 다만 거리가 먼 만큼 대량의 마나 소모를 감수하긴 해야 했다.
발코니 안에서 루크의 몸이 위로 떠올랐다.
티 테이블 옆에 앉아 있던 나탈리는 손을 흔들며 멀리 나가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루크는 나탈리로부터 시선을 거두며 남쪽으로 몸을 틀어 서서히 속도를 붙였다.
* * *
루크가 떠난 직후, 나탈리는 발코니에 혼자 남아 차갑게 식은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몇 년 만에 사람다운 대화를 해 본 자의 기분을 헤아리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탈리도 그만큼 절박했다.
그러나 끝내 탈출시켜 달라는 말은 꺼내지 못했다.
그녀 자신은 이렇게 생각했다. 유배가 확정된 순간 자신은 죽은 거라고. 죽은 자가 산 자의 무리 속에 되돌아가서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죽은 자는 산 자를 질투하고, 산 자는 죽은 자룰 무서워한다.
그런 까닭에 그녀는 상복을 입고 있었다.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한시라도 잊지 않기 위해서.
또한 그녀는 알고 있다.
자신이 겐크 왕궁의 외궁을 장악하고 있던 시절, 겐크 왕국의 재정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그때보다 나아졌다면 모를까, 더 악화되었다면 겐크 왕국에 돌아가 봤자 결말은 뻔하디뻔했다.
그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세상 풍파에 휘말리지 않고 조용히 남을 삶을 보내고 싶은 것이 나탈리의 바람이었다.
나탈리는 오래전부터 3남매 중에서 가장 험난한 길을 택한 엘리나를 떠올리며 식은 찻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그때의 남작이 지금은 공왕이라니……. 상대가 너무 잘나도 문제라던데, 그 아이도 참 힘들겠어.”
* * *
루크와 나탈리가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유배지에 파견된 집사가 사실은 유배당한 이를 감시하는 간수 역할을 도맡고 있다는 점이었다. 파견된 집사는 유배지에 머무르면서 유배된 죄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왕궁의 충실한 개인 파견 집사가 루크의 표류를 그냥 보고 지나칠 리 없었다.
나탈리의 시중을 들기 위해 파견된 마론은 루크가 떠나자마자 남몰래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고선 본국과 연결되어 있는 마법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넣어 긴급 보고를 전달했다.
“나탈리 왕녀님의 유배지에서 알립니다. 하니온 공국에 머무르는 걸로 알려져 있는 루크 공왕이 남몰래 해저 섬 원정을 갔다 온 것을 확인했습니다. 원정길에서 돌아오는 길에 난파를 당하여 유배지까지 흘러들어 왔다가 지금 막 떠났습니다. 혹시 몰라 보고해 드리오니 국왕 전하께 전달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