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123화 전쟁의 조짐(1)
최근 들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그중 가장 이해가 안 되는 일은 엘리나가 스스로 볼모를 자청한 사건이었다.
예전부터 거인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고 판단하긴 했다. 언제 한번 기회를 봐서 휴전 협정을 불가침 조약으로 바꿀 생각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거인국 측에서 먼저 불가침 조약을 제안해 왔다.
불가침 조약에는 강제적으로 서로의 침략을 제어할 족쇄가 필요하다. 그게 바로 볼모 교환이고 말이다.
거인국 측에선 불가침 조약을 좀 더 확실하게 이행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치듯, 볼모 대신 목숨보다 소중한 국보를 내놓았다.
거인국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보물인지라 겐크 왕국에서도 동급의 가치를 지닌 인물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은 두말할 것도 없이 블린트 왕자와 엘리나 왕녀 두 명이었다.
당시 누굴 볼모로 보내느냐를 두고 왕궁 안에 긴장감이 팽배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번 볼모로 떠난 자는 웬만하면 몇 년 이상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쌓아 온 기반을 모두 잃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 경우엔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엘리나가 자청하여 볼모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제가 가겠어요. 이젠 전쟁보다 내실을 다지는 데 집중할 때가 되긴 했죠. 왕국의 발전에 일조할 수 있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어요.”
루크란 든든한 조력자를 둔 그녀다. 루크 한 명이 블린트 왕자파 소속의 귀족 전원을 합친 것보다 낫다. 언제든지 왕위를 노릴 수 있음에도 어째서 일부러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길을 택한 건지 이해가 안 갔다.
막강한 경쟁자가 알아서 경쟁 구도에서 탈선해 주었으니 사실상 차기 국왕은 블린트로 확정된 것이나 진배없었다.
블린트 왕자파 소속의 귀족들은 모두 기뻐하였으나, 유일하게 블린트만이 찜찜함을 떨쳐 내지 못했다.
분명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
문제는 엘리나가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윤곽조차 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엘리나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도 꺼림칙하긴 하다만, 그보다 더한 것은 지방 영주들의 움직임이었다.
최근 들어 그란데 백작이 지방을 돌며 귀족들과 밀회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정황상 역모를 작당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됐다. 하지만 루크가 버젓이 그란데 백작의 뒤를 봐주고 있기에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정보원들이 명확한 증거를 잡기만을 기다리며 노심초사하던 중, 나탈리의 유배지에 파견한 집사로부터 쉬이 흘려들을 수 없는 보고가 올라왔다.
“누님의 유배지에 루크 공왕이 나타났다고? 누님을 유배지로 보낸 장본인이 루크 공왕 아니더냐. 이제 와서 무슨 볼일로 누님을 찾아간 거지?”
나탈리에겐 더 이상 정치적 이용 가치가 없었다. 더욱이 서로 간에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왕씩이나 되는 인물이 남몰래 그녀를 찾아갈 이유가 없었다.
왕궁 의원들은 주석을 달듯 추가적인 보고를 올렸다.
“유배지 파견 집사 마론이 보고하길, 일부러 방문한 것은 아니고 항해 중에 표류하여 유배 섬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 증거로 지도와 나침반을 제공받자마자 바로 떠났다더군요.”
“표류? 공국 왕궁에 있어야 할 자가 어떻게 하면 표류할 수가 있지? 하니온 왕궁에 심어 둔 자들은 뭘 하고 있길래 공왕이 바다로 나갔는데도 모를 수가 있느냐?”
“그게… 생각보다 드골 백작의 수완이 뛰어나서 정보 빼내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변명은 됐다! 그래서?”
“네?”
“왜 루크 공왕이 바다로 나갔는지 그 이유를 말해야 할 것 아니냐.”
왕궁 의원들이 발목만 잡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이후부터 블린트는 왕궁 의원들만 보면 답답함이 차올랐다.
게다가 카이둔 국왕의 일까지 겹치면서 블린트가 받고 있는 압박감과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단숨에 대회의장 내부의 공기가 험악해지며 왕궁 의원들의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워졌다.
“무, 물론 마론이 항해 중인 이유도 보고했습니다. 자세한 사항까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만 해저 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배가 난파당했다고 합니다.”
“해저 섬? 세이렌이 살고 있다는 해저 섬 말이더냐?”
“네, 오션 마린 생산지로도 유명한 곳이지요.”
“설마 세이렌과 조약을 맺어서 오션 마린을 제공받으려는 건가?”
“조약이 아니라 아예 정복해 버렸을 수도 있지요. 루크 공왕씩이나 되는 실력자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보고대로라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었다.
그간 밀정들로부터 아무런 보고가 없기에 아직 여유가 있다고 여겼건만, 완전히 오산이었다.
하니온 공국에선 비밀리에 전쟁 준비를 차근차근 마치고 있었던 것이다.
하니온 공국이 오션 마린 광산까지 손에 넣는다면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다. 루크 한 명만 하더라도 국가급 전력이나 다름없는데, 게다가 오션 마린으로 마나유저와 마법사까지 급증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겐크 왕국과 하니온 공국 간의 전력 차가 벌어지리란 건 극명한 일이었다.
블린트는 답답한 심정을 달래느라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찌나 강하게 물었는지 입술을 타고 피가 흘렀다. 블린트의 입가에 피가 흐르는 것을 목격한 왕궁 의원들이 기겁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와, 왕자님! 입에서 피가!”
“괜찮으니까 다들 앉아라.”
“하지만…….”
“앉으라는 말 못 들었느냐?”
블린트의 입에서 가래가 끓듯 쇳소리가 섞여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음 같아선 고함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다. 소리라도 지르면 답답한 심정이 조금은 풀릴까. 그러나 성질을 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징징거린다고 문제가 해결된다면 골백번도 징징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징징거림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블린트는 답답한 와중에도 활로를 찾고자 머리를 쥐어짰다.
고민 끝에 블린트는 현 상황 속에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를 택했다.
“이쪽에서 먼저 선제공격을 가한다. 아레나 공국의 레들리 공왕에게 공문을 보내 둬라. 겐크 왕국군, 아레나 공국군을 모조리 동원해서 선제공격을 가하는 것 외엔 달리 방법이 없어.”
“선제공격을 가하려면 그만한 명분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당성을 갖추지 않은 선제공격은 도적 떼의 습격과 다를 바 없다. 세상 그 어느 왕족도 스스로를 도적으로 격하시키고 싶진 않을 것이다. 그 부분은 블린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빠른 시일 내에 선제공격을 가하지 않으면 하니온 공국은 오션 마린을 이용하여 전력 차를 급격히 벌릴 터. 루크 한 명만으로도 벅찬데 여기서 더 전력이 벌어지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
그나마 이길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은 지금밖에 없었다.
블린트는 전부터 의심하고 있던 그란데 백작을 이용하기로 작정했다.
“그란데 백작을 반란 모의 혐의로 구속해서 골디브로 연행해라. 그란데 백작이 의심스러운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 파내면 뭐라도 나올 테지.”
“나오지 않는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입니다. 좀 더 신중하게 판단하심이 어떠신…….”
“애덤 백작, 내가 지금 그대에게 뭐 먹고 싶냐고 묻고 있는 줄 아나 보지?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할 거면 시키는 일이라도 제대로 하란 말이다!”
지금까지의 대화 내용만 보면 다수가 모여 식사 메뉴를 고를 때의 상황과 판박이였다.
메뉴 정할 때 아무 거나라고 외쳐 놓고, 막상 메뉴를 제시하면 ‘그건 별로 안 당기는데…….’라고 투덜거리는 사람과 뭐가 다른가.
확실한 해결책을 제시할 생각도 없으면서 자꾸 문제점만 꼬집는 자처럼 짜증 나는 유형도 없다. 심지어 부하란 작자가 이와 같으면 스트레스는 배가 된다.
왕궁 의원들은 블린트의 눈치를 보며 복종의 태세로 전환했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방금 저희들의 발언은 잊어주십시오. 즉시 왕자님의 분부대로 이행하겠습니다.”
* * *
수일 후, 루크와 레이아는 하니온 공국에 복귀하였다.
루크의 실종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 자는 극소수였기에 큰 소란 없이 일선에 복귀했다.
루크는 간만에 국정회의에 참가하여 이번 원정의 결과를 읊었다.
“약간의 트러블이 있긴 했어도 당초의 목적은 달성했지. 앞으로 머메이드가 그레이트 쉘 양식장을 습격할 일은 없을 테니 거대 진주 수출에 박차를 가하도록.”
“고생 많으셨습니다, 전하. 자세한 부분은 라샤 경에게서 들었습니다. 고대의 정령왕인 아쿠아를 손에 넣으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아쿠아를 손에 넣는 과정에서 라샤의 공을 빼놓으면 안 되겠지, 라샤.”
회의장 한편에 서 있던 라샤가 단상 아래로 다가오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네, 전하. 말씀하십시오.”
“공왕 직속 정보국 국장 라샤. 그대는 이번 원정에서 큰 공을 세웠으니 황금과 비단 1억 루소어치와 호봉의 상승을 포상으로 내리겠다.”
“감사합니다, 전하. 저 라샤, 앞으로도 이 한 몸 바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원정에서 느낀 바가 많았기에 라샤의 태도는 이전보다 훨씬 각이 잡혀 있었다.
더불어 레이아에게도 루크를 찾아낸 것과 옥토버 및 크라켄 군단을 섬멸한 공을 인정하여 포상을 내렸다. 정작 본인은 이미 황금과 비단보다 더 값진 것을 받았다는 양 밋밋한 반응을 보였지만 말이다.
공로에 따른 포상을 내린 후 루크는 이번 원정에서 얻은 부가적인 결과물을 차례대로 읊었다.
“라샤에게 들었다면 길게 설명할 필요 없겠군. 다들 알고 있겠지만 데메그리 교가 관여하면서 해저 섬의 세이렌과 머메이드가 전멸했지. 지금 아쿠아를 남겨 둬서 오션 마린을 채광하라고 명령을 내려 뒀으니 조만간 오션 마린이 공급될 거야.”
“그거 뜻밖의 큰 수확이군요. 오션 마린으로 기사 양성소와 마탑에 마나 수련실을 설치하면 경지를 올리는 시간이 많이 단축될 겁니다.”
“양은 넉넉하니까 기사들의 장비를 모두 오션 마린 장비로 교체할 수 있을 테지.”
마나석으로 만든 장비들은 마나 공격 피격 시에 위력을 경감시키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마나석이 귀한 데다 비싸서 마나석으로 통짜 갑옷을 만들지 못한다 뿐이지, 대량의 마나석을 보유하고 있다면 시도하지 못할 일도 아니다.
오션 마린을 대량으로 확보한 시점에서 군대 장비의 질이 상승하는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드골 백작을 비롯한 집행부 소속 귀족들은 지금까지 루크가 읊은 결과물만으로도 크게 흡족해했다.
머메이드만 저지해도 충분한데 오션 마린과 아쿠아까지 손에 들어왔다. 계획한 것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는데 여기서 더 뭘 바란단 말인가.
그런데 아직 만족하기는 이르다는 양 루크가 밑도 끝도 없이 계속 수확물을 읊어 댔다.
“그리고 네튤 제도에 진출할 기반을 닦아 놨으니 협상단을 파견할 준비를 해 둬. 이참에 네튤 제도를 공국의 영토로 편입시키고 해양 전초 기지로 쓸 생각이야.”
“네튤 제도라면 옥토버들이 살고 있는 그 네튤 제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돌아오는 길에 전멸시켜 뒀지. 네튤 제도에 남아 있는 다른 종족들은 우리에게 호의적일 테니 협상하는 데 큰 걸림돌은 없을 거야.”
서서히 귀족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아까까지만 해도 루크가 얻어 낸 성과를 제 일처럼 기뻐하던 귀족들이었으나, 갈수록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돌아오는 길에 겸사겸사 옥토버를 전멸시켰단다.
해저 섬에서 올린 성과만으로도 이미 벅차건만 드넓은 네튤 제도까지 손에 넣었다니.
많은 이득을 취했으니 기뻐해야 하는데, 워낙에 상상 이상의 성과인지라 머리가 따라가지 못했다.
그나마 오랫동안 루크를 보아 온 드골만이 제정신을 붙들고서 루크의 명을 받들었다.
“적합한 인물들을 선정하여 협상단을 조성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하?”
“왜?”
“수확물 발표는 이걸로 끝이신지…….”
이미 발표된 결과물만으로도 숨넘어갈 지경인데 여기서 더 있다고 하면 진짜로 숨넘어갈지도 모른다.
장내의 귀족들 모두 설마설마하며 잔뜩 긴장하고선 루크의 대답을 기다렸다.
루크는 아직 수확물 발표가 끝나려면 멀었다는 양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벌써 끝날 리가 없잖아? 아직 3대 신기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어.”
아직도 더 꺼낼 수확물이 있다는 말에 드골을 비롯한 귀족들은 점점 감각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일을 벌일 때마다 너무 당연하게 많은 것을 취해 오니까 저게 정상인가 하는 착각마저 든다.
루크가 해왕검을 얻게 된 무용담을 푸는 가운데, 귀족들은 감각이 마비된 사람처럼 멍하니 빈 찻잔을 홀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