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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재능으로 환생-124화 (124/200)

# 124

124화 전쟁의 조짐(2)

그란데 백작가는 대대로 가문의 일원이 죽으면 화장하여 납골당에 안치한다.

가문의 납골당은 그란데 백작가 저택의 뒷산에 위치해 있었다.

그란데 백작은 아무리 바빠도 한 달에 한 번은 납골당에 들렀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자 아직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는 사람을 기리기 위해서 말이다.

“후우.”

향초에 불을 붙인 그란데 백작이 입김을 불었다. 향초 끄트머리에 붙은 불이 꺼지면서 새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 속에 죽은 그녀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듯하다.

처음 그녀를 만난 날이 떠올랐다.

아담한 몸집과 흔치 않은 은발, 수줍은 표정. 마치 은방울꽃에서 태어난 요정 같았다.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 정도로 그녀는 좋은 아내였다.

그란데 백작이 젊을 적만 하더라도 그란데 백작령의 상황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선대 때 시행한 영지 개발 사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 빚을 그란데 백작이 고스란히 떠안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형편이 어려웠냐면 예전의 드래프트 영지보다 더 심각했다. 한때 왕궁에서 작위 몰수까지 고려했을 정도다.

그때 그란데 백작과 함께 고생한 사람이 그의 아내였다.

식탁 위에 올라오는 음식은 점점 빈약해지고, 저택의 고용인들은 하나둘씩 줄어들었으며 불을 땔 장작마저도 부족하여 천을 덧댄 로브를 휘감고서 얼음장 같은 침대에 누웠다. 그럼에도 불평도 한마디 없이 뒷바라지해 주었던 그녀다.

나날이 여위어 가는 아내를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런 생활을 하게 하려고 데려온 것이 아닌데…….

내가 좀 더 능력이 있었다면 저리 힘들게 지내게 하지 않을 텐데…….

‘미안하오. 내가 못나 당신이 이런 고생을 겪는구려. 조금만 더 참아 주오. 내 반드시 가문을 일으켜 세우겠소.’

힘들 때마다 자신보다 더 힘든 아내를 생각하며 입술을 질끈 깨물고서 갖은 곤욕과 고생을 몸소 치러 냈다.

피를 토하는 노력 끝에 명문가의 명성에 걸맞은 생활을 되찾았을 때, 가장 큰 보답을 해 주고 싶었던 사람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란데 백작은 부인의 유골함이 담긴 단지에 편지 한 장을 넣었다.

“매일매일 당신을 생각하면서 썼소. 레이아 그 아이의 근황도 적었으니 찬찬히 읽어 보구려.”

겐크 왕국 남부 지방에는 유골함이 담긴 단지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담은 편지를 넣으면 저승에 있는 자에게 편지가 닿는다는 풍습이 있다.

부인의 단지에는 편지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전부 그란데 백작이 넣은 편지였다. 20년이 넘도록 매달 찾아와 편지를 넣다 보니 이 커다란 단지가 편지로 가득 찼다.

단지에 편지가 넘치고, 가슴 속에 보고픈 마음 또한 넘친다.

그런데도 돌아오는 답장은 한 통도 없다는 게 애석할 따름이다.

그란데 백작은 붉어지는 눈시울을 빠르게 깜빡이며 고개를 위로 들었다. 그러면서 애써 마음을 추스르며 몸을 돌렸다.

납골당에서 빠져나가려고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갑자기 모퉁이 너머에서 기사 한 명이 달려왔다.

“백작님! 그란데 백작님! 큰일입니다! 왕궁에서 조사단이 찾아왔습니다!”

그란데 백작은 감상에서 벗어나며 진지한 분위기를 띠었다.

“올 게 왔구나. 당황하지 말고 준비한 대로 움직이거라.”

최근 몇 달 동안, 지방을 돌면서 지방 영주들을 설득했다. 지방 영주들에게 카이둔 국왕이 데메그리 교와 손잡고 있었다는 증거를 보여 주며 거사에 참가할 것을 권유했다.

나름대로 은밀하게 움직이긴 했으나 언젠가 들킬 일이었다.

이때쯤이면 조사단이 들이닥치지 않을까 싶었는데, 정확하게 예상한 타이밍에 찾아와 주었다.

조사단이 올 때를 대비하여 중요한 서류와 증거들은 전부 루크에게 보내 두었다. 지금에 와서 저택을 뒤져 봤자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기사로부터 쉬이 흘려듣지 못할 추가 보고가 전해져 왔다.

“준비한 대로 대응하고 있긴 한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왕가에서 백작님을 연행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지금 백작님을 체포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올라오고 있습니다.”

“증거도 없는데 연행을 하겠다니, 갈 데까지 가는구나. 조사단은 어디 있느냐? 내 직접 대화를 시도해 보겠다.”

“대화가 통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이대로 놈들과 마주쳤다간 꼼짝없이 수도로 끌려가고 맙니다. 저희가 시간을 끌 테니 어서 드래프트 영지로……. 커헉!”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사가 신음을 토해 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왕궁에서 보낸 조사단, 왕궁 기사단이 어느새 납골당 안으로 들어와 칼부림을 행한 것이다.

아끼던 기사의 죽음과 가문의 납골당 안에서 벌어진 유혈 사태에 그란데 백작은 노여움을 감추지 못했다.

“네 이놈!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도 구분하지 못하느냐!”

왕궁 기사단인 로얄 나이트의 부단장, 브리프가 피에 젖은 칼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딱딱한 태도로 예를 갖추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란데 백작님. 왕궁으로부터 그란데 백작님을 연행하란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협조해 주신다면 더 이상 가문의 납골당에 피가 흐를 일은 없을 겁니다.”

정중한 투로 말하고 있긴 하나, 그 내용은 전혀 정중하지 않았다.

말이 예를 갖추는 거지 사실상 협박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그란데 백작의 입에서 가래가 끓는 듯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시 한번 입을 놀려 보거라. 왕궁에서 아무런 절차도 없이 곧바로 검을 휘두르라고 명하더냐? 정녕 국왕 전하께서 그리 말했느냐! 네 입으로 대답해 보거라, 브리프!”

“왕가를 위협하는 행위를 일삼은 자에겐 검으로 응수하는 것이 저희 로얄 나이트의 원칙이라서 말이지요.”

“내 영문도 모르고 이런 대접을 받기 위해 여태껏 왕가에 충성해 온 게 아니다. 비켜라! 내 당장 왕궁에 상소를 올리겠다!”

“그란데 백작님, 백작님께서 선택하실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순순히 따라오시느냐, 아니면 저희들 손에 제압당하신 후에 끌려가시느냐. 어느 쪽이 더 일신에 이로울진 백작님 본인께서 더 잘 알고 계실 거라 믿겠습니다.”

“설마 저택에 있는 자들에게도 손을 댔느냐?”

“이 시점에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항인 것 같습니다만?”

브리프의 말에서 추측하건대 저택에 있던 자들은 벌써 몰살당한 모양이었다.

증거를 인멸하지 못하게 관계자들을 모두 베어 낸 것이다.

이게 정녕 나라란 말인가!

뒷골목의 시정잡배도 이토록 인정사정없이 일을 진행하진 않는다.

아무리 나라 꼴이 미쳐 돌아간다지만 이건 아니다. 이건 정말로 말이 안 된다.

“네가 그러고도 기사도를 짊어진 기사더냐! 의심스러우면 나를 추궁할 것이지 어찌 무관한 이들에게 손을 댈 수 있냔 말이다!”

그란데 백작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항의해 보았으나 브리프는 안중에도 없다는 양 부하 기사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허가가 떨어짐과 동시에 로얄 나이트 기사들이 포승줄을 들고서 그란데 백작을 에워싸며 거칠게 포박하였다.

맨손에 불과한 그란데 백작에게 무장한 기사들을 뿌리칠 수 있는 수단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란데 백작은 포승줄에 꽁꽁 묶이면서 핏발이 선 눈으로 브리프를 노려보았다.

“더 이상 아무도 해치지 마라. 그리고 당장 이곳에서 물러나거라. 내 선조, 내 가족이 잠든 곳이다. 네놈들이 피비린내 나는 발자국을 남길 곳이 아니니 더 이상 내 가문을 더럽히지 마라.”

“죄송하지만 백작님의 요청을 받아들이긴 힘들 것 같습니다. 보통은 뒤지지 않을 만한 장소가 증거를 숨기기 좋은 장소라지요?”

“브리프! 안 된다! 이곳만큼은… 이곳만큼은!”

납골당을 뒤진다는 것은 남의 묘지를 파헤치는 것과 동일한 행동이었다. 이는 곧 남의 무덤까지 파헤칠 정도로 증거에 목을 매고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이들은 심증만 가지고서 내 아비, 내 아내의 무덤을 파헤치려고 한다.

그란데 백작의 입에서 오열에 가까운 괴성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브리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역겨운 것을 보듯 눈살을 찌푸렸다.

“뭣들 하느냐! 얼른 호송차에 태우지 않고!”

“저… 부단장님. 정말로 수색을 합니까?”

“반역죄인에게 지킬 도리 같은 건 없다! 게다가 반역죄인에게 부관참시는 당연한 형벌이지 않느냐! 순서가 바뀌었을 뿐이니 신경 쓰지 말고 수색해라!”

기사들의 수색에 배려란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로얄 나이트의 단원들은 우악스러운 손길로 단지 뚜껑을 열어젖혔고, 안에 있는 내용물을 거침없이 꺼내어 만천하에 드러냈다. 개중에는 편지가 가득 담긴 백작 부인의 단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와르르!

한 기사가 백작 부인의 단지 뚜껑을 열어젖힌 순간, 단지 안에 가득 차 있던 편지가 바깥으로 흘러넘쳤다.

드디어 문서의 형태를 띤 물건을 발견한 기사들은 냅다 편지를 찢어서 내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편지 봉투가 찢어질 때마다 그란데 백작은 제 살갗이 찢겨 나가는 듯하여 한껏 몸부림쳤다. 하지만 몸부림을 칠수록 포승줄만 살갗을 더 파고들 뿐이었다. 포승줄로 모자라 재갈까지 물린 탓에 더 이상 울부짖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찢어진 편지가 한 장 한 장 바닥에 떨어진다.

피에 젖은 신발이 그 위를 밟고 지나가며 진하디진한 핏자국을 남겼다.

이윽고 그란데 백작은 기사들에게 붙들려 억지로 호송차에 실리게 되었다.

납골당 안에선 브리프가 찢어진 편지 더미를 자근자근 짓밟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제길, 허탕만 쳤군. 하는 수 없지. 명령대로 자백을 받아 내는 수밖에.”

* * *

하니온 공국의 왕궁 안.

내일이면 드래프트 영지로 돌아가는 레이아를 위해 루크는 그녀와 따로 저녁 식사 자리를 가졌다.

“아~ 이게 바다의 3대 신기 중 하나였어요?”

루크는 레이아가 못 보던 스태프를 들고 오기에 뭔가 싶어 살펴봤는데, 다름 아닌 시몬이 들고 있던 스태프였다.

단지 끌린다는 이유만으로 스태프를 집어 온 레이아는 신기해하며 자신의 스태프를 살펴보았다.

“이게 말로만 듣던 메모리 스태프구나.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으면 그대로 물에 흘려보낼 뻔했네요.”

“듣기론 고대의 마법이 등록되어 있는 모양이야. 내가 유배 섬까지 날아간 것도 거기 등록된 마법 때문이었지.”

“어쩐지 이상하더라. 옥토버랑 크라켄 군단을 섬멸하면서 계속 의문이었거든요. 이런 허약한 놈들한테 당하실 분이 아닌데… 하는 의문이 들더라고요.”

“당한 적 없어. 해저 섬에서 유배 섬으로 위치가 바뀌기만 한 거지.”

“지기 싫어하시는 건 여전하시네요.”

“네가 잘못 말한 걸 정정했을 뿐이야.”

“후후, 알겠어요. 정정할게요. 전하는 당하신 적 없으세요.”

“엎드려 절 받기가 따로 없군.”

이렇게 한가로운 시간을 보낸 적이 얼마 만이던가.

이번 원정은 워낙에 변수가 많았기에 특히나 휴식이 달게 느껴졌다. 무거운 짐을 들었다가 놓으면 일시적으로 몸이 가볍게 느껴지는 것처럼, 강도 높은 업무 직후의 휴식은 평소의 휴식보다 훨씬 편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레이아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죽이 잘 맞는다는 느낌이 들어 한결 마음이 편하다.

사고방식이 비슷해서 그런가?

3대 바다의 신기 중 2개를 손에 넣은 것을 자축할 겸 두 남녀는 와인 잔을 부딪치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그러나 즐거운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직 메인 메뉴조차 나오지 않았건만 드골이 급히 찾아오더니 속보를 전했다.

“식사 중에 죄송합니다만 급한 사항이라 바로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며칠 전, 겐크 왕국의 왕가에서 그란데 백작님을 반역죄로 구속하여 골디브로 연행했다고 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사태에 레이아가 들고 있던 와인 잔을 손에서 떨어뜨렸다.

와인 잔은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듯 바닥에 부딪히며 산산조각이 났다.

쨍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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