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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재능으로 환생-125화 (125/200)

# 125

125화 전쟁의 조짐(3)

와인 잔의 파편이 바닥 널리 퍼지며 와인이 카펫을 적셨다. 자줏빛 얼룩이 번지는 가운데 장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이맘때 겐크 왕궁에서 손을 쓰리란 것은 이미 예상한 바이다. 하나 그란데 백작이 연행되는 건 계산에 없던 일이었다.

거사에 관련된 모든 자료는 루크에게로 되돌아왔다. 이제 와서 왕궁에서 수사를 한다고 한들 연행할 만한 건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한데도 연행되었다고 한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명했다. 증거고 나발이고 무시하고 일단 연행부터 한 것이다.

아무리 왕궁이라도 법을 무시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자기가 법을 제정해 놓고 자기가 어긴다?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꼴이다. 체면에 죽고 체면에 사는 계층인 왕족이 제 얼굴에 침을 뱉는 행동을 할 리가 없다.

증거가 없는데 유죄를 확정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다.

1. 증거를 조작한다.

2. 자백을 받아 낸다.

전자의 경우는 이전에 로메우 공왕이 사용했다가 호되게 당한 적이 있다. 루크 앞에서 증거 조작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척에서 목격했던 자들이 똑같은 방법을 되풀이할 린 없다.

소거법에 의해 남은 선택지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겐크 왕궁에선 그란데 백작을 고문하여 자백을 받아 낼 작정인 것이다.

비단 루크만이 이와 같은 추측을 한 게 아니었다.

레이아 또한 루크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눈매를 날카롭게 세웠다.

“드골 백작님.”

방금까지 산뜻하던 분위기의 레이아는 온데간데없고 독이 바짝 오른 독사 한 마리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자타가 공인한 겐크 왕국 최강의 천재 마법사가 독기를 품었다. 건드리면 독니를 틀어박을 듯 진득한 살기가 흐른다. 어찌나 기세가 사나운지 장내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루크 또한 한순간 움찔할 정도였다.

일순 흘러넘친 위압감 앞에서 드골은 저도 모르게 윗사람을 모시듯 정중한 자세를 취하고 말았다.

“어. 왜 그러나, 레이아 양?”

“아버지는 정확하게 언제 연행되셨죠?”

“일주일 전이라고 하네. 드래프트 영지와 직통으로 연결된 수정구로 보고받은 사실이니 오차는 없을 걸세.”

“그렇다면 이제 막 아버지를 실은 호송차가 골디브에 도착했겠군요. 전하, 드래프트 영지로 돌아가려던 예정을 취소하겠어요. 여기 남아도 되나요?”

루크는 목이 타서 잔에 남아 있던 와인을 전부 비우고 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남으라고 말하려던 참이었어. 네가 돌아가면 겐크 왕궁에서 널 체포한다는 명분으로 드래프트 영지에 병력을 투입하겠지.”

역모죄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당사자의 가족들에게도 여파가 미친다. 겐크 왕국에선 그란데 백작의 유일한 가족인 레이아에게도 수배령을 내렸을 터. 지금 레이아가 드래프트 영지로 돌아가면 겐크 왕궁에게 드래프트 영지에 병력을 투입할 계기를 주고 만다.

이와 관련하여 드골이 자신의 의견을 표했다.

“놈들도 레이아 양이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테지요. 이곳으로 기사들을 파견하면 우리도 입장을 확고히 표명해야 할 겁니다.”

드래프트 영지에 로얄 나이트가 들이닥치는 것과 하니온 왕국에 로얄 나이트가 들이닥치는 데 커다란 차이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루크의 유무다.

루크가 앞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놈들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

루크는 조만간 로얄 기사단이 찾아올 것을 감안하여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황금 열쇠를 쓸 때가 왔군.”

황금 열쇠의 언급에 드골의 표정이 굳었다. 황금 열쇠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황금 열쇠란 이전에 손에 넣었던 라그나로스 계획서를 말한다. 라그나로스 계획서에는 카이둔 국왕이 데메그리 교와 내통했다는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라그나로스 계획서를 공개한다는 것은 곧 본격적으로 겐크 왕국을 치겠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예정보다 이른 시기에 전쟁을 벌이게 되었군요. 아직 그레이트 쉘 양식 산업과 오션 마린 채광이 궤도에 오르기도 전인데 말입니다.”

“두 산업이 궤도에 오르면 답이 없다고 판단해서 급하게 그란데 백작을 체포한 거겠지. 카이둔 국왕의 머리에서 나올 만한 생각은 아니고……. 원흉은 블린트 왕자인가.”

“정보국 밀정의 보고에 따르면 카이둔 국왕은 블린트 왕자에게 전권을 위임한 지 오래라고 합니다.”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이든 흐름은 우리에게 있어. 제랄드와 마나마스터 세 명을 모두 왕궁으로 집합시켜. 언제든지 출정할 수 있게 준비해 두라고 지시해야겠어.”

“드래프트 영지에도 연락을 넣겠습니다.”

“그래야지. 러스트에게도 오크 보병들을 갈무리해 두라고 전해 줘.”

전쟁을 앞당겨 치르게 되었으나 이 정도면 상정한 범위 이 내다. 유일한 변수라면 데메그리 교의 존재다. 아직 카이둔과 데메그리 교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면 전쟁에 마물이 투입될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카이둔이 블린트에게 전권을 위임한 것으로 봐선 데메그리 교가 먹튀를 시전했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아직도 데메그리 교를 지원하고 있다면 남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위험을 감수할 리가 없다.

전력 차는 분명히 존재했다.

단지 전쟁이라는 게 당장 일으키고 싶다고 일으킬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얼마간 시간이 들기 마련이다. 그동안 그란데 백작은 계속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한다.

그란데 백작의 투옥이 레이아의 심경에 미칠 영향을 감안하면 마냥 웃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루크는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은 레이아에게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그란데 백작은 괜찮을 거야.”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요. 쉽게 꺾이실 분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이참에 이전부터 미뤄 왔던 일을 처리하자고. 정식으로 비행 부대 대장으로 임명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오즈가 사퇴한 이후로 비행 부대의 대장 자리는 늘 공석이었다. 부대장이 임시로 지휘관 역할을 맡고 있긴 하나 어디까지나 임시에 불과할 뿐이지 정식 대장은 아니다.

6서클 마법이자 모든 속성 재능을 타고난 레이아가 정식 대장으로 활동해 준다면 큰 전력이 될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정식 대장이 되면 그녀가 직접 겐크 왕국에 철퇴를 가할 수 있다.

레이아는 지금쯤 그란데 백작이 당하고 있을 처우를 상상하며 전의를 불태웠다.

“받아들이죠. 프랑크 마탑에서 배울 건 다 배웠으니 이젠 자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내일 정식 임명식을 가지도록 하지. 곧바로 인수인계를 받아서 활동하도록 해. 그래야 로얄 나이트가 널 내놓으라고 해도 우리 일원이라는 주장으로 받아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할게요.”

드디어 겐크 왕국, 그리고 아레나 공국을 손에 넣을 때가 왔다.

특히 아레나 공국은 한번 손에 넣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스스로 기회를 보류했다.

이젠 되찾을 때다.

원래 내 것이었던 땅이다.

나라를 잃었을 때의 상실감을 놈들에게도 똑같이 느끼게 해 주겠다.

* * *

정확히 보름 후, 겐크 왕국의 로얄 나이트가 해협을 건너 벤티버에 도착했다.

왕하 직속 기사단 로얄 나이트, 그들은 벤티버에 도착하자마자 루크와 알현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그들의 용건을 간파해 두었기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루크는 즉시 알현 요청을 받아들였고, 하니온 왕궁의 대강당에 로얄 나이트 단원들이 들어왔다.

역시나 그들은 인사를 올린 후에 곧장 용건을 꺼냈다.

“친애하는 하니온 공국의 공왕 전하, 먼저 기별도 없이 방문했음에도 알현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리 급하게 방문하게 된 것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역모 모의로 구속된 그란데 백작의 딸, 레이아 양이 이곳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 비행 부대의 대장을 맡고 있는 레이아를 말하는 건가?”

“네. 전하도 알고 계실 테지만 반역죄인은 가족까지 형벌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녀를 연행해 갈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십시오.”

“자네 이름이 뭐라고 했지?”

“로얄 나이트의 부단장 브리프라고 합니다.”

“브리프 경, 누군가에게 요청할 때는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제시하는 게 먼저 아닌가?”

“방금 반역죄인의 가족이라는 이유를 말씀드린…….”

“말뿐이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지. 자네가 가져온 공문을 보니 그란데 백작의 반역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는 한 줄도 적혀 있지 않더군. 그냥 겐크 왕가의 명령이니 알아서 기라는 뜻인가?”

로얄 나이트가 공문이랍시고 가져온 두루마리에는 겉만 번지르르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직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은 것이 전부였다.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시점에서 아직도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한 셈이었다.

루크가 증거를 걸고넘어질 것을 예상했는지 브리프는 안색 한 번 바꾸지 않고 응수했다.

“네, 공왕 전하의 말씀대로 지금으로선 심증만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레이아 양을 데려간다면 확실하게 그란데 백작으로부터 자백을 받아 낼 수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딸을 인질 삼아 그란데 백작을 협박하겠다는 거군.”

“너무 부정적으로 해석하시는군요. 누가 봐도 그란데 백작이 역모를 꾀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다만 일을 확실하기 처리하기 위해서 약간의 압력을 가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포장지를 걸친다고 내용물이 달라지는 건 아니지. 내가 듣기엔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다만?”

“하하하, 이거 왜 이러십니까? 공왕 전하의 지위는 겐크 왕국의 국왕 전하께서 내려 주는 겁니다. 국왕 전하의 안위에 위협을 가하려 했던 자를 처벌하는 데 일조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하니온 공국은 어디까지나 겐크 왕국의 속국.

그 사실을 잊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장난질은 여기까지다.

저쪽에서 억지를 부리고 있는 마당에 이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루크는 브리프가 내뱉는 모든 주장이 같잖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되도 않은 장난질은 여기까지만 해 두지.”

“무슨 의미로 하신 말씀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더 이상 그란데 백작을 고문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모두 내가 계획한 일이니까.”

“…….”

루크가 이리도 적나라하게 사실을 밝힐 줄은 꿈에도 몰랐는지 브리프를 비롯한 로얄 나이트 전원이 눈을 끔뻑였다.

난데없는 폭탄 발언에 브리프는 어안이 벙벙하여 말을 더듬었다.

“지, 지금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드골, 저들에게 라그나로스 계획서를 보여 주도록.”

단상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드골이 기다렸다는 양 라그나로스 계획서를 활짝 펼쳤다.

서류에 적혀 있는 내용과 겐크 왕국의 옥쇄 문양이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서 공개되었다.

지척에서 계획서를 가만히 바라보던 브리프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몇 번이고 읽어 내렸다. 하지만 계획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카이둔 국왕이 데메그리 교와 내통했다는 게 확실해질 뿐이었다.

상상도 못 했던 카운터를 맞은 탓에 브리프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하는 단계에 돌입했다.

“이, 이럴 수가.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국왕 전하께서… 어찌, 어찌 데메그리 교 같은 이교도들과…….”

“마물 생산에 일조, 그리고 라그나로스의 봉인을 풀어 대학살을 꾀한 시점에서 인간이길 포기했다고 봐야겠지.”

“아, 아닙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것일 겁니다!”

“이참에 확실하게 입장을 표명해 두지.”

루크는 왕좌에서 몸을 일으키며 이제는 왕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해왕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우리 하니온 공국은 인간이길 포기한 자를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 이 시간부로 겐크 왕국을 적으로 인식할 것이며 카이둔 국왕의 목을 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킬 것이다!”

선전 포고를 기다렸다는 듯 장내 가득 귀족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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