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126화 바벨 형무소의 죄수들(1)
왕궁 외궁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로얄 나이트 연병장.
연병장 가운데에서 로얄 나이트 단장인 호프먼이 한창 죄인을 심문하고 있었다. 아니, 이걸 심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육체적인 고통만 가할 뿐인데 누가 심문이라 하겠는가. 이는 그저 고문에 불과하다.
호프먼은 눈을 깊게 감았다 뜨며 단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틀어라.”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단원들이 주리를 틀었다.
다리 사이에 봉 두 자루가 X 자로 교차하며 그란데 백작의 다리 근육을 사정없이 비틀었다.
즈즈즈즉!
“크아아아악!”
하도 주리를 틀어 댄 탓에 피부가 찢어져 피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현재 그란데 백작의 몰골은 그야말로 마차 눈을 뜨고 못 볼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머리카락은 핏물이 말라붙어 덕지덕지 뭉쳐 있었고, 송충이처럼 굵었던 눈썹은 불에 그슬려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호랑이 얼룩 같은 깊은 주름 속엔 핏물이 고여서 굳은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살이 찢기고, 뼈가 뒤틀리는 와중에도 그란데 백작의 눈엔 여전히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호프먼은 단원들에게 정지 수신호를 보내고 심문을 재개했다.
“그란데 백작님, 저는 개인적으로 백작님을 무척 존경하고 있습니다. 부디 제게 존경하는 분을 고문하는 고통을 주지 마십시오.”
그는 겐크 왕궁에서 그나마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자였다.
겐크 왕국에 남아 있는 다섯 명의 마나마스터 중 한 명이자, 정치적으로도 항상 중립을 고수하고 있는 자이기도 했다.
그란데 백작처럼 뚝심 있는 귀족이 얼마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평소부터 그를 존경해 왔다. 명령 때문이라고는 하나 존경하는 이를 망가뜨리는 일이 유쾌하게 느껴질 리 없었다.
몸이 부서져 가는 와중에도 그란데 백작은 보란 듯이 웃어 보였다.
“허허허, 호프먼. 사지 멀쩡한 모습으로 그런 말을 해 봤자 설득력 없다는 건 알고 있나?”
“어째서입니까, 그란데 백작님? 누구보다 왕국의 평화를 바라던 분이 어째서 반란을 꾀하신 겁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지금 내 머릿속엔 집에 돌아가서 큼직한 스테이크나 한 장 구워 먹고 싶은 마음뿐일세. 올해는 특히나 영지의 소들이 살이 올랐거든. 자네도 올 텐가?”
“백작님.”
“난 자네에겐 아무런 감정이 없네. 하지만 내 곁에 있는 자들을 벤 것과 내 가족들의 묘를 더럽힌 것의 대가는 톡톡히 받아 낼 걸세. 지금의 고문은 자네들의 원망을 미리 받는 셈 치도록 하지. 자, 휴식 시간은 이쯤 하면 되지 않았나? 다시 틀어 보게.”
고문하는 이가 괴로워하고, 고문당하는 이가 웃고 있다. 고문 현장에 어울리지 않는 역설적인 광경이었다.
고문을 재개하려던 찰나, 일련의 무리가 연병장으로 들어왔다.
방문한 이는 다름 아닌 블린트와 왕궁 의원들이었다.
블린트는 호프먼과 그란데 백작의 상반된 표정에서 여전히 수확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호프먼 경, 언제까지 날 실망시킬 거지?”
“왕자님, 제 임무는 왕가를 수호하는 것이지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는 게 아닙니다.”
“역모를 꾸민 것 자체가 왕가를 위협하는 행동일 텐데? 자네에게 맡긴 임무는 고통을 주는 게 아니라 왕가를 수호한다는 본연의 임무 그 자체일세,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호프먼을 한차례 쏘아붙인 블린트가 몸을 돌려 그란데 백작에게 접근했다. 그란데 백작을 응시하는 눈빛에 경멸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험악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 속이건만 그란데 백작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이거 오랜만에 귀한 얼굴을 뵙게 되는군요.”
비아냥거림과 정중함의 중간 단계에 머물러 있는 능글맞은 말투가 사람의 신경을 긁는다.
평소의 블린트라면 마찬가지로 능수능란한 화술을 구사하며 맞받아쳤을 터.
그러나 어찌 된 것인지 블린트는 특유의 화술 대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봉을 줘 보거라.”
블린트는 기사가 쥐고 있던 주리 틀기용 봉을 낚아채며 그란데 백작의 어깨를 내리쳤다.
단단한 강도를 자랑하는 나무 봉이 그란데 백작의 어깨를 가격하며 반 토막으로 부러졌다. 그와 동시에 그란데 백작의 쇄골 부근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발생했다.
빠각!
“크윽!”
금이 간 것인지 강렬한 통증이 번지면서 일시적으로 호흡 곤란이 찾아왔다.
통증으로 인해 말문이 막힌 사이, 블린트가 노기 어린 표정으로 그란데 백작을 내려다보았다.
“그란데 백작, 난 네게 충분히 많은 시간을 줬어. 이제 장난질은 그만두도록 하지. 지금 선택지 두 개를 주겠다. 이 자리에서 반역을 꾀한 것을 인정하든가, 검에 목이 떨어지든가.”
인내심 저장고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는지 급기야 당장 처형할 듯 흉흉한 분위기를 띠는 블린트였다.
그러나 단순한 협박으로 뜻을 꺾을 그란데 백작이 아니었다.
그는 블린트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묵직한 한마디를 날렸다.
“이젠 왕자님도 왕궁 의원들과 똑같은 얼굴이 되었군요.”
블린트가 봉으로 뼈를 때렸다면, 그란데 백작은 말로써 뼈를 때린 격이었다.
왕궁 의원들과 똑같은 얼굴이란 말에 블린트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양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간 탐욕스럽고 충동적인 왕궁 의원들을 보며 계속 데려가야 하나 몇 번이고 고민해 왔다.
한데 작금에 이르러선 자신이 왕궁 의원들과 똑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노력해도 변화하지 않는 현실에 절망한 나머지 어느새 블린트 또한 왕궁의 분위기에 동화되고 만 것이다.
“헛소리 마라! 네가 뭘 아느냐?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고생해 왔는데… 네가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느냐!”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블린트는 왕위 계승권자 세 명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재목은 자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증거로 지금까지 잘못된 선택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가진 조건 속에서 항상 최선의 선택지만을 골라 왔다.
문제가 있었다면 하늘에서 동시대에 자신을 낳고, 루크를 낳았다는 것밖에 없다.
게다가 지원을 해 줘야 할 왕궁 의원들이 도리어 발목만 잡고 있는데 어찌 이기겠는가.
내가 잘못된 게 아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리고 이 시대가 날 거부했다.
흔히들 마음이 불편한 자라고도 한다.
블린트처럼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좌절한 자가 흔히 빠지는 길이기도 했다.
별것 아닌 도발에 발끈한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 마음의 병이 들었음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그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지 블린트는 언성을 높이며 처형을 명했다.
“오냐, 죽는 게 그리 소원이라면 들어주마. 호프먼! 이 자리에서 처형을 집행해라!”
“고정하십시오, 왕자님! 자백을 받아 내지 않고 베면 의미 없는 학살에 불과합니다! 부디 진정하시고 냉정하게…….”
“닥쳐라! 언제까지 이 반역죄인이 멋대로 입을 놀리게 놔둘 생각이냐! 잔말 말고 베라면 베란 말이다!”
명백히 냉정을 잃은 명령이었다.
아무런 증거를 잡아내지 못한 시점에서 자백조차 받아 내지 못하면 아무 이유 없이 일가를 몰살시킨 것밖에 안 된다.
멀쩡한 정신이라면 자백을 받아 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베라는 명령을 내릴 수가 없다.
그만큼 블린트는 망가져 가고 있었다.
블린트의 독촉에 못 이긴 호프먼은 검 자루를 움켜쥐었다.
스릉!
검날이 검집 안쪽 면을 긁으며 청명한 마찰음을 자아냈다.
은빛 검신이 반쯤 빠져나왔을 즈음, 연병장 바깥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다각! 다각! 다각!
말을 타고 복귀한 이들은 다름 아닌 브리프 및 로얄 나이트 단원들이었다.
레이아를 연행하기 위해 하니온 공국으로 떠났던 이들이 지금 막 복귀한 것이다.
브리프는 뛰어내리듯 허겁지겁 말에서 내려 황급히 예를 올렸다.
“블린트 왕자님! 이곳에 계시다 하여 곧바로 이리로 달려왔습니다!”
“브리프, 안 그래도 속 뒤집히는 일뿐이니 너라도 제대로 된 소식을 전해 주리라고 기대하마.”
“이걸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아직도 혼란스러운지라…….”
“그 말은 또 실망스러운 보고가 기다리고 있다고 봐도 되나?”
“실망 여부를 떠나서 부디 냉정히 들어 주십시오. 왕가의 존속이 걸린 일입니다.”
“언제까지 뜸을 들일 거지? 보고할 게 있다면 어서 말하라!”
“그… 카이둔 국왕 전하께서 데메그리 교와 손을 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믿기 힘드시겠지만 제 눈으로 직접 관련 문서를 보고 왔습니다.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
순간 블린트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누가 누구랑 손을 잡았다고?
이게 사실이라면 왕가는 더 이상 왕가로서 존재할 수 없다. 극악한 집단을 지원한 범죄자 가문으로 전락해 버린다. 왕이 스스로 권위를 놓은 순간, 귀족들이 왕가에 충성을 바칠 의무가 사라진다.
카이둔 국왕이 거하게 싸질러 놓은 셈이다.
이제야 그란데 백작이 왜 그리 뻔뻔하게 버텨 왔는지 이해가 되었다. 이게 반역이 아니기 때문에 떳떳하게 굴었던 것이다.
왕가가 범죄자 가문으로 전락했기에 그들을 칠 준비를 한다고 반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데메그리 교를 지원한 자를 치는 것은 대륙 만인의 의무이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에 불과했다.
하면 왜 연행될 때 사실대로 고하지 않은 걸까?
아마 모든 증거가 루크에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주장해 봤자 아무런 효력이 없기에 잠자코 버티고 있었던 것 같다.
상상도 못한 사태에 블린트는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으으…….”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으니 놓아라. 그리고 타고 온 말은 내가 쓰마. 내 당장 아바마마를 찾아가 확인하겠다.”
“그란데 백작은 어찌할까요?”
“다시 투옥시켜라. 이리된 이상 어디까지 준비해 놨는지라도 알아야 한다. 루크 그 사내가 오래전부터 이 사실을 알았다면 더 준비해 둔 게 있을 거다.”
간신히 냉정을 되찾긴 했으나 블린트의 정신 상태는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였다.
블린트가 브리프의 도움을 받아 말에 올라타 급히 연병장을 떠났다.
한차례 폭풍이 쓸고 지나간 듯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호프먼은 그란데 백작을 일으켜 세웠다. 그 과정 속에서 그는 똑똑히 보았다. 그란데 백작이 이때를 기다렸다는 양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곧 태풍이 불어닥칠 걸세. 자네도 미리 마음을 정리해 두는 게 좋을 게야.”
호프먼은 소리 없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선 초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나무는 처음부터 자라 온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썩은 땅이라 할지라도?”
노골적인 비유 앞에서도 호프먼의 결의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무에게 땅을 고를 권리는 없으니까요.”
* * *
“그놈들 얘기는 꺼내지도 말거라.”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카이둔 국왕을 찾아가 물으니 문 너머에서 날이 선 대답이 돌아왔다.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뿐이지 데메그리 교와 내통을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수면 아래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작업에 대해 알게 된 순간, 블린트가 느낀 절망의 깊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깊었다.
동시에 왜 엘리나가 볼모를 자청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사전에 알고 있었던 거군. 미리 알고서 몸을 뺀 거였어.”
줄곧 의아해했던 부분이다. 한창 왕위를 두고 경쟁하다가 갑자기 볼모로 떠나 버린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전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카이둔 국왕이 데메그리 교와 내통하고 있었던 것도, 그리고 루크가 겐크 왕국을 칠 수 있는 대의명분을 손에 쥐고 있다는 것도.
그렇기에 이 사태에 연관되지 않을 수 있는 외부인 포지션을 선점한 것이다.
공공의 적이 되어 버렸다곤 하나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순 없는 노릇이다.
어떻게든 방법을 짜내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무력에 있어 너무나도 많은 차이가 벌어졌다는 점이다.
일단 부족한 무력부터 보충해야 한다.
잠시 고민하던 블린트는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기로 결심했다.
“마차를 준비하거라. 바벨 형무소로 간다.”
바벨 형무소는 겐크 왕국 내에서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가둬 두는 감옥이었다. 투옥 조건부터가 ‘최소 30년 형 이상을 받은 자’일 정도이니 그 안에 갇혀 있는 자들의 극악무도함은 말할 것도 없는 사항이었다.
전쟁을 앞둔 시점에서 바벨 형무소로 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자는 없었다.
왕궁 의원들은 심히 걱정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놈들은 통제가 되지 않는 녀석들입니다. 명령대로 싸워 줄까요?”
블린트라고 죄수들을 이용하는 것이 달가울 리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뭐라도 하지 않으면 당하는데 얌전히 목을 내밀고 기다릴 순 없지 않은가.
블린트는 손톱이 살갗에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며 독기를 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이더냐. 놈을 막아야 한다. 그래야 산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