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127화 바벨 형무소의 죄수들(2)
같은 시각, 하니온 동부 해안의 대도시 파이넨에 함선 수십 척이 모여들었다. 더불어 함선에 올라탈 병력이 도착하면서 도시 전역에 진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파이넨에 모여든 병력의 숫자는 무려 2만 명.
마찬가지로 남부 해안의 대도시인 마트리에서도 병사 2만 명이 응집해 있다.
파이넨의 병력은 겐크 왕국으로, 마트리의 병력은 아레나 공국으로 떠날 예정이다.
총 4만 명의 원정군이 바다를 건너 뭍에 도착한 순간부터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루크는 갑판 위에서 항구에 정렬해 있는 군대를 좌시하며 입을 열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겐크 왕국의 국왕, 카이둔이 데메그리 교와 내통했다는 명분으로 이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지.”
루크의 연설이 시작되면서 일동 전원 입을 꾹 다물고서 귀를 쫑긋 세웠다.
이 전쟁이 데메그리 교를 지원한 카이둔 국왕과 그 일가를 토벌하기 위한 전쟁임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카이둔 국왕 때문에 마물에 시달려야 했던 하니온의 병사들에겐 특히 의미가 남달랐다.
현장에 있는 일동 전원은 분명 정의 구현을 주제로 한 일장 연설이 펼쳐질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루크는 대의명분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양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런 구실 좋은 명분은 우리 상층부가 짊어질 테니 너희는 스스로를 위해 싸워라. 너희는 싸우지 않은 자들이 부러워할 만큼의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가는 것이다. 그 점을 가슴 속에 새겨 두도록.”
개인의 이익은 사람의 의욕을 북돋을 가장 단순하고도 효과적인 동기 부여다.
내가 이 전쟁을 이기게 한다. 그리고 가장 많은 보상을 얻겠다.
전원이 이렇게 생각하여 하나로 뭉친다면 그 이상의 시너지는 없을 것이다.
자신을 위해 싸우라는 단순한 메시지는 병사들의 사기를 한껏 끌어 올렸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물자는 넉넉히 준비해 두었고, 기사들의 실력은 믿어 의심치 않아도 되며,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른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남은 건 원래 내 것이었어야 할 땅을 이자까지 쳐서 받아 내는 것뿐이다.
* * *
배를 타고 해협을 건넌 루크는 오랜만에 드래프트 영지에 돌아왔다. 드래프트 영지민들은 근 1년 만에 돌아온 루크를 열렬히 환영했다.
원래부터 사람이 많은 영지이긴 한데 지난 1년 동안 더 불어난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격한 함성 속에서 루크는 러스트와 조우했다.
“전하의 충실한 신하, 러스트 자작이 인사 올립니다.”
한때 오크들의 리더였던 그는 드래프트 영지를 맡으면서 자작 작위를 받게 되었다. 지난 1년간 루크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는지 이전보다 핼쑥해져 있었다.
고생의 흔적이 보이는 모습에 루크가 농담 삼아 가볍게 한마디 툭 날렸다.
“어때? 직접 해 보니까 영주 업무도 별거 아니지?”
왕과 귀족 사이가 되었어도 이전과 다를 것 없는 거리감이었다.
계급이 바뀌어도 루크는 루크란 생각에 러스트가 피식 웃고 말았다.
“전하께서도 여전하시군요. 잘 지내신 것 같아 안심했습니다.”
“내가 있을 때보다 영지민 숫자가 늘어난 것 같은데?”
“최근에 겐크 왕국 사정이 많이 안 좋아져서 그 여파로 이민 오는 자가 늘었습니다.”
“들었어. 카이둔 국왕이 국정을 돌보길 포기하고 블린트 왕자에게 전권을 위임했다지?”
“네, 아무래도 카이둔 국왕이 데메그리 교에게 막대한 자금을 퍼부었던 것 같더군요. 현 상황을 바로잡는 데 사용할 돈이 없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작금의 겐크 왕국은 아직도 아레나 공국과의 전쟁 때 입은 피해를 복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피해를 복구하려면 예산이 필요한데, 그 예산을 데메그리 교 지원에 할당해 버렸으니 다른 곳에 돌아갈 것이 없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어쩔 수 없이 가장 싸게 부릴 수 있는 군대를 이용하여 대민 지원에 투입시키고 있긴 한데, 경제 회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준은 못 되었다.
역으로 대민 지원에 군을 투입시킨 탓에 군사 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군대의 질이 떨어지고 있다고 한다.
러스트는 대기시켜 둔 마차의 문을 손수 열며 탑승을 권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저택에 가서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번에 우리 쪽에 가담하기로 한 분들도 저택에서 기다리는 중입니다.”
루크는 정식으로 공왕의 자리에 오르기 전, 그란데 백작에게 한 가지 지시를 내려 두었다.
라그나로스 계획서의 원본을 가지고 지방을 돌며 겐크 왕국의 귀족들을 포섭하라고 했었다. 그중에서 특히 마나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들을 중점적으로 공략해두라 했는데, 사전 공작이 결실을 맺은 모양이다.
계속 선착장에 서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 마차에 오르는 게 좋을 것 같긴 하다.
루크는 예전에 자신이 애용하던 검은색 마차에 올라타 저택으로 향했다.
* * *
하니온 왕궁이 불편한 건 아니다만 드래프트 영지의 저택에 돌아오니 집에 온 것처럼 마음이 푸근해졌다. 흡사 독립해서 나갔다가 고향 집에 돌아온 기분이다.
파이가 하도 쪼아 대어 칠이 다 벗겨진 닭 모형 풍향계 하며 늘 담벼락 위에서 볕을 쬐는 길고양이, 그리고 수련하다가 생긴 정원 땅바닥의 검흔까지.
정겨운 기분이 드는 가운데 깔끔한 정장을 입은 귀족 무리가 루크를 맞이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루크 공왕 전하. 바스커 백작이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바스커 백작은 겐크 왕국에 남아 있는 마나마스터 다섯 중 한 명으로, 루크와는 다소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그 왜, 로메우 공왕의 목을 치고 나서 겐크 왕국에 복귀할 때 백작 한 명과 함께 돌아오지 않았는가. 그때 함께 돌아오며 루크의 앞날을 걱정해 주었던 사람이 바로 바스커 백작이다.
‘같은 전장에서 한 번이라도 같이 식사를 한 자는 전우이자 동료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답게 부와 명예보다는 도리와 의리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루크는 바스커 백작에게 고개를 들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오랜만이군, 바스커 백작. 로메우 공왕 처형 이후로 처음이던가?”
“네, 그간 소원했지요. 시골 귀족이라 어디 감히 알현을 청할 면목이 있어야 말이죠.”
“바스커 백작령이 시골이라니, 농담이 심한걸?”
“하하하, 전하께서 지내고 계신 벤티버에 비하면 시골 아니겠습니까.”
허물없이 호탕하게 웃는 모습은 여전했다.
바스커 백작 외에도 귀족들이 차례차례 루크와 인사를 나누었다. 대부분이 상당한 재력과 군사력을 자랑하는 지방의 유력 인사들이었다.
포섭한 귀족들의 전력만 합치더라도 겐크 왕국 전체 전력의 3할에 해당했다.
모두 그란데 백작이 발품을 팔아 준 덕분이었다.
조금 아쉬운 것이 있다면 포섭한 자들 가운데 마나마스터는 바스커 백작 한 명이 전부라는 점이었다.
이내 루크는 귀족들과 함께 저택으로 들어가서 원탁을 사이에 두고 둘러앉았다. 그러고는 포섭한 마나마스터가 바스커 백작뿐인 것을 짚고 넘어갔다.
“나머지 마나마스터들은 동조하지 않은 모양이군.”
러스트가 손을 들고 루크가 지적한 부분을 답했다.
“다른 마나마스터들은 그란데 백작님이 아예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블린트 왕자파에 속한 자들이라서 섣불리 접근하면 사전에 계획이 유출될 가능성이 있다며 제외하셨습니다.”
“그래도 호프먼은 시도해 볼 법한 사람이었을 텐데?”
“사람 됨됨이는 둘째 치고 왕가를 수호하는 사람이다 보니 안전을 고려하여 포섭 대상에서 제외한 것이겠지요.”
“그러면 적군에 마나마스터 4명이 있다는 가정하에 작전을 짜면 되겠군.”
“하니온 공국에도 마나마스터 3명이 있다고 들었는데 전부 데려오셨습니까?”
“아니, 1명만 데려왔어. 나머지 2명은 제랄드와 함께 아레나 공국으로 보냈지.”
아레나 공국 점령은 제랄드에게 일임했다. 아레나 공국은 마나마스터 2명을 보유하고 있기에, 숫자를 맞추기 위하여 라샤와 아캄프를 옆에 붙여 주었다.
루크는 지금의 제랄드라면 아레나 공국쯤은 능히 점령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때문에 루크와 함께 드래프트 영지로 온 마나마스터는 바이스가 전부였다.
이에 바스커 백작이 현재 전력을 정리하여 입에 담았다.
“마나마스터만 따지면 저쪽은 4명이고, 이쪽은 2명이군요. 그런데 마나마스터의 숫자를 비교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지요. 이쪽엔 전하께서 계시니 말입니다.”
그랜드마스터 앞에서 마나마스터의 숫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루크를 막을 방법이 없는 이상 아무리 많은 마나마스터를 끌어모은다 한들 겐크군의 승산은 희박했다.
하지만 루크는 그리 간단히 생각하지 않았다.
“마법사와 비행 부대의 전력 차이도 염두에 둬야겠지. 러스트, 오즈 학장의 의견은 어때?”
“아무래도 나이 때문에 힘들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어지간히 급한 게 아니면 쉬게 해 드리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겐크군에 소속된 6서클급 마법사의 숫자는?”
“지금까지 파악한 바에 의하면 3명입니다.”
“우리 쪽은 레이아 한 명이군. 여차하면 라그나로스와 아쿠아를 동원하는 걸로 때우자고. 전력은 얼추 파악한 것 같으니 진군 루트를 정하도록 하지.”
루크는 골디브로 진격하기 위해서 군대를 세 부류로 나 었다.
루크 본인이 이끄는 하니온군 2만 명은 중부 지방을 관통하여 정면으로, 러스트가 이끄는 드래프트군 5천 명은 배를 타고 이동하여 동쪽 루트로, 이번에 포섭한 귀족들은 바스커 백작을 필두로 병력 1만 5천 명을 모아서 서쪽 루트로 진격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총합 4만 명의 병력이 골디브 공략에 나서게 되었다.
각자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 출정 준비를 하기로 하고 해산하려던 찰나, 바스커 백작이 신경 쓰이는 게 있다는 듯 추가 정보를 언급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심상치 않은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블린트 왕자가 선전 포고을 듣자마자 바벨 형무소로 향했다더군요.”
“바벨 형무소?”
“흉악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가둬 두는 곳이지요. 과거에 마나마스터였던 자들도 있고, 특이한 능력을 지닌 타 종족 인물들도 다수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전쟁에 죄인들을 동원할 속셈인가 보군.”
블린트도 나름대로 통박을 굴려 보려고 도박 수를 던진 모양이었다.
죄인을 전쟁에 동원하는 경우는 역사상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 한들 통제가 안 되는 부류라는 점에서 스스로 불안 요소를 떠안는 행동이기도 했다.
블린트 입장에선 불가피한 선택이긴 하나 썩 좋은 수라고 볼 순 없었다.
그런데 마냥 가벼이 넘길 일은 아니라는 양 바스커 백작이 진중한 표정으로 특정 인물을 언급했다.
“통제하기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긴 해도 가볍게 무시할 수준의 전력은 아닙니다. 만약에 블린트 왕자가 최상층에 갇혀 있는 그자를 전쟁에 투입한다면… 이 전쟁 생각처럼 쉽게 흘러가진 않을 겁니다.”
“그자라면?”
바스커 백작은 과거에 한 인물에 의해 벌어진 참상을 떠올리며 그자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최악의 경우에는 학살이 취미였던 천공 섬의 추방자, 용인 쟈칼이 세상에 나올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