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128화 바벨 형무소의 죄수들(3)
겐크 왕국 북부 지방에는 기다란 장벽이 세워져 있다.
수백 년 전 겐크 왕국이 아직 소국에 불과할 무렵, 거인족들의 침입을 막고자 천재 건축가 카라스코의 힘을 빌려 세운 장벽이다.
7서클 마법도 막아 낸다는 천재 건축가의 성벽은 오랜 기간 거인들로부터 겐크 왕국을 지켜 주었다.
카이둔 국왕이 거인국과 대등한 전쟁을 펼칠 수 있던 것도 전부 카라스코가 만든 장벽 덕분이었다.
하지만 겐크 왕국 북부에는 장벽만 있는 게 아니다. 카라스코가 심심풀이로 장벽을 세우고 남은 재료로 탑을 세웠는데, 그때 세운 탑 또한 장벽 못지않은 견고함을 자랑했다.
훗날 겐크 왕국의 왕들은 탑을 감옥으로 활용하였고, 바벨 형무소란 이름을 붙여 경악스러운 범죄를 저지른 죄수들을 가둬 두기 시작했다.
죄수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곳답게 평소에는 고요하기 짝이 없으나 간만에 왕족이 방문하면서 간수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블린트 왕자님. 바벨 형무소의 소장 데무트가 인사 올립니다.”
애꾸눈에 꼽추처럼 등이 굽은 늙은 소장이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를 올렸다.
블린트는 데무트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탑으로 들어가며 용건부터 꺼냈다.
“20층으로 안내해라.”
20층이란 말에 데무트가 하나뿐인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표정을 달리하였다.
“외람되오만, 무슨 용건으로 20층으로 가시려는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하니온 공국이 우리에게 선전 포고를 했다는 건 알고 있나?”
“뭐… 알고 있기야 하지요.”
현재 겐크 왕국 내에서 선전 포고 얘기는 다들 쉬쉬하는 주제나 다름없었다. 겐크 왕국의 기득권층이라고 카이둔 국왕이 잘못한 걸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여전히 겐크 왕국에 붙어 있는 것은 현재 체제가 유지되어야만 자신이 먹고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누려 왔던 모든 특권과 혜택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그릇된 선택인 것을 알면서도 따르는 것이었다.
데무트는 대화의 흐름상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며시 운을 띄웠다.
“혹시 죄수들을 전쟁에 투입하실 생각이십니까?”
“안 되는 이유라도?”
“하다못해 3~5층에 있는 자들을 데려다가 화살 받이나 노역을 시키는 용도로 활용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20층에 있는 자들을 세상에 내보내는 건 그다지 권해 드리고 싶지 않군요. 놈들은 위험한 데다 통제가 불가능한 놈들입니다.”
“데무트 소장.”
“네, 왕자님.”
“안내하라면 안내할 것이지 왜 자꾸 토를 다느냐? 내가 네놈을 의심하게 만들 생각인 건가?”
“허, 헉! 저, 절대 아닙니다! 이리로 오십시오. 당장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한마디만 더하면 곧바로 적군의 첩자로 몰아갈 듯 예민한 분위기 속에서 데무트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그렇다곤 해도 20층에 갇혀 있는 자들을 세상에 내보내는 게 마냥 달갑진 않았다.
바벨 형무소는 형기에 따라 갇히게 되는 층수가 달라진다.
1층과 2층은 형무소 간수들과 인부들의 생활 공간, 그리고 3층부터 30년 형기의 죄수들이 갇혀 있다.
3층은 30년 형, 4층은 40년 형, 5층은 50년 형 등등…….
3층부터 1층씩 올라갈 때마다 형기가 10년씩 늘어나는 셈이다. 20층의 죄수들은 200년 형. 즉, 사실상 무기 징역 이상의 징역살이를 선고받은 자들이다.
그만큼 죄질이 나쁘며 통제가 거의 불가능한 자들밖에 없다. 게다가 가진 힘 또한 위험하기 짝이 없으니 그들을 풀어놓는 것은 통제되지 않는 대량 학살 무기를 방치해 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데무트에게 거부할 권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위에서 까라면 까야 하는 위치에 놓인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명령을 따르는 것밖에 없었다.
“불편하시겠지만 20층까지 가려면 한참을 걸어 올라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절대로 제게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원래 이 탑은 천재 건축가 카라스코가 심심풀이로 만든 미로의 탑이기 때문에 한 번 길을 잃으면 영영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데무트는 몇 번이고 주의를 준 후에야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는 등이 굽은 노인이 맞나 싶은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그를 따라 블린트 또한 왕궁 의원들과 함께 숨을 몰아쉬며 가파른 계단을 타고 올랐다.
* * *
3시간 후, 블린트 일행은 바벨 형무소 20층에 도착했다.
탑 자체가 마치 살아 있는 미로처럼 변화무쌍하게 길이 바뀌었던지라 20층까지 도달하는 데 3시간이란 시간이 걸렸다. 심지어 데무트의 안내 덕에 가장 빠른 루트로 왔는데도 이 모양이다.
막상 20층에 도착하니 복도 양쪽 벽에 일정한 간격으로 두꺼운 철문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철문에는 감옥 안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직사각형의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블린트는 20층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확인하고자 가까이에 있는 철문에 다가갔다.
“이곳에 죄수들을 가둬…….”
“가까이 가시면 안 됩니다!”
데무트가 기겁하며 문에 접근하려는 블린트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블린트에게 겨누어 마법을 시전했다.
“실드!”
블린트의 몸 주위에 푸른 막이 씌워지면서 방어 태세가 갖추어졌다.
이어서 데무트는 자신의 몸 주위에도 실드를 두른 후에야 접근을 허락했다.
“이곳에 있는 자들이 강력한 힘을 지닌 죄수들임을 잊지 마십시오. 실드 없이 접근했다간 무슨 짓을 당할지 모릅니다.”
“이곳의 죄수들은 구속복에 마나 봉인 족쇄를 채워 두는 걸로 안다만, 그래도 위험한가 보지?”
“저도 한때 그렇게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지요. 그 대가를 눈으로 치렀으니 비싼 대가를 치른 셈이지요. 왕자님께 같은 불상사를 겪게 해 드릴 순 없습니다.”
한쪽 눈에 안대를 차고 있는 데무트의 몰골이 이곳 죄수들의 위험성을 여실히 말해 주고 있었다.
20층의 위험성을 말해 주는 산증인이 눈앞에 있는데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블린트는 데무트의 경고를 마음 깊이 새기며 실드를 두른 채로 죄수들을 살펴보았다. 철문에 뚫려 있는 직사각형 구멍으로 죄수들을 일일이 살펴보았는데, 별다른 특이점은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 죄수는 구속복과 마나 봉인 족쇄 때문에 몸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고, 손을 사용할 수 없기에 개처럼 꿇고 돼지죽을 먹어 댄 탓에 지저분한 꼬락서니를 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블린트와 죄수 간에 눈을 마주쳐도 관심 없는 척 시선을 돌리는 게 고작이었다.
의외로 얌전하기 그지없는 죄수들의 태도에 블린트는 의구심을 감추지 못했다.
“흉악 범죄자들이라더니 다들 얌전하군. 평소에 교육을 잘해 뒀나 보지?”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곳만큼은 저희들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20층을 통제하고 있는 건 저희가 아닌 녀석이지요.”
“녀석이라면 그자를 말하는 건가?”
“네, 이곳의 죄수들은 쟈칼의 통제하에 놓여 있습니다.”
백 년 전, 천공 섬에서 추방된 용인이 한 명이 있었다. 그는 살육과 학살에서밖에 쾌감을 느끼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취향의 소유자이자 동시에 용인 가운데서도 특출난 무력을 자랑하는 실력자이기도 했다.
그가 천공 섬에서 추방당하여 지상으로 내려왔는데, 떨어진 곳이 하필 겐크 왕국이었다. 그가 활동하는 동안 죽은 인간의 숫자만 1,000명이 넘는다.
용인의 혈족 귀속 능력인 드래고니안 브레스는 일격에 마을 하나를 섬멸할 위력을 지녔으며 용족의 상징인 드래곤 스케일은 마나 면역을 띄고 있어 그 누구도 그의 몸에 상처를 내지 못했다.
과거에 겐크 왕가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쟈칼을 체포했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전전대 국왕이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쟈칼을 풀어 주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블린트에게 있어선 증조부 되는 자가 내린 명령이었으니 마땅히 따라야 하나, 지금 이 순간 겐크 왕가의 명맥을 이어 가기 위해 금기를 깨고자 한다.
블린트는 20층 가장 안쪽 구석에 있는 방 앞으로 갔다. 그러고는 철문에 달린 구멍을 통하여 감옥 안을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죄인 쟈칼, 그대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
감옥 안에는 한 사내가 있었는데, 그가 입고 있는 구속복은 남들보다 몇 배는 두꺼웠으며 양손과 양발에 달려 있는 족쇄는 남들보다 몇 배는 무거워 보였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관절이 뒤틀리고, 피부가 짓눌리는 복장이건만 사내의 표정은 마치 제집 안방에 누워 있는 것처럼 편안하기 짝이 없었다.
더하여 사내의 몸 전체를 덮고 있는 견고한 붉은색 비늘과 악어를 연상하게 하는 기다란 주둥이, 사슴의 뿔처럼 머리 위에 뻗어 있는 두 개의 뿔까지.
이 모든 신체적 특징은 그가 용의 힘을 타고난 용인이라는 것을 알려 주는 지표나 다름없었다.
쟈칼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금빛 눈동자를 드러냈다.
“겐크 왕가 특유의 노린내가 진동하는군.”
“무엄한 놈! 블린트 왕자님 앞이다! 말을 골라서 하거라!”
“큭큭큭, 꼽추 노인네 당신은 빠지시지. 내게 용건이 있는 건 왕자 쪽 아닌가?”
블린트가 손을 옆으로 뻗어 발끈하는 데무트를 뒤로 물렸다.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서너 걸음 이상 물러나게 하여 쟈칼과 둘이서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쟈칼, 조만간 이 나라에서 전쟁이 벌어질 예정이다. 날 위해 싸워라.”
“농담이 심하군. 뭣 때문에 100년이나 날 여기 가둬 둔 나라를 위해 싸워야 하지?”
“여기 오기 전에 너에 대한 조사를 좀 해 봤지. 비밀 서고에서도 가장 안쪽에 숨겨져 있더군. 하긴 왕가에서 죄 없는 여인을 인질로 잡아 범죄자를 체포했으니 진실을 숨기고 싶은 게 당연하겠지.”
한 여인을 언급하자 쟈칼의 눈동자가 경계심을 품은 도마뱀처럼 가늘게 좁혀졌다.
“내가 마나 봉인 족쇄에 묶여 있는 것을 감사히 여기거라. 손발만 자유로웠다면 이 자리에서 네놈을 찢어 버렸을 거다.”
“조사해 보니 의외로 로맨티스트더군. 학살이 취미인 용인이 인간 여자와 사랑에 빠질 줄 누가 알았겠어?”
덜컹덜컹!
역린을 건드린 양 쟈칼이 당장이라도 족쇄를 끊고 뛰쳐나올 듯 몸부림을 쳤다.
멀리 떨어져 있던 데무트와 왕궁 의원들이 놀라서 다가오려 했으나, 블린트는 손을 휘저으며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하였다. 그러고선 다시금 쟈칼의 살기 어린 눈빛을 마주하며 대화의 흐름을 이어 나갔다.
“자네가 투옥된 뒤에 여인이 어떻게 되었는지 줄곧 궁금했을 테지. 알아보니 여인은 하니온 왕국으로 넘어가서 귀족가의 부인이 되었다는군.”
“날 전쟁에 투입시키고 싶은 거 아니었나? 내 심기를 자극해서 어쩔 작정이지?”
“말을 끝까지 듣도록. 네가 사랑했던 여인의 후손이 적군의 비행 부대 대장으로서 전쟁에 참가할 예정이다. 초상화를 비교해 보니 아주 쏙 빼닮았던데 말이야. 네가 원한다면 포로 한 명을 마음대로 취할 권리 정돈 주도록 하지.”
살기등등하던 쟈칼의 기세가 서서히 사그라들며 이내 곧 잠잠해졌다.
비늘이 촘촘하게 덮여 있는 입꼬리가 비틀리는가 싶더니 자캴의 눈동자에 탐욕이 깃들었다.
“자신만만하게 구는 이유가 있었군. 나와 거래를 하잔 건가?”
“이해관계는 일치한다고 생각한다만?”
“방금 제시한 권리에 남은 형기를 탕감해 주는 조건이면 받아들이마.”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오순도순 남은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해 주마.”
“협상 성립이군.”
“그리고 20층에 있는 죄수들은 네 통제하에 있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같은 층의 쓰레기들? 큭큭큭, 심심풀이로 드래곤 피어를 몇 번 내질러 주니 알아서 기더군.”
“다른 죄수들도 전쟁에 투입시킬 예정인데 죄수들의 통제는 그쪽에게 맡겨도 되겠지?”
“모처럼 기분 좋은 제안을 받았으니 그 정도 덤은 얹어 줘야겠지.”
서로의 이해관계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면서 용인 쟈칼의 석방이 확정되었다.
블린트의 명령하에 쟈칼을 비롯한 20층 죄수들이 차례차례 족쇄를 벗고 철문 바깥으로 나왔다.
쟈칼은 오랫동안 짓눌려 있는 족쇄 자국을 손으로 꾹꾹 누르면서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간만에 코에 바깥 공기를 쑤셔 넣을 수 있겠군. 어이, 왕자. 없애야 할 적이 누구라도 했지?”
블린트가 이젠 존경해야 할 적에서 증오의 대상이 된 한 사내를 떠올리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하니온 공국군의 수장, 루크 공왕의 목을 가져와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