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129화 누구든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긴 하지(1)
루크는 2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서 이너프 산맥을 넘었다. 드래프트 영지의 영주였던 시절, 제랄드를 시켜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길을 찾아놓으라고 했었다.
당시에 제랄드가 찾아놓은 고갯길을, 러스트가 자작 작위를 받은 후부터 본격적으로 도로 공사를 시작하여 대량의 화물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루트가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2만 명이나 되는 병력이 무탈하게 이너프 산맥을 넘을 수 있었다.
드래프트 영지에서 이너프 산맥을 넘으면 곧바로 사이온 자작령이 나온다.
사이온 자작.
이 이름을 들어 본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특출난 재능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영지에 특별한 특산물이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인맥이 넓은 것도 아니다.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영지의 평범한 영주에 불과하다. 그나마 특징적인 부분이 있다면 성격이 배배 꼬여 있다는 것 정도일까.
그러나 루크는 사이온 자작에 대해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시간을 많이 거슬러 올라가 마탑 유치를 위해 움직이던 무렵, 사사건건 루크에게 시비를 걸었던 자이다. 당시 마탑 유치 간담회가 진행되는 내내 시비조로 말을 걸었다가 루크의 화술에 휘말려 꼬리를 말기 일쑤였던 자이기도 하다.
사이온 자작령을 관통하듯 가로지르며 이동하던 중 삼색 제비를 타고 정찰을 나갔던 레이아가 본대에 복귀하였다.
“비행 부대 대장 레이아, 지금 막 복귀했습니다.”
“보고해.”
“이 앞의 산성에 병력 2만 명이 모여 있었어요. 군량은 대형 창고 3채 분량이었고요.”
“사이온 자작령에 그 정도 병력을 갖출 능력이 있을 린 없을 거고. 인근 귀족들이 전부 이곳으로 모인 건가.”
“그렇다곤 해도 병력이 너무 비정상적으로 많아요. 산성 한편에서 급하게 기초 훈련을 시키고 있던 걸로 봐선 영지 내에 있는 모든 사내를 무장시켜서 병력을 뻥튀기한 것 같아요.”
사이온 자작령의 기존 병력은 기껏해야 800명에 불과하다. 인근 귀족들이 전부 병력을 모아 집결했다 하더라도 최대 5,000명이 한계일 것이다.
하지만 영지 내에 있는 영지민들까지 총동원했다면 얘기가 다르다. 청년 가장이나 자식이 하나뿐인 가정, 복무하는 대신 군포를 내는 집안의 사내들은 징집 대상에서 제외된다.
비상시이기에 징집 제외 대상, 그리고 어린아이와 노인까지 전부 동원하여 진을 친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순 없으니 머릿수만이라도 채우려고 비전투원들을 무장시킨 셈이었다.
머릿수는 채웠지만 최대 수용 인원의 4배에 달하는 병력을 끌어모았기에 운영이 제대로 될 리 만무했다.
“대형 창고 3채 분량이면 2만 명 기준으로 최대 1달 정도 버티겠군.”
“평범하게 먹으면 그렇겠죠. 적들도 그걸 아는지 벌써부터 배식 조절에 들어가고 있더라고요. 아직 전투 시작도 안 했는데 산등성이에서 나무껍질을 벗기고 있었어요.”
나무껍질을 벗겨 달여 먹으면 소량의 열량을 섭취할 수 있긴 하다. 그러나 이건 정말로 식량이 없을 때나 쓰는 방법이다.
전투를 시작하지도 않았건만 벌써부터 배식 조절에 들어갔다는 것부터가 양쪽 군대의 격차를 보여 주는 지표나 다름없었다.
레이아는 메모리 스태프를 강하게 쥐며 전의를 내비쳤다.
“제게 출전 명령을 내려 주세요. 사이온 산성 정도는 손쉽게 무너뜨릴 자신이 있어요.”
그란데 백작이 고문 속에서 자백을 종용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 날이 바짝 서 있는 레이아였다.
성질을 내지 않는다 뿐이지 누구 하나 걸리기만 하면 아작을 낼 기세다. 마치 소용돌이치는 마그마를 억누르고 있는 휴화산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의욕이 넘치는 것은 좋으나 터뜨릴 장소를 잘못 골라선 곤란하다.
고작 사이온 자작을 상대로 도화선에 불을 붙이기엔 아깝지 않은가.
루크는 손을 저으며 레이아를 진정시켰다.
“아직 네가 나설 차례가 아냐. 때가 되면 출전시켜 줄 테니 지금은 마나를 비축해 둬.”
“마음 같아선 다 부숴 버리고 당장 골디브로 향하고 싶어요.”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모든 일엔 순서란 게 있는 법이야. 우리가 왜 이 전쟁을 시작했지?”
“겐크 왕국과 아레나 공국을 손에 넣기 위해서죠.”
“잘 아는군. 무작정 부수기만 해선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이 전쟁은 얻기 위한 싸움이지 부수기 위한 싸움이 아니란 걸 명심해 둬.”
“알겠어요. 명심해 둘게요.”
부수고, 죽이고, 짓밟고.
그저 상대를 파괴하는 것뿐이라면 힘만 있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왕국을 부수기 위해서가 아닌 얻기 위해서 온 것이기에 의미 없는 파괴는 안 하니만 못하다.
루크의 행동 밑바닥에는 항상 효율이란 주춧돌이 깔려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급히 쌓아 올린 담벼락은 약풍에도 쉬이 무너지는 것처럼 사이온 자작령의 산성도 밑에 깔린 돌 하나만 흔들면 쉬이 무너질 것이다.
이미 루크의 머릿속엔 산성이 무너지는 이미지가 그려지고 있었다.
* * *
“누가 진지 공사를 이따위로 해 놨어? 여기 담당 부대가 어디야? 백인장 불러!”
“하니온군이 접근해 오고 있다! 얼른 지정된 위치로 움직여! 야, 이 새끼들아! 너희 뭐야! 훈련한 지 며칠째인데 아직 오와 열도 못 맞춰? 왼발! 왼발! 왼발! 몸이 안 따라 주면 구령이라도 붙이면서 움직이든가!”
“무기를 잃어버렸다고? 아니, 안 그래도 무기가 모자라 죽겠는데 뭐 하자는 거야?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사이온 산성 안쪽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사람은 많은데 취사병의 숫자가 모자라서 매번 설익은 음식이 제공되기 일쑤였고, 무기가 모자라 대충 죽창을 깎아다가 배부하다 보니 식별 번호가 없어서 무기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게다가 옷이나 생필품 등의 자잘한 물건들은 잠시만 눈을 떼면 사라지는 탓에 너도나도 남의 것을 훔치다 보니 물건이 돌고 도는 현상이 생겼다.
그리고 지휘관의 숫자에 비해 병사의 숫자가 너무 많은 것도 문제였다. 궁여지책으로 십인장을 백인장으로, 백인장을 천인장으로 올려서 억지로 지휘관의 숫자를 채워 넣긴 했다.
하지만 10명을 다룰 능력밖에 안 되는 자가 갑자기 100명을 맡는다고 금방 백인장급 지휘 능력을 갖추게 되는 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방치되는 병사들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소속감이 옅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북새통 속에서 겐크 남서부의 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군사 회의를 열었다.
회의 내내 천막 안은 초상집처럼 우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란데 백작이 연행되면서 남서부 지방 귀족들의 중심인물이 된 사이온 자작은 어떻게든 분위기를 끌어 올려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블린트 왕자님으로부터 언질이 있었네. 지금 골디브에서 다수의 게릴라 부대를 편성했고, 조만간 전선에 투입하신다는군. 그 악명 높은 쟈칼을 산하에 들이셨다고 하니 희망을 갖고 최대한 버텨 보세나.”
“…….”
사기를 끌어 올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건만 효과가 영 시원찮았다.
귀족들의 낯빛이 어두운 데엔 압도적인 전력 차도 한몫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번 전쟁의 대의명분이었다.
데메그리 교를 지원한 전적이 있는 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하는 의문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돈다. 의문이 남아 있는 이상, 말끔한 정신으로 전투에 집중하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답답함을 참지 못한 귀족들이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의문을 입 밖에 내었다.
“이대로 겐크군으로서 싸우는 게 옳은 선택인지 모르겠습니다.”
한 명이 총대를 메고 금기시되고 있던 발언을 내뱉으면서 분위기가 단숨에 험악해졌다.
사이온 자작은 정색하면서 탁자 위의 크리스털 재떨이를 움켜잡았다. 그러나 차마 던지지는 못하고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데에 그쳤다.
“후우, 답답한 것들 같으니. 상대가 누군지 잊었나? 그 루크일세. 그가 남작일 시절에 우리가 그를 어떻게 대했나? 그토록 무시와 비난을 일삼아 왔는데 이제 와서 항복한다고 봐줄 것 같은가?”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공왕이 된 지금이라면 과거의 비난 정도는 넘어가 줄지도 모릅니다.”
“그래, 자네 말대로 운이 좋아서 놈이 항복을 받아들여 줬다 치자고, 그 후엔? 이전처럼 지낼 수 있을 것 같나? 루크 공왕 밑에서 예전처럼 재산을 모으고 특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 같냐 이 말일세!”
루크가 하니온 공국의 공왕이 되면서 귀족들의 특권을 줄이고, 아래로 돌아가는 혜택이 많아졌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단적인 예로 겐크 왕국 귀족들의 주당 평균 업무 시간이 35시간인 것에 비해, 하니온 공국 귀족들의 주당 평균 업무 시간은 60시간인 것만 봐도 귀족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세금은 무조건 왕가에서 지정한 세율만 적용해야 하고, 의무적으로 재무제표를 일반인에게 공개해야 하다 보니 뒷돈을 챙기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귀족이란 간판 아래에서 사치와 여유를 만끽해 오던 그들이 루크의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었다.
특권을 포기하겠냐고 묻는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원래부터 빈손이었다면 모를까, 한 번 손에 넣은 것을 놓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사이온 자작은 일갈을 내질러 귀족들의 의구심을 일축시키고선 어영부영 회의를 마무리하였다.
“다들 쓸데없는 생각 말고 각자 맡은 구역을 지키는 데 집중하게. 우리 특권은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한단 말일세.”
“명심하겠습니다.”
겐크 남서부 귀족들은 군사 회의가 끝나자마자 병력을 이끌고서 맡은 구역을 지키기 위해 흩어졌다.
산등성이를 빙 두르듯 굽이굽이 이어져 있는 산성의 요소요소에 병력 수천 명이 배치되었다.
산에서 전투를 벌일 경우 보다 위쪽에 위치한 자가 유리하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면 시간을 며칠 정돈 벌 수 있으리란 것이 겐크 남서부 귀족들의 생각이었다. 최후에는 산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한이 있더라도 며칠만 시간을 끌자는 각오로 수비에 임했다.
겐크 남서부 귀족들이 병력 배치를 마쳤을 무렵, 창공에서 푸른 안광을 발하는 거대한 창천 앵무 한 마리가 나타났다.
창천 앵무의 등 위에 탄 사내, 루크는 산성을 발아래에 두고서 겐크 남서부 귀족들을 오시했다.
겐크 남서부 귀족들은 잔뜩 긴장한 채로 루크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허공에서 루크의 입이 달싹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분명 목소리가 닿을 리 없는 거리이건만 기묘하게도 입 모양만으로도 그의 말이 귀에 전해져 오는 착각마저 들었다.
분명 그는 이리 말하고 있었다.
‘누구든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긴 하지.’
문맥상 그 뒤에 이어질 말은 뻔했다.
‘한 방 먹기 전까지는 말이야.’
말이 끝남과 동시에 루크는 검을 뽑았다. 그랜드마스터의 전유물인 투영검이 생성되었다.
처음으로 투영검을 목격한 귀족들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동시에 후회와 원망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항복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와 시간만 끌면 된다며 쓸데없는 희망을 심어 준 사이온 자작에 대한 원망이었다.
귀족들의 감정 따윈 알 바 아니라는 듯, 투영검은 후폭풍을 몰면서 떨어져 성벽 일부를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투영검이 떨어진 자리가 마치 벼락을 맞은 담벼락처럼 요란한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콰쾅! 와르르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