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130화 누구든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긴 하지(2)
겐크 왕국의 성벽은 대체로 높으면서도 견고하다. 비록 천재 건축가 카라스코의 작품에 비할 바는 아니라 할지라도 어지간한 4, 5서클 수준의 마법 공격은 어렵지 않게 막아 낼 강도를 자랑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일반 건축물에 비해 견고하다는 것이지 그랜드마스터의 공격을 막아 낼 수준은 못 되었다.
투영검이 떨어진 장소는 마차 벼락을 맞은 것처럼 속절없이 무너지며 커다란 길이 뚫렸다.
“…….”
성벽 위에 있던 자들은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무너진 장소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투영검이 떨어진 장소에 서 있던 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못해도 수십 명은 가루가 되었으리라.
그랜드마스터니 투영검이니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실물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니 위압감이 남달랐다.
어지간한 3층 건물보다 큰 검이 살기를 품고서 자신을 절단 내기 위해 날아온다고 상상해 봐라. 당하는 입장에선 그야말로 재해를 마주한 기분일 것이다.
지금 사이온 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의 기분이 딱 그러했다.
저 높은 하늘에선 루크가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고, 눈앞에선 마나로 이루어진 거대한 검이 눈을 어지럽혔으며 8두 마차도 지나갈 법한 넓은 구멍 너머에선 하니온군이 몰려오고 있었다.
혼란에 빠진 병사들은 각자 자신의 상관을 쳐다보았다.
“이, 이, 이를 어쩝니까? 어, 어서 지시를 내려 주십시오!”
“어버버… 어버버버…….”
지휘관 숫자가 모자라 급작스럽게 십인장인 자가 백인장이, 백인장인 자가 천인장이 된 마당이다. 그로 인해 발생한 십인장 공석은 일반 병사들 중에서 대충 가려 뽑았다.
지휘 경험이 일절 없는 자들에게 위급 상황에 대처할 노하우가 있을 턱이 없다.
아니, 지휘 경험의 유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토록 극명한 전력 차 앞에선 설사 백전노장이라 하더라도 명확한 해답을 내놓을 순 없을 것이다.
귀족, 기사, 병사 어느 누구 하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왕좌왕 헤맸다. 흡사 검지로 개미굴 일부를 뭉개면 안에 있는 개미 떼가 대혼란을 일으키는 것처럼, 현재 산성 안에선 병사들이 제자리를 이탈하여 혼란을 가중시켰다.
도저히 통제가 안 되는 상황 속에서 루크는 목소리를 증폭시키는 마법을 시전했다.
“캐스팅, 라우드.”
1서클 마법인 라우드 마법에 의해 루크의 목소리가 산성 전역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사이온 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고한다. 이 전쟁의 원흉은 데메그리 교를 이용하여 무관한 이들을 마물로 개조해 온 카이둔 국왕이다. 끝까지 그를 위해 싸우겠다면 처단할 것이고, 만약 진심으로 그를 옹호하는 게 아니라면 무기를 놓고 항복해라.”
싸우지 않아도 살 수 있다.
강요당하여 억지로 무기를 쥐고 있던 병사들에게 이보다 더 매혹적인 제안은 없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드리워진 동아줄을 마다할 자가 몇이나 될까.
잠시 후, 루크가 머릿속에 그린 이미지가 그대로 실현되었다.
처음에는 강제로 끌려온 병사들부터 무기를 놓았다. 이어서 원래 군대 훈련을 받던 병사들이 무기를 놓았고, 이내 기사들마저도 눈치를 보다가 스스로 무장을 해제했다.
하나둘씩 무기를 놓는 기사들과 병사들 사이에서 사이온 자작은 발을 동동 구르며 목청이 터져라 싸우길 강요했다.
“놈의 입발림에 넘어가지 마라! 너희가 누구의 백성인지 잊었느냐! 무기를 쥐어라! 놓지 말고 쥐란 말이다! 제발!”
애원하듯 외쳐 보나 그의 명령에 따르는 이는 없었다.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포기한 듯 무기를 놓고서 두 손을 위로 들며 항복 자세를 취한 후였다.
하지만 곧 죽어도 항복만큼은 할 수 없는 사이온 자작이었다.
병사나 기사들까진 그래도 처벌받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명령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전쟁에 참가한 입장이니까. 하나 귀족들은 얘기가 다르다.
카이둔 국왕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들의 특권 때문에 전투를 벌이려 했으니 최소 바벨 형무소행, 최악의 경우에는 사형을 당할지도 모른다.
두 손과 팔이 꽁꽁 묶여 평생 그릇에 얼굴을 박고 돼지죽을 들이켜는 생활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사이온 자작은 당장 즙이라도 짜낼 듯 울상을 지으며 마구잡이로 검을 휘저었다.
“싸워라! 제발 싸워다오! 이건 아니지 않느냐! 적어도 싸워 보기라도 하고 항복을 해야 할 거 아니냔 말이다!”
“저 혼자 안전한 망루에 숨어 있는 자가 할 수 있는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상공에 머물러 있던 루크가 어느새 성 쪽으로 내려와 있었다.
루크는 파이의 등을 발판 삼아 펄쩍 뛰어선 망루 안에 착지했다. 해왕검의 테두리를 따라 넘실거리고 있는 마나 블레이드가 사이온 자작의 주변을 에워쌌다.
숨이 막힐 듯 죄어 오는 마나 블레이드의 포위망 속에서 사이온 자작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 이러지 말게.”
“말게?”
“마… 말아 주십시오, 루크 공왕 전하.”
“이제야 좀 사람다운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됐군. 아까까지는 짐승 울음소리였는데 말이야.”
“지, 진정하고 잠깐만 제게 변명할 기회를 주십시오. 과거에 전하께 무례한 언동을 일삼았던 것을 모두 사과하겠습니다. 다시는 전하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은 없을 것을 약속합니다. 그러니 부디…….”
“살려 달라고? 이거 섭섭한걸. 내가 아직도 자잘한 마찰들을 마음에 두고 있을 거라 생각하나 보지?”
“사, 살려 주시는 겁니까?”
“법대로 하자고, 그게 제일 깔끔하잖아?”
법대로 하자는 게 무슨 의미인지 사이온 자작이 모를 리 없었다.
당장에 문제시되는 행동 외에도 과거에 저질러 온 횡령과 횡포를 모두 따지자는 것이었다.
하니온 공국의 법대로 하든, 겐크 왕국의 법대로 하든 무기 징역을 면하긴 어려웠다.
목숨을 부지하는 대신 바벨 형무소행이 확정된 마당에 사이온 자작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 *
당초의 예상대로 겐크 왕국 남서부 지방은 걸림돌조차 되지 못하였다.
산성을 점령한 루크는 후일을 위하여 항복한 자들을 미리 처분해 두었다. 억지로 끌려온 병사들은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으며 기존의 상비군과 기사 또한 무장을 해제시키고 자택에서 근신하라는 처분을 내렸다.
포로로 수용하기에는 숫자가 많아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을 초래할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병사들도 군법을 따르느라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뿐이지, 카이둔 국왕의 행동을 옹호하는 게 아니었기에 뒤통수를 칠 염려는 없었다.
다만 귀족들은 모두 포박하여 드래프트 영지로 보냈다. 그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드래프트 영지의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다. 전쟁이 끝나면 지난 행적을 낱낱이 파헤쳐 법에 따른 형벌을 내릴 생각이었다.
하니온군은 며칠간 산성에 머무르며 뒤처리를 한 후에야 진군할 수 있었다.
겐크 남서부 지방에서 중부 지방으로 넘어가려면 무조건 그란데 백작령을 지나쳐야 한다.
때문에 하니온군은 필연적으로 그란데 백작령에 들어서게 되었다.
물론 이동 중에도 겐크군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비행 부대를 이끌고 중부 지방까지 정찰을 다녀온 레이아가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보고했다.
“겐크 중앙군이 헥토 백작령에 집결하고 있어요. 숫자는 1만2천. 이번에는 전부 정예군이에요.”
“마나마스터의 숫자는?”
“진영 한가운데에 도널드 후작가 깃발과 에드워드 백작가 깃발이 꽂혀 있었어요. 도널드 후작과 에드워드 백작 두 마나마스터가 주둔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사령관은 도널드 후작이겠군.”
“그리고 정찰 중에 그리핀 라이더 부대와 조우했어요.”
“설마 공중전을 펼친 건 아니겠지?”
“마법을 몇 차례 주고받긴 했는데, 그냥 사소한 마찰 정도였어요. 상대는 동부 마탑 출신의 6서클 마법사 세 명과 휘하의 마법사 100명이었고요.”
아레나 공국과의 전쟁 때 수많은 마탑이 파괴되었다. 원래 겐크 왕국에는 10명이나 되는 6서클 마법사들이 있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6서클 마법사는 고작 3명밖에 되지 않는다.
남은 6서클 마법사 3명을 전부 끌어와서 헥토 백작령에 배치한 셈이었다.
“헥토 백작령 공략은 공중전에서 판가름 나겠군. 만만찮은 전투가 될 테니 충분히 쉬어 둬.”
“그 전에 저택에 한번 다녀와도 될까요?”
진지 공사며 정찰 임무며 여러 가지 일로 바빴던 터라 고향 집을 앞에 두고도 한 번도 들르지 못한 레이아였다.
어릴 때부터 자신을 키워 온 유모부터 시작하여 항상 자신의 뒷바라지를 해 주었던 고용인들과 기사들까지 모두가 죽었는데 그들의 묘에 향을 한 번도 피워 주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루크는 남은 시간을 고려할 것도 없이 곧바로 허가를 내렸다.
“천천히 다녀와. 출발은 내일이니 시간은 많아.”
“네, 감사합니다.”
그녀는 삼색 제비의 등에 올라 그란데 백작가 저택으로 날아갔다.
레이아가 떠나고 나서 몇 분 되지 않아 바이스가 루크를 찾아왔다.
그에겐 사이온 자작을 심문하여 겐크군의 기밀 정보를 캐내는 임무를 맡겼다. 그가 찾아왔다는 것은 기밀 정보를 캐내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전하, 사이온 자작을 비롯한 귀족들을 심문한 결과를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어, 그래. 기다리고 있었어, 보고해.”
“이전에 블린트 왕자가 바벨 형무소에 방문했다는 정보를 기억하고 계신지요?”
“흉악 범죄자들을 전쟁에 투입하려고 준비 중이라 했었지. 가장 위협적인 대상이 쟈칼이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사이온 자작의 말에 따르면 수일 전에 쟈칼이 게릴라 부대에 편성되어 독자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오로지 전하께 대적하기 위한 용도로 감옥에서 꺼내온 것일 테니 각별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일 전에 출발했다면 벌써 근처까지 와 있을 수도 있겠군. 놈의 무력 수준은 어떻게 되지?”
“소문으론 100년 전에 겐크 왕국의 마나마스터들이 총동원되었는데도 붙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소문이야 워낙에 과장이 심하니 실제론 마나마스터 1인급 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그런 방심이 참사를 부르는 거야. 소문대로의 무력을 갖췄다는 가정하에 대응하자고. 놈을 발견해도 섣불리 대응하지 말고 곧바로 내게 전달하도록.”
“명령대로 이행하겠습니다.”
겐크 왕국을 정복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변수는 쟈칼이었다.
마지막으로 활동한 시기가 100년 전인지라 그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뭐든 주의해서 나쁠 건 없다.
루크는 언제든 쟈칼의 기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며 군 전체에 경계를 강화할 것을 명했다.
* * *
부대를 이탈하여 그란데 백작가 저택으로 간 레이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지 않으면 눈가에 고인 물기가 뺨을 타고 흐를 것 같았다.
정문을 지나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불타 버린 저택과 정원을 가득 채운 봉분이었다. 로얄 나이트가 수사를 빙자한 학살을 벌인 후에 방치된 시신들을 영지민들이 수습하여 봉분을 쌓아 준 것이다.
봉분마다 판자가 꽂혀 있었고, 판자엔 묻힌 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울지 않을 것이다.
아직 울기엔 이르다.
내 가족과도 같은 이들을 죽이고, 내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 온 집을 태운 이들이 버젓이 살아 있다.
눈물은 그들을 묻은 다음에 흘려도 늦지 않으리라.
그녀는 챙겨 온 향을 봉분마다 일일이 꽂으며 약소하게나마 죽은 이들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
향을 피우고 묵념을 행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엄숙했다.
죽은 자를 기리는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없어졌을 때, 그 허전함이란 말로는 도저히 표할 길이 없다.
로얄 나이트의 기사들은 저항조차 못하는 이들을 벨 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웃었을지도 모르고, 미안해했을지도 모르고, 무표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고통에 일그러진 약자들의 얼굴을 보고도 그들은 가차 없이 검을 휘둘렀다는 것이다.
나의 가족이 겪은 고통과 공포를 그들에게 배로 돌려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마지막 향을 피우고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자신의 그림자에 다른 이의 그림자가 덧씌워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드리워진 그림자에 뿔이 돋아난 것에서 인간이 아님을 직감했다.
적어도 아군은 아니다.
레이아는 스태프 끄트머리에 마나를 배열했다. 그와 동시에 전방으로 몸을 날리며 마법을 시전했다.
“파이어 월!”
레이아가 서 있던 자리에 불의 장막이 솟구치며 접근해 온 이를 뒤덮었다.
누구였지? 뿔이 달린 아인족이라면…….
땅을 한 차례 구르고 나서 일어나려던 찰나, 별안간 불의 장막 사이에서 누군가의 손이 쑥 뻗어 나왔다.
붉은 비늘이 덮인 손은 정확하게 레이아의 목을 움켜잡았고, 이어서 붉은 비늘을 지닌 용인이 불 속에서 걸어 나오며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한없이 중얼거렸다.
“이거 놀랍군, 정말로 판박이야.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 이번에야말로 내 것으로 삼고 말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