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132화 큰 그림은 밑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2)
헥토 백작령은 예로부터 수도 골디브를 지키기 위한 마지노선이라 불리고 있다. 헥토 백작령이 뚫리면 골디브까지 거침없이 진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골디브의 성벽은 전투를 벌이기엔 적합하지 않다. 때문에 헥토 백작령을 뚫으면 골디브 점령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사실상 헥토 백작령의 점령 여부에 따라 겐크 왕국의 멸망 여부가 결정되는 셈이다.
단 한 번의 전투로 겐크 왕국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니 이보다 더 단순하고도 명확한 도식은 없었다.
단기 결전이라면 화력 대결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그랜드마스터가 포함되어 있는 하니온군의 승산이 훨씬 높을 터.
하지만 현실은 화력의 차이만으로 결판이 날 만큼 단순하지 않았다.
헥토 백작령으로 들어가기 앞서 루크는 산기슭에서 진군을 멈추었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한다. 간부들은 야영 준비를 지휘하고 비행 부대 대원들만 날 따라오도록.”
루크의 명령하에 기사들과 병사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바이스가 야영 준비를 전담하여 지시를 내리는 가운데, 루크와 비행 부대는 야영지 외곽에 모였다.
이제는 어엿한 비행 부대 대장이 된 레이아가 대원들에게 대기 명령을 내리고선 입을 열었다.
“전하, 지시대로 비행 부대 전원 집합시켰어요.”
“지금부터 우린 야간 비행으로 헥토 요새로 간다.”
“기습 폭격을 위해서인가요?”
“아니, 투영검으로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 확인해 보려고.”
헥토 요새는 겐크 왕국에서 가장 높고 견고하다고 알려져 있다. 게다가 건축가 카라스코의 작품이기 때문에 웬만한 공격으론 끄떡도 하지 않았다.
카라스코가 세운 성벽에 마나마스터의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바이다.
하지만 그랜드마스터의 공격이라면?
투영검 대 카라스코의 성벽.
역사상 한 번도 성사된 적이 없는 대결인지라 무너뜨릴 수 있을지 없을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루크는 직접 투영검으로 카라스코의 성벽을 공격해 볼 생각이었다. 투영검으로 성벽을 뚫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앞으로 작전이 달라질 것이다.
고로 그나마 시간적 여유가 있는 공략 전에 미리 확인해 두고자 비행 부대와 함께 성벽에 다녀오려는 것이었다.
루크의 의도를 알아차린 레이아는 미리 주의 사항을 읊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헥토 요새는 일반 성벽보다 2배나 높아요. 게다가 비행 부대를 대비한 장비도 다른 곳에 비해 몇 배나 많죠. 공격을 가하려면 평소보다 훨씬 높은 고도로 날아야 해요.”
“그래야겠지. 문제는 적의 그리핀 라이더들이야. 내가 투영검으로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 실험해 보는 동안 그리핀 라이더들이 가만히 있진 않겠지.”
“그리핀 라이더들은 저와 대원들이 막고 있을게요. 그러기 위해서 저흴 부른 거잖아요?”
“잘 아는군. 전원 삼색 제비에 탑승시켜. 속전속결로 실험만 하고 돌아오자고.”
레이아가 비행 부대 대원들에게 이번 작전의 개요를 전달하고 탑승 지시를 내렸다.
비행 부대 대원들이 삼색 제비에 탑승하는 동안, 루크도 탑승 채비를 갖추었다.
“어이, 파이. 비행 시간이야, 일어나.”
루크의 어깨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파이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며 잠꼬대를 해 댔다.
“위험! 위험!”
“잠꼬대 그만하고 비행 준비해.”
“레이아! 레이아!”
“노는 건 나중에 하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레이아랑! 레이아랑!”
라그나로스야 따뜻해서 좋아한다 치더라도 레이아는 왜 이리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창천 앵무가 좋아하는 냄새라도 나는 걸까.
루크는 레이아의 어깨 위로 날아가려는 파이를 손으로 덥석 움켜쥐며 비행을 준비시켰다.
* * *
잠시 후, 루크와 비행 부대가 일제히 날아오르며 헥토 백작령 안으로 진입했다. 따로 요새를 찾아볼 필요도 없었다. 헥토 백작령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평야 한복판을 길게 가로지르는 거대한 장벽이 눈에 들어왔다.
최대 수용 인원은 10만 명에 성벽 안에서 자급자족을 할 수 있을 만한 시설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 성이다.
성벽 위에 횃불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피어올라 있어 마치 도시의 야경과 같은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고, 성벽 안쪽에선 병사들이 개미 떼처럼 바글거리고 있었다.
성벽 안쪽엔 병사들 외에도 백성들을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것을 목격했다. 아무래도 라그나로스 대책으로 보였다. 루크에게 라그나로스 정령석이 있다는 걸 알고서 미리 백성들을 성벽 안쪽에 들여놓은 것 같다. 라그나로스의 공격은 워낙에 범위가 넓어서 성 안에 라그나로스를 풀어놓았다간 수만 명의 백성까지 잿더미로 화할 터.
이 전쟁의 명분이 정의구현인 이상 무관한 자들을 학살하는 건 지양해야 할 일이다. 라그나로스 소환을 방지하기 위한 억제제로써 백성들을 성 안으로 들여놓은 것이었다.
두 눈으로 직접 적의 방어 체계를 확인한 루크가 나직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도널드 후작의 지시인가. 백전노장이란 이름값은 하는군.”
도널드 후작은 겐크 왕국의 마나마스터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전쟁 경험이 많은 사람이다.
괜히 최종 방어선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이 아니었다.
루크는 당초의 목적대로 성벽 파괴 여부를 가늠하기 위해 투영검을 소환했다.
허공에 해왕검을 본뜬 듯한 10미터 길이의 푸른 검이 생성되었다. 투영검의 전신은 멀리서 봐도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보니 소환과 동시에 성벽 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성 바깥 상공에서 투영검이 소환되었습니다! 루크 공왕이 직접 온 것으로 사료됩니다!”
“도널드 후작님의 말씀대로구나! 비상종을 울려라! 그리고 성벽 위에 있는 자들은 시급히 성벽 아래로 내려가라!”
땡땡땡땡땡!
망루마다 달려 있는 비상종이 마구 흔들리며 요란한 소리를 천파만파 퍼트렸다.
단지 투영검을 소환하기만 했을 뿐인데도 적군이 크게 동요했다.
미리 도널드 후작의 지시가 있었는지 성벽 위에 있던 겐크군 병사들이 일제히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투영검을 막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성벽을 훤히 내주고 있었다.
어차피 막을 수 없으니 막지 않는 쪽을 택한 것이다.
루크가 투영검으로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것처럼, 도널드 후작도 성벽이 공격당했을 때의 결과를 알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도박수를 던진 것이다.
이윽고 투영검이 성벽 위로 떨어지며 강렬한 타격음이 발생했다.
쿠우우웅!
천둥소리를 연상하게 하는 묵직한 타격음이 성 안 가득 메아리쳤다.
격돌 지점에서 발생한 충격이 성벽 전체로 퍼져 나갔고, 성벽을 이루고 있는 벽돌 틈새에서 흙먼지가 나풀나풀 피어올랐다.
결과는 성벽의 승리였다. 투영검이 떨어진 순간, 마치 성벽 전체가 완충제라도 된 양 충격을 산산이 흐트러뜨리며 스스로를 보호했다.
검이란 결국 타격 면적을 좁힌 둔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른다는 행위도 충격이 가해졌을 때나 가능하다.
솜뭉치에 검을 내리쳐도 솜이 멀쩡한 것처럼, 카라스코의 성벽은 돌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솜뭉치에 준하는 충격 흡수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루크는 검을 거두면서 카라스코의 천재적인 건축 기술에 경의를 표했다.
“그래도 투영검이면 뚫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괜히 천재 건축가라 불리는 게 아니군.”
루크가 마나유저로서 역대급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카라스코 또한 건축가로서 역대급 재능을 가진 인물이다. 전설적인 건축가가 만든 건축물이 전설의 경지에 오른 자의 공격을 막아 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이걸로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이제 야영지로 복귀하여 상황에 맞는 작전을 짜기만 하면 된다.
상대는 성벽 그 자체가 아니라, 성벽 안에 있는 사람이니 상대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다만 이번 일로 겐크군의 사기가 한껏 치솟았다.
“와아아아! 성벽이 투영검을 막아 냈다! 루크 공왕이 물러난다!”
“어떠냐, 하니온 자식들아! 다른 곳은 몰라도 이곳만큼은 쉽게 뚫지 못할 거다!”
“얼마든지 몰려와 봐라! 모조리 목을 쳐 주마!”
성벽을 무너뜨릴 수 없다면 성벽 안쪽에 투영검을 투입해 보는 건 어떨까?
성벽 안에 배치된 병사들의 숫자를 줄일 수 있다면 성벽 공략이 한층 쉬워질 것이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루크는 성벽 위에 머물러 있던 투영검을 성벽 안으로 들여보냈다.
한데 투영검의 난입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성벽 아래에서 마법이 난무했다.
“투영검이 들어왔다! 아군의 진영을 헤집지 못하게 움직임을 막아라!”
“홀드!”
“홀드!”
“홀드!”
성벽 아래에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대상의 움직임을 멈추는 홀드 마법을 시전했다. 1, 2명이면 모를까 그 숫자가 100명이 넘어가다 보니 제아무리 투영검이라도 옴짝달싹 못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동시에 200명에 달하는 그리핀 라이더가 날아오르며 사방팔방으로 산개했다. 지상에 머무르는 마법사들의 숫자까지 합치면 총합 300명의 마법사가 대기하고 있던 셈이었다. 겐크 왕국 전역에 있는 마법사들을 싹싹 긁어모아 헥토 백작령으로 부른 게 틀림없었다.
투영검을 끌어들여 홀드로 붙잡아 두고선, 그리핀 라이더 부대로 루크를 친다.
오로지 루크에게 대응하는 것만 생각하며 만반의 준비를 갖춰 둔 것이다.
그리핀 라이더 부대의 지휘관들이 일제히 집중 포격을 명했다.
“이곳이 어슬렁거리며 찾아올 장소가 아님을 똑똑히 알려 주자꾸나! 놈을 향해 공격을 퍼부어라!”
밤하늘의 별처럼 점점이 산개해 있던 마법사들이 전력을 다해 마법을 퍼부었다.
3서클부터 6서클까지, 다양한 속성의 마법이 각기 다른 위력을 품고서 루크 일행이 있는 지점으로 날아들었다.
시야를 가득 메운 공격 마법의 물결 속에서 레이아가 마나를 한껏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실드 마법을 펼칠 준비를 하며 루크의 명령을 기다렸다.
“분명 제가 정찰할 땐 마법사가 이만큼 많지 않았어요. 일부러 숨긴 것 같아요.”
“나 하나 잡으려고 많이도 준비해 놨군.”
“어떻게 할까요? 응수할까요?”
그녀가 정찰을 할 때만 하더라도 6서클 마법사 3명에 마법사의 숫자는 100여 명에 불과하다 했다. 루크가 한 번쯤은 성벽의 견고함을 시험하기 위해 찾아올 것이라 여겨 일부러 정보를 은폐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비행 부대만 놓고 보았을 때, 머릿수 차이가 무려 3배나 나는 셈이었다.
상식적으로는 물러나는 게 상책이긴 하다.
하지만 루크는 손해를 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이대로 물러나면 적의 사기만 끌어 올려 주고 돌아가는 꼴이지 않은가.
루크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레이아이기에 섣불리 후퇴를 권하지 못했다.
잠시 후 루크가 검을 검집에 도로 꽂으며 결단을 내렸다.
“돌아가자. 탐색은 이만하면 충분해.”
루크라면 응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던 레이아는 의외라 여겼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루크지 않은가.
이대로 손해만 보고 돌아갈 사람이 아닌데도 일체 망설임 없이 퇴각 명령을 내렸다.
제아무리 루크라도 이 정도로 맞춤 대응을 해 오면 힘겨운 걸까?
크게 선회하여 적의 사정거리 바깥으로 빠져나던 중, 레이아는 루크에게 따로 노림수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퇴각 내내 루크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안전한 장소까지 옮겨 간 후에 루크가 레이아를 불렀다.
“레이아, 당분간 네가 미끼 역할이 되어 줘야겠어.”
“누굴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인가요?”
“물론 용인 녀석이지. 용인을 사냥해서 성벽을 뚫어 보자고.”
여기서 용인이라면 필시 쟈칼을 말하는 것일 터.
한데 쟈칼 사냥이 어떻게 성벽 돌파로 이어지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맥락을 알 수 없는 나머지 레이아가 연이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루크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머릿속으로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