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133화 큰 그림은 밑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3)
콰콰콰쾅! 퍼엉! 퍼버벙!
상공에서 마법이 터지자 그 여파가 허공을 수놓았다.
불꽃이 밤하늘을 밝히며, 얼음 파편과 자갈 파편이 흩날리고, 바람이 파편들을 역동적으로 몰고 다니며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광경을 만들었다.
성벽 위에선 백발노인이 망원경을 눈에 가져다 대고선 상공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칠이 벗겨진 투구와 갑옷은 그간 노인이 거쳐 온 전장의 숫자가 결코 적지 않음을 알려 주고 있었고,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곧은 자세와 차분한 분위기는 아직 무장으로서 그의 열정이 식지 않았을 보여 주고 있었다.
망원경을 통해 루크 일행의 모습을 포착한 백발노인, 도널드 후작은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 망원경을 내렸다.
“과연 천공 섬 출신의 새들다운 속도로군. 이만큼 끌어들였는데도 금세 빠져나갈 줄이야.”
일부러 루크를 성벽 가까이 끌어들이려고 야간 비행마저도 금지했다.
야간 비행 금지, 마법사의 숫자 은폐, 마법사 전원 24시간 대기 등등.
여러 가지 수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있던 매복 작전이었건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실패 요인은 창천 앵무와 삼색 제비가 예상 이상으로 빠르다는 것이었다.
기습적으로 마법을 난사했건만, 천공 섬 출신의 새들은 마법이 닿기도 전에 사정거리 바깥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도널드 후작의 곁에 있던 에드워드 백작이 아쉬움을 토로했다.
“절호의 찬스를 놓쳤군요. 거의 잡을 뻔했는데 말입니다.”
만약에 루크를 사살하는 데 성공했다면 전세가 확 기울었을 것이다. 병력의 숫자나 고급 인력의 숫자는 겐크와 아레나 연합군이 약간 더 많다.
한데도 전문가들이 양쪽 군대 사이에 극심한 전력 차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루크 한 명 때문이었다.
그랜드마스터의 존재가 이 전쟁을 한쪽이 두들겨 패는 일방적인 싸움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아쉬워하는 에드워드 백작과 달리 도널드 후작은 작전 실패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너무 아쉬워 말게. 이만하면 오차 범위 내일세. 그리고 아주 수확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그렇긴 하지요. 정말 놀랐습니다. 성벽이 투영검을 버텨 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수백 년 전의 인물에게 구원받은 셈이군. 나중에 카라스코의 무덤에 명주라도 한 병 뿌리고 와야겠구먼.”
“게다가 이번 일로 병사들의 사기가 높아졌습니다. 기세를 몰아 야습을 시도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기분은 이해하네만 지금은 자중해야 할 때일세. 마법사 300명으로 루크 공왕을 묶어 둘 수 있는 것도 전부 성벽이 있는 덕분일세. 성벽 밖에서라면 루크 공왕도 마법사 300명쯤은 쉬이 베어 낼 테지.”
루크를 퇴각시킨 지금에 와서도 드널드 후작은 그의 강력한 힘에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루크조차 카라스코의 성벽을 끼고 싸우는 마법사 300명을 쉬이 뚫지 못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한 수단을 동원해야 겨우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실상 루크 단 한 명이 마법사 300명을 이곳에 묶어 두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만약에 지금 데리고 있는 마법사 300명을 바커스 백작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서부 전장, 혹은 러스트 자작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동부 전장에 반씩 나누어 투입했다면 지금쯤 양쪽 모두에서 승전보가 날아왔을 것이다.
루크로서도 자신이 마법사 300명을 묶어 두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쉽사리 다른 전장으로 이동하지 못할 터. 루크와 마법사 300명은 서로를 이 자리에 묶어 두는 족쇄이기도 했다.
에드워드 백작은 도널드 후작의 수비 지향적인 성향을 감안하여 앞으로의 양상을 예측했다.
“장기전으로 돌입하면서 계속 루크 공왕을 붙잡아 두실 계획이십니까?”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당장은 수성전에만 집중할 예정일세. 예정대로 쟈칼이 적의 보급로만 끊어 준다면 전쟁 도중에 식량이 부족해져서 퇴각할 걸세.”
쟈칼과 죄수들을 게릴라 부대로 편성하자고 제안한 자가 바로 도널드 후작이었다.
반골 기질이 강한 죄수들이 일반 부대에 제대로 녹아들 리 없다. 고로 억지로 맞지 않는 옷을 입히기보단 그들의 무력과 개성을 모두 살릴 수 있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하니온군이 드래프트 영지라는 곡창 지대를 보유하고 있다 한들 보급로가 끊기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다만 도널드 후작의 작전에도 불안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에드워드 백작이 그것을 꼽았다.
“쟈칼 그 작자가 지시대로 움직여 줄지 모르겠군요. 혹여나 탈영이라도 해 버리면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땐 그때 가서 다시 작전을 세우면 될 일일세. 놈들의 탈영도 상정한 범위 이내에 있는 일이니 자네는 걱정 말고 날이 무뎌지지 않게 검을 갈아 두게나.”
“후작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루크의 공격을 한차례 막아 낸 후이건만 아까부터 에드워드 백작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깊은 근심을 품은 듯 이따금씩 한숨 소리마저 들린다.
그의 근심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알고 있기에, 도널드 후작은 시선을 허공에 두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왕가를 위해 싸우는 것에 의구심이 드나 보군.”
정곡을 찌른 듯 에드워드 백작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작님은 어떠십니까?”
“요즘은 어떤지 몰라도 자네들 시선에서 보면 나는 옛날 사람일세. 아비가 아무리 막돼먹은 자라 할지라도 공경하라는 가르침 속에서 자랐다네. 썩은 나라라 할지라도 신하 된 도리를 다하는 게 귀족 된 자의 의무 아니겠나. 내 행동에 대한 평가는 후대에 맡길 생각일세.”
“어찌 보면 후작님이 가장 마음 편히 이 전쟁에 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허허허, 그럴지도 모르겠구먼.”
겐크군의 마지막 자존심이라 불리는 사람답게 세간의 평가 따윈 하나도 신경 쓰지 않고 군인의 자세를 일관하는 도널드 후작이었다.
겐크 왕가에서도 도널드 후작에게 모든 걸 걸고 수도 방위군까지 모두 내주었다.
때문에 도널드 후작은 자신의 죽음이 곧 겐크 왕국의 멸망이라는 일념으로 수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 * *
루크는 야영지에 복귀하자마자 간부들을 소집했다. 작전에 참여했던 레이아, 그리고 바이스를 비롯한 기사들을 천막 아래에 모아 놓고서 작전 결과를 알렸다.
“카라스코의 건축물답게 투영검에도 끄떡 않더군.”
바이스를 비롯한 기사들은 표정을 달리하였다.
먼 옛날, 라그나로스가 폭주하여 날뛸 때도 결코 무너지지 않았던 성벽이다. 카라스코의 성벽이 견고하다는 거야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라그나로스를 벤 루크라면 벨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아무래도 카라스코의 성벽은 세간에 알려진 것 이상으로 견고한 건축물인 듯하다.
루크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이스가 전달 사항이 있음을 밝혔다.
“전하께서 작전을 펼치시는 동안 후방에서 보내온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발생했나 보지?”
“식량을 싣고 오던 보급 부대가 쟈칼에게 습격당했다고 합니다. 밀 3천 포대와 육류 2톤 분량의 식량이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성벽을 끼고 수성전을 하면서 겨울까지 보급로를 차단할 생각인가 보군.”
“송구스럽지만 쟈칼은 공왕 전하가 아니면 막을 수 없습니다.”
“내가 후방으로 빠지는 건 적들이 바라는 바야. 내가 부대를 이탈하는 순간 성문을 열고 전면전을 펼치려 들겠지.”
루크가 빠지면 본대엔 마나마스터 1명, 6서클 마법사 1명만 남게 된다. 반면에 겐크군 본대엔 마나마스터 2명, 6서클 마법사 3명, 그리고 대규모 그리핀 부대가 있다. 루크가 빠지는 순간 질적인 부분에서 역전이 일어나 겐크군이 우세를 띠게 된다.
이대로 대치 상황을 유지하면 보급로가 끊기고,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루크가 빠지면 전력 차가 역전되어 버리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바이스는 검지로 관자놀이를 꾸욱 누르며 두통을 호소했다.
“이거 머리 아프게 됐군요. 은퇴를 앞두고 있던 노인장에게 발목을 잡힐 줄은 몰랐습니다.”
“구관이 명관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 좋게 생각하면 적의 전력 대부분을 여기에 잡아 두고 있는 것이니 다른 루트로 오고 있는 부대가 더 편해진 셈이지.”
“이렇게 된 이상 보유하고 있는 식량이 떨어지기 전에 성을 함락시키는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어.”
“따로 생각해 둔 바가 있으신 겁니까?”
이번 탐색전으로 적의 모든 카드를 낱낱이 파악했으니 맞춤식 대응책을 짜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루크는 두말하면 잔소리라는 양 경쾌하게 손가락을 튕겼다.
“내일부터 성을 향해 총공격을 실시하겠어. 따로 지시가 있을 때까진 정면 공격만 반복하도록 해.”
* * *
이튿날 아침, 루크가 이끄는 본대가 성벽 공략에 나섰다.
지상에선 바이스가 기마대 및 보병을 이끌고서 공성전에 임했고, 루크와 레이아는 비행 부대와 함께 적의 그리핀 라이더 부대와 공중전을 펼쳤다.
지상의 전투는 공격 측에선 사다리와 밧줄, 공성 탑을 이용하여 성벽 위로 올라가려고 안간힘을 썼고, 방어 측에선 성벽에 오르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막는 작업이 반복되었다.
“탑을 밀어라! 어떻게든 성벽 앞까지 밀어서 올라갈 수 있는 발판을 걸쳐야 한다!”
“공성 탑엔 불화살을 쏴라! 기름은 아직이더냐! 성벽 밑에 다가온 녀석들에게 기름 세례를 끼얹어 주거라!”
공중에서의 전투는 루크 한 명을 막기 위해 300명에 달하는 마법사가 있는 힘껏 마나를 짜냈다.
“뭣들 하느냐! 뭉쳐 있다간 투영검의 먹잇감이 된다는 것을 잊었느냐! 산개해서 집중 포격을 가해라!”
수백 명의 마법사를 상대해 본 경험이 없진 않다. 이전에 머메이드 전사 수백 명을 상대로 그들을 일거에 쓸어버린 전적이 있는 루크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에 머메이드 전사들은 투영검의 존재를 모르고 한데 뭉쳐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과 달리 그리핀 라이더들은 처음부터 투영검을 의식하며 산개해 있었다.
루크는 빗발치는 마법을 실드로 받아 내며 차근차근 한 명씩 베어 나갔다. 하지만 워낙에 공격이 거세다 보니 초 단위로 실드에 마나를 보충해야 했고, 그로 인한 마나 소모량이 평소의 수십 배에 달했다.
그나마 루크가 6서클 경지의 마법사이자 마나양이 남들보다 훨씬 많기에 1, 2명씩이라도 베어 내는 거지 다른 마나유저였다면 접근조차 못 했을 것이다.
치열한 소모전은 저녁까지 이어졌고, 해가 서산 너머에 걸칠 무렵이 되어서야 루크로부터 퇴각 명령이 떨어졌다.
“오늘은 이쯤에서 퇴각한다! 전군 야영지로 퇴각해라!”
* * *
“지상의 사망자는 300명으로 추정되고, 그리핀 라이더는 15명이 사망했습니다.”
에드워드 백작의 보고에 도널드 후작이 백발 수염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이만큼 마법사를 투입했는데도 근소한 차이로 밀린단 말인가. 인간계 정점이란 수식은 허언이 아니었군.”
“그래도 지상 쪽은 대승을 거뒀습니다. 적의 보병을 1,000명 가까이 줄였으니 이만하면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공중이 뚫리면 지상에서 몇 번을 승리하든 아무 의미 없네. 마법사들에게 전력을 다해 공격하되 생존을 최우선으로 하라고 전해 두게.”
“분부하신 대로 지시를 내려놓겠습니다.”
종합적으로 득과 실을 따지면 승전을 거둔 셈이긴 하다.
겐크군 병사들도 계속 사기가 유지되고 있고, 무탈하게 첫날 방어에 성공했으니 기뻐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도널드 후작은 찜찜한 기분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다.
상대가 루크이기에 더더욱 따로 노림수가 있을 것만 같았다.
도널드 후작이 현 상황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있든 오늘 올린 첫 승전 소식은 삽시간에 겐크 왕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백성들은 도널드 후작을 하니온군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구세주로 여기기 시작했고, 골디브에선 도널드 후작을 칭송하는 노래가 울려 퍼졌다.
도시 전역을 가득 메운 칭송의 노래는 응당 겐크 왕궁 안까지 전해졌다.
* * *
첫 공성전 개시 후,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하니온군은 하루가 멀다 하고 성벽 공략을 시도하였고, 날이 저물면 퇴각하길 반복했다.
하니온군의 공세를 막아 낸 횟수가 누적될 때마다 겐크 왕국 내에서 도널드 후작에 대한 평가가 높아졌다.
도널드 후작이 아니면 이 나라는 이미 망했다느니, 도널드 후작이야말로 이 나라의 미래라느니 등등…….
일각에선 그를 신격화하는 모임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선을 넘어 너무 과열된 게 아닐까 싶은 지경에 이르렀을 즈음.
갑자기 세간에 하니온군의 기밀이 유출되었다.
[루크 공왕이 비행 부대의 레이아 대장과 둘이서 부대를 이탈. 헥토 백작령으로 흘러 들어가는 보급로를 끊기 위해서 백작령 북쪽에 있는 보급고를 습격할 예정.]
루크가 죽기만을 바라고 있던 블린트가 천금과도 같은 정보를 쉬이 흘려 넘길 리 없었다.
블린트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시급히 서기를 불러다가 전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루크 공왕만 죽이면 이 빌어먹을 전쟁도 끝난다! 당장 도널드 후작과 쟈칼에게 루크의 목을 치러 가라 전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