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134화 큰 그림은 밑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4)
헥토 요새는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렇다곤 해도 요새 안에서 기르는 작물은 아무래도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보니 질적인 부분이 많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적이 요새 주변을 사방으로 포위하고 있는 게 아닌 이상 군량의 7할은 자급자족, 3할은 외부에서 끌어온다.
헥토 요새에 질 좋은 재료를 공급해 주는 보급고는 헥토 백작령 북쪽에 위치해 있다.
루크와 레이아는 각각 새 위에 올라타서 적의 보급고로 이동했다.
루크는 일부러 파이의 깃털을 강하게 당겨서 속도를 늦추었다.
“속도 늦춰. 빨리 가서 좋을 거 없어.”
“감속! 감속!”
파이가 바람에 몸을 실으며 둥실둥실 떠다니듯 속도를 대폭 줄였다.
레이아도 마찬가지로 루크의 속도에 맞춰서 감속하며 입을 열었다.
“계산대로 도널드 후작과 쟈칼이 우릴 노리러 올까요?”
“도널드 후작은 몰라도 쟈칼은 무조건 올 거야. 발정 난 도마뱀 녀석이 널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그냥 흘려보낼 리가 없지.”
“이번 작전은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서 결과가 예측이 안 되네요. 쟈칼은 둘째치고 도널드 후작이 유인책에 걸려들지 안 들지에 따라 앞으로의 계획이 달라지는 거잖아요.”
“어느 쪽이든 우리는 이득이야. 도널드 후작이 비행 부대를 끌고 나오면 사냥하면 되고, 요새 안에 있으면 우린 편하게 보급로를 확보하는 거지. 그리고…….”
“그리고?”
“이번 작전의 핵심은 쟈칼이나 도널드 후작을 사살하는 게 아냐. 블린트가 도널드 후작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거지.”
지금쯤 겐크 왕궁에서 루크를 잡으라고 각 지휘관들에게 엄명을 내려 두었을 것이다.
블린트로선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지난 일주일간 도널드 후작의 명성이 비약적으로 높아졌으니까.
지난 일주일 동안 헥토 요새에서 벌어진 전투로 인해 겐크 왕국의 여론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전세가 겐크군 쪽으로 기울고 있다! 모든 건 도널드 후작 덕분이다! 겐크 왕가에서 한 일이라곤 쥐뿔도 없다!]
왕가로선 여론이 도널드 후작에게 쏠릴수록 불안해할 수밖에 없다. 운용할 수 있는 모든 군대를 도널드 후작에게 맡긴 참이지 않은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도널드 후작이 민심을 등에 업고서 골디브로 진격해 오면 겐크 왕가는 그를 막을 방도가 없다.
때문에 왕가에서도 승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 뭐라도 해야 할 판국이 되었다.
안 그래도 건수가 필요한 마당에 루크가 사냥하기 딱 좋은 형태로 움직여 주고 있는데 이 기회를 어찌 그냥 흘려보내겠는가.
일부러 왕명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루크 사냥을 지시할 게 분명했다. 루크 사냥 작전은 어디까지나 왕가의 지시이고 루크가 죽었을 시 그 모든 공은 왕가에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서 말이다.
루크는 그간 감추었던 작전의 핵심을 조목조목 읊어 주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도널드 후작 정도의 명장이라면 내가 유인책을 쓰고 있다는 걸 알고서 출격하지 않겠지. 하지만 블린트의 눈에는 도널드 후작의 행동이 어떻게 보일까?”
레이아도 루크의 말 중간부터 이번 작전의 이면에 숨겨진 의도를 알아차렸다.
소름이 끼친다.
처음에는 왜 용인을 사냥하면 요새가 무너지는 건지 맥락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데 이면에 숨겨진 의도를 알고 나니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쟈칼은 왕명에 따라 루크를 사냥하러 나섰는데, 도널드 후작이 나서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블린트 입장에선 도널드 후작이 왕가가 공을 세우는 걸 막으려고 일부러 작전에 참가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의심에 빠진 블린트가 최종적으로 도달하게 될 생각은 뻔하디뻔했다.
[도널드 후작이 전쟁 후에 반란을 일으키려고 벌써부터 왕가를 견제하고 있다!]
적이 자중지란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적의 명성을 높여 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작전에서 쟈칼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쟈칼이 있고 없고에 따라 블린트의 심리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쟈칼은 명령에 응했는데, 도널드 후작은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블린트의 심리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생각해 봐라. 한낱 죄수도 왕명을 따르는데, 대군을 도맡은 고위 귀족이 왕명을 어긴다? 결코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그녀도 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무슨 짓이든 하겠노라고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만 루크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도널드 후작 정도면 그나마 겐크군에선 유일하게 존경할 만한 적이건만 그 누구보다도 불명예스럽게 죽게 할 작정인 것이다.
겐크 왕국을 얻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곤 하나, 이를 서슴지 않고 행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레이아는 루크가 적에겐 얼마나 가차 없는 인물인지 새삼 되새기며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 * *
쟈칼로선 루크와 레이아만 따로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이 이리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게릴라 작전만 도맡고 있는 게 지겹던 참이다.
루크와 한번 부딪쳐 봤기에 제대로 마음먹고 싸우면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게릴라 작전이고 뭐고 무작정 루크의 목을 따러 가려고 했다. 그때 쟈칼을 설득한 자가 바로 도널드 후작이었다.
당시에 도널드 후작이 말하길.
‘같은 결과를 내더라도 좀 더 쉽게 가는 게 낫지 않겠는가? 겨울이 끝날 때까지만 내 작전에 응해 주게. 적들이 추위와 배고픔에 지쳐 후퇴할 때 돌격해도 늦지 않네.’
당장 힘이 넘치는 2만 군대 속으로 뛰어들 바엔 도널드 후작의 말대로 하는 게 백배 나았다.
쟈칼도 어느 쪽이 확실하게 레이아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길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이와 같은 속사정이 있었기에 잠자코 도널드 후작의 작전에 따라 줬던 것이다.
그러나 루크와 레이아가 부대를 이탈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2만 군대를 상대할 것도 없이 루크 한 명만 족치면 레이아가 손에 들어온다. 그뿐이랴, 블린트가 직접 국왕 대리인으로서 이번 작전을 성공시킨 자에게 삼대가 먹고 놀 수 있는 포상을 약속했다.
이번 작전만 성공하면 당초에 원했던 것들을 모두 손에 넣을 수 있고, 블린트도 더 이상 그를 붙잡아 두지 않을 테니 모든 일이 원만하게 해결된다.
쟈칼은 겨울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도널드 후작과의 약속을 깨고 작전 지역을 이탈했다. 그러고는 죄수들로 이루어진 게릴라 부대를 이끌고 헥토 백작령으로 이동했다.
“대장, 벌써 보급고는 습격당한 것 같은데요?”
왕명에 따라 루크가 습격할 예정이었던 보급고로 이동하던 중, 보급고가 있는 숲 전체가 불길에 휩싸인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쟈칼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죄수를 거칠게 옆으로 밀치며 욕지거리 섞인 핀잔을 던졌다.
“나는 뭐 눈이 없는 줄 아느냐? 다 아는 사실로 호들갑 떨지 말고 저리 비켜.”
보급고를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건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하니온군의 기밀이 유출된 후에 루크와 레이아가 부대를 이탈했고, 그 뒤에 왕명을 받아 급히 달려온 것이니 시간상 한발 늦는 게 당연했다.
다만 화재가 이제 막 숲 전체로 번지기 시작한 걸로 봐선 보급고가 습격당한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아직 루크와 레이아는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쟈칼이 금빛 안광을 번뜩이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흡사 한번 놓친 모기를 찾아 헤매듯, 찾아내지 못하면 오늘 잠은 다 잔 것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차에 별안간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메가 그래비티!”
등 뒤에서 한 여성이 기운 찬 목소리로 주문을 영창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마법 중에서도 가장 마나 배열이 복잡하다는 중력 마법이 발현되었다.
쟈칼의 경우 드래곤 스케일 덕에 아무런 압박감 없이 멀쩡하게 서 있었으나, 나머지 죄수들은 몸에 가해지는 압력을 이겨 내지 못하고 바닥에 엎어졌다.
죄수들은 마치 천 근 바위에 짓눌린 것처럼 맥을 못 추며 고통을 호소했다.
“끄르르륵! 대, 대장… 가, 갑자기 몸이…….”
“크헉! 제, 제길 운도 없지. 하필 뾰족한 돌 위에…….”
“대, 대장……. 제발, 뭐라도 좀…….”
죄수들도 왕년에는 한가락 하던 인물들이다. 그러나 기습적으로 날아든 고위 마법에 한번 휘말린 이상, 스스로 상황을 타개할 순 없었다.
대부분은 압력에 짓눌려 산소 부족으로 안색이 점점 누렇게 떴고, 몇몇은 재수 없게도 뾰족한 돌부리 위에 넘어진 탓에 의도치 않은 출혈이 발생하여 고통스럽게 죽어 갔다.
유일하게 마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쟈칼만이 일신을 움직이며 대응에 나섰다.
브레스는 안 된다.
저쪽에 레이아가 있다.
브레스를 쐈다가 자칫 잘못해서 그녀까지 휘말리게 되면 본말전도다.
쟈칼은 발톱을 세우며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나무 그늘 아래에 남색 로브를 입은 여인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레이아를 발견한 것까진 좋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루크가 보이지 않는다.
레이아를 발견하여 그녀를 쳐다보느라 아주 잠깐 시선이 빼앗긴 찰나, 쟈칼의 머리 위에서 루크가 나타났다.
블링크를 시전하여 기습적으로 거리를 좁힌 것이었다.
쟈칼의 머리 위에서 루크가 해왕검을 아래로 내리쳤다.
그에 반하듯 쟈칼이 동물적인 반응 속도를 보이며 억지로 몸을 틀어 손톱으로 해왕검을 후려쳤다.
채앵!
검날과 손톱이 부딪친 자리에서 불꽃이 튀면서 루크와 쟈칼 모두 뒤로 튕겨 나갔다.
루크는 미끄러지듯 지면에 발을 끌며 멋들어지게 착지했다. 그러고선 마치 하수의 분발에 감탄하는 듯한 말투를 구사하며 초장부터 쟈칼의 신경을 긁었다.
“손톱 다듬느라 공 좀 들였나 보군. 내친 김에 봉숭아물도 들이고 오지 그래?”
“네놈 혓바닥을 도려내어 다시는 나불거리지 못하게 하려고 세심하게 벼려 왔단다.”
“듣자 하니 죽은 자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레이아를 손에 넣고 싶어 하는 거라지? 죽은 자를 보고 싶다면 저승으로 가는 게 가장 빠를 것 같다만.”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네놈이 뭘 아느냐. 아무것도 모르면 닥치란 말이다!”
“그 말대로야. 파충류의 심정을 사람은 알 리가 없지, 알고 싶지도 않고 말이야.”
더 이상은 못 들어 주겠다는 듯 쟈칼이 입을 한껏 벌리며 마나를 응축시켰다.
공격을 막으면서 일부러 루크를 레이아의 반대 방향으로 튕겨 냈다.
레이아에게 맞을 일만 없다면 사양하지 않고 전력으로 브레스를 쏠 수 있다.
루크가 착지한 지점 너머에 죄수들이 짓눌려 있으나 그건 알 바 아니었다.
당장 죽인다.
저 빌어먹을 놈만 사라지면 누구도 날 막을 수 없다.
저놈을 죽이고 그토록 꿈에 그리던 과거의 여인을 현재의 여인으로 대체하리라.
레이아는 내 것이다!
쟈칼의 입안에 대량의 마나가 응축되며 불길이 일었고, 불길은 재차 응축되어 몇 겹으로 압축된 불의 구체가 되었다.
전방에서 죄수들이 쟈칼에게 그러지 말라고, 살려 달라고 애원했으나 쟈칼의 눈에는 오로지 루크만 보였다.
이윽고 한계까지 압축된 불의 구체가 쟈칼의 입을 포대 삼아 사출되었다.
“드래고니안 브레스!”
화르륵!
화재 현장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화염이 전방 가득 퍼져 나가며 불에 닿는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대량의 화염은 용서 없이 루크를 집어삼켰고, 뼛가루 한 줌도 남기지 않겠다는 양 끊임없이 열기를 토해 냈다.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 마나를 한껏 짜내며 브레스를 쉴 새 없이 분출하던 중, 시뻘건 화염 속에서 실루엣이 일렁였다.
실루엣이 들어 올린 팔을 내리그은 순간, 검격 한 줄기가 발생하여 화염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협곡처럼 불길 속에 기다란 길이 뚫린 가운데, 루크가 불의 장벽 한가운데에서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며 넉살 좋게 비아냥거림을 날렸다.
“라그 녀석에 비하면 한참 미지근하군. 촛불 붙이는 용도로나 쓰면 딱이겠어.”
다가오는 루크를 두고 처음으로 쟈칼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