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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재능으로 환생-138화 (138/200)

# 138

138화 왕가의 상징이 던진 불이 왕국의 상징을 불태운다(1)

-헥토 요새가 하니온군의 손에 떨어졌다!

헥토 요새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겐크 왕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최후의 방어선이 무너졌고, 헥토 요새를 지키던 헥토 백작과 에드워드 백작은 모두 사망했다.

겐크 왕국으로선 이제 더 이상 하니온군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루크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골디브 시민들은 겐크 왕가의 무능함에 치를 떨었다. 치안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왕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골디브 거리의 동상들은 분노한 시민들의 화풀이 용도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한편 겐크 왕궁 내에선 왕궁 의원들이 블린트에게 피난길에 오를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왕자님! 적군이 골디브 목전에 다다랐습니다! 어서 국왕 전하를 모시고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블린트는 왕좌에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나 팔걸이 위에 올라간 주먹이 바들바들 떨리는 중이었다.

사람이 한계 이상의 감정이 북받쳐 오르면 되레 말이 없어지기 마련이다.

그의 가슴 속에선 분노가 한계치를 넘어 억울함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이리 억울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늘도 무심하지.

어찌하여 동시대에 나를 낳고, 루크를 낳았단 말인가!

잠시 후 줄곧 닫혀 있던 블린트의 입이 열렸다.

“아바마마와 함께 피신해라. 난 여기에 남겠다.”

더 이상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지킬 체면도 없는 데다 따르는 자들도 아무 짝에 쓸모없는 쭉정이들이 전부다.

모든 기반을 잃은 마당에 목숨을 부지해 봤자다.

이후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금보다 더 비참할 생활밖에 없다.

여기서 더 추해질 바엔 죽는 게 낫다.

왕궁 의원들은 아직도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주구장창 피신할 것을 요구했다.

“아직 포기하긴 이릅니다! 왕가가 곧 왕국이라 하였으니 왕자님께서 살아 계시는 이상 겐크 왕국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일신의 안전을 도모해 주십시오! 백성들도 자나 깨나 왕자님의 안전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흉악한 하니온 무리의 손이 닿기 전에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이 마당이 되어서도 입에 발린 말뿐인가.

블린트도 눈이 있고 귀가 있다.

광장에 세운 왕가의 동상이 돌팔매질로 흠집투성이라는 것도, 음유 시인들이 왕가의 무능함을 탓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도 전부 알고 있다.

백성들이 대놓고 왕가를 욕하는 데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백성들뿐만 아니라 경비병들도 모두 동조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왕궁 의원들을 모두 잘라 낼 걸 그랬다.

그 왜, 방 청소를 하다 보면 혹시 나중에 쓸지 몰라서 잡동사니를 버리지 못하고 쌓아 두는 타입이 있잖은가.

블린트가 딱 그 꼴이었다.

쓸모가 없다는 걸 몇 번이나 실감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편에선 놔두면 쓸모가 있을 거란 생각을 품고서 처분을 미뤄 뒀었다.

쓰레기는 쌓아 두면 악취만 낳는다는 것을 빨리 알아차렸어야 했다.

사방에서 피난 가자는 목소리가 드높아지던 가운데, 대회의장 바깥에서 위험을 알리는 비상종이 울렸다.

땡땡땡땡땡!

설마 벌써 적습이?

아니, 하니온군의 습격 때문에 울린 것이 아니었다.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는 와중에 로얄 나이트 단원이 비상종이 울리게 된 내막을 보고했다.

“크, 큰일입니다, 왕자님! 본궁에 화재가… 국왕 전하께서 침소에 불을 지르셨습니다!”

하니온 공국과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카이둔 국왕은 나날이 망가지고 있었다.

어쩔 땐 이유도 없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어쩔 땐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불같이 화를 내며 또 어쩔 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망각한 듯 아무한테나 존댓말을 쓰기도 했다.

카이둔 국왕의 나이, 데메그리 교의 배신으로 인한 스트레스, 과도한 음주를 반복하는 생활.

다들 카이둔 국왕이 치매에 걸렸음을 직감했다.

다만 그 사실이 알려지면 안 그래도 흉흉한 민심이 더욱 거칠어질 것이기에 다들 쉬쉬하며 숨기기 바빴다.

치매에 걸린 와중에도 이따금 제정신을 되찾곤 하던 카이둔 국왕인데, 그 역시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서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불을 지른 것이었다.

블린트는 대회의장에서 뛰쳐나가며 본궁으로 달려갔다. 본궁은 불에 휩싸여 있었고, 그로 인해 발생한 연기가 사방을 가득 메워 한 치 앞조차 분간키 어려웠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블린트도 카이둔 국왕이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살면서 한 번도 부모다운 행동을 한 적이 없다. 어디까지나 정치가로서 강한 자만이 자신의 후계자가 될 자격이 있다며 자식들끼리 경쟁을 부추기기만 했었다.

하지만 부모다운 행동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버지는 아버지다.

적어도 블린트는 카이둔 국왕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항상 가슴 속에 품고 살아왔다.

카이둔 국왕이 현실에 절망하여 술에 절어 살 때도 늘 걱정하는 마음이 앞섰다.

지금 아바마마는 지쳐서 잠시 쉬고 있을 뿐이라고.

조금 쉬고 나면 예전의 야심 넘치는 아바마마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매캐한 연기 때문일까.

그 어떠한 절망적인 소식을 들어도 반응이 없던 눈물샘이 처음으로 반응하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화재 현장 속으로 뛰어 들어가려던 차에 연기 속에서 호프먼이 달려와선 블린트를 붙잡았다.

“안 됩니다, 왕자님! 홍염 루비를 부수어 만든 화염입니다! 들어가셨다간 왕자님까지 위험해집니다!”

한 번 깨뜨리면 사흘 내내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홍염 루비.

홍염 루비의 화염을 꺼뜨리려면 다수의 마법사가 물 속성 마법을 퍼부어야 한다.

루크를 저지하기 위해 모든 마법사를 헥토 요새로 파견한 마당에 홍염 루비의 불길을 잡을 수 있는 수단이 있을 리 없었다.

카이둔 국왕도 그걸 알고서 구조될 생각 따윈 추호도 없다는 양 망설임 없이 루비를 깨뜨렸을 터.

블린트는 사정없이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었다.

“이거 놔라! 놓으란 말이다! 이대론 아바마마께서… 아버지가 돌아가신단 말이다!”

천붕.

자식의 죽음을 맞이한 부모의 마음을 두고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라 하였으니, 부모의 죽음을 맞이한 자식의 마음이라고 다를 리가 있겠는가.

본궁을 뒤덮은 불길이 사방으로 번져 나가는 가운데 블린트가 울부짖는 소리가 아련하게 현장 속에 메아리쳤다.

* * *

외궁 구석에 위치한 로얄 나이트 본부에는 취조 중인 죄인들을 가둬 두는 임시 감옥이 있다.

감옥 안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갇혀 있던 그란데 백작이 문득 코를 킁킁거렸다.

“어디서 이상한 냄새 안 납니까?”

맞은편 감옥에 갇혀 있던 도널드 후작이 피식 웃으며 실없는 농담을 날렸다.

“미안하네. 요즘 장이 안 좋아서 말일세.”

“그 냄새 말고 타는 냄새가 나는군요. 바깥에서 불이라도 났나 봅니다.”

“아까 어렴풋이 본궁에 불이 났다는 소리가 들리긴 했었지.”

“결국 국왕 전하께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셨군요.”

“왕가의 상징인 국왕 전하와 왕궁의 상징인 본궁이 한 불길 안에 담긴 셈인가. 상징적인 최후로군.”

“여기에 술잔이 있다면 애도를 빙자한 풍류가 되겠지요.”

“겐크의 신하라면 애도가 될 것이고, 하니온의 신하라면 풍류가 되지 않겠는가.”

두 사람 다 반역죄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투옥되었건만, 힘겨워하는 기색 한 점 없이 말을 주고받았다.

그 모습이 마치 속세를 벗어난 인격자들의 대화를 연상케 했다.

그란데 백작은 감옥 안에 서서히 연기가 들어차는 것을 보며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만약에 제가 여기서 후작님께 술 한 잔을 드린다면 애도의 뜻으로 마실 겁니까? 아니면 풍류의 뜻으로 마실 겁니까?”

“날 회유하려는 겐가?”

“끝까지 이 나라를 지키려 한 후작님께 이 나라는 누명으로 보답했습니다.”

“의심을 받는다. 뒤집어 말하면 신뢰를 주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지. 내 모자람이 자초한 일일세.”

“그런 식으로 말해서 끝까지 깨끗한 사람으로 남고 싶으신 겁니까?”

“말에 가시가 돋아 있군.”

“무책임한 것에도 정도가 있는 법입니다. 제 눈엔 혼란에 빠진 백성들을 등한시하고 혼자 편해지려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시간이 흐를수록 감옥 안의 연기가 점점 짙어졌다.

내궁에서 피어오른 불길이 외궁까지 번지고 있다. 이미 이 건물에도 불길이 옮겨붙었나 보다. 아마 몇 분 이내에 감옥에도 불길이 번질 것이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도널드 후작이 고민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왕가와 함께 죽겠다고 각오했던 사람이 갑자기 하니온의 신하가 되면 세상이 비웃을 걸세.”

“설령 자신은 더럽혀지더라도 백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다, 그게 진정한 귀족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 후작님은 왕가를 위해 싸운 것입니까, 아니면 백성을 위해 싸운 것입니까?”

자신의 결정에 일체 의문을 품지 않았던 도널드 후작이었으나 처음으로 신념이 크게 흔들렸다.

그란데 백작의 교묘한 화술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자신은 더럽혀질지언정…….’

헌신적인 태도로 살아온 사람에게 이보다 더 매력적인 문구는 없을 거다.

특히 왕가를 위해서가 아닌 백성을 위해서란 말이 도널드 후작의 심리를 크게 흔들어 놓았다.

도널드 후작은 연기 속에서 두어 번 기침을 하고선 아쉬워하는 투로 중얼거렸다.

“백성들 생각은 하지 못했군. 자네 말대로 얼른 편해지고 싶어서 외면했던 걸지도 모르겠네.”

“후작님이 가세해 주신다면 큰 힘이 될 겁니다.”

“말은 고맙네만 아무래도 뜻을 다시 세우기엔 늦은 것 같구먼.”

어느덧 화염이 감옥 안까지 번져 오고 있었다.

연기가 자욱하게 끼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데다 서서히 호흡이 가빠지는 것이 체감되었다.

몸뚱이는 고문으로 엉망진창이 되어 움직일 생각을 않았고, 설령 움직인다 하더라도 무거운 족쇄를 달고서 굳게 잠긴 철창을 빠져나가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미 포기한 도널드 후작과 달리 그란데 백작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입을 달싹였다.

“아무래도 때맞춰 도착하신 것 같습니다.”

“무슨 뜻인가?”

“아까부터 새들이 시끄럽게 지저귀더군요.”

그란데 백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등 뒤에 있던 벽이 무너졌다.

와르르르!

마치 검으로 도려낸 양 벽이 깔끔하게 잘려 나가며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구멍을 통하여 강한 바람이 몰아치며 삽시간에 연기가 걷혔다.

서서히 옅어지는 연기 사이로 한 사내의 실루엣이 아른거렸다.

사내는 가볍게 검을 휘둘러 그란데 백작을 구속하고 있는 족쇄를 잘라 내고선 넉살 좋게 한마디 날렸다.

“좀 더 일찍 오고 싶었는데, 어디 길이 좀 멀어야지.”

간만에 듣는 반가운 목소리에 그란데 백작은 지금까지의 고생이 싹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겐크 왕국을 손에 넣으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전하.”

“축하 인사는 블린트를 잡은 후에 듣겠어.”

“이거 참, 없던 눈물도 고이겠군요. 도착하시자마자 저부터 구하러 오신 겁니까?”

“아무리 나라도 레이아가 폭주하면 감당하기 힘들어서 말이야.”

“허허허, 그 아이가 화나면 무섭긴 하지요. 아 참, 맞은편에 있는 도널드 후작도 전하의 뜻에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루크로서도 도널드 후작의 합류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점령을 마친 후에 귀족들을 싹 다 물갈이해야 한다. 그 중에서 쓸 만한 자는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도널드 후작은 몇 안 되는 인재인 만큼 뜻을 바꿔 남아 준다면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루크가 검을 몇 번 더 휘두르면서 도널드 후작을 가둬 두고 있던 쇠창살이 두부처럼 잘려 나갔다.

그란데 백작은 잘려 나간 쇠창살 사이로 걸어 들어가며 도널드 후작에게 손을 내밀었다.

“술잔을 받으신 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어쩐지 연기가 들어차는데도 여유롭다 싶더니,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이군.”

“무르시기엔 이미 늦었습니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나. 한물간 늙은이를 높이 사 주니 과분할 따름일세.”

바람이 불며 탁한 연기를 걷어내는 가운데 도널드 후작이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며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 * *

쏴아아아아!

겐크 왕궁에 도착한 하니온의 비행 부대가 하늘에서 물 속성 마법을 퍼부으며 화재를 진압했다.

빗발치는 물줄기 속에서 루크가 젖은 머릿결을 뒤로 쓸어 넘기며 대회의장에 발을 들였다.

끼이이익!

낡은 경첩의 비명 소리가 고요한 대회의장 안에 메아리쳤다.

왕궁 의원들은 모두 도망친 지 오래인지라 대회의장 안엔 단 한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홀로 왕좌에 앉아 있던 블린트가 모든 것을 잃은 자처럼 공허한 눈빛으로 루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이겼다. 모두 가져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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