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139화 왕가의 상징이 던진 불이 왕국의 상징을 불태운다(2)
블린트는 결과에 승복한 듯 어떠한 저항도 하지 않았다.
과거에 자신감 넘치던 블린트의 모습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금 왕좌에 앉아 있는 자는 그저 블린트의 모습을 하고 있는 빈껍데기에 불과했다.
이유는 대강 짐작이 간다. 왕궁 내의 화재가 카이둔 국왕의 자결에서 비롯되었다는 소식은 이미 전해 들은 바이다. 부모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모습을 목격한 마당에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루크는 대회의장을 관통하듯 기다랗게 깔려 있는 카펫 위를 걸어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러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블린트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란 걸 알고 있었을 텐데?”
명분과 전력, 지휘관의 질적 차이까지.
모든 부문에서 하니온군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설사 기적과도 같은 일이 벌어져 겐크군이 승리를 거둔다 하더라도 전 대륙이 겐크 왕국을 가만두지 않았을 거다.
예견된 결과이건만 끝까지 특권을 지키려다가 더 비참한 결과를 자초한 격이다.
블린트는 초점 없이 흐린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찬찬히 입을 떼었다.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 후회하는 게 낫다지. 그뿐일세.”
“뭐, 네게도 포기할 수 없는 게 많았겠지.”
“한 가지 물어봐도 되나?”
“묻는 것뿐이라면.”
“자네가 막지만 않았다면, 우리 겐크 왕국은 대륙을 정복할 수 있었을 것 같은가?”
“내 대답은 그쪽도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이제 와서 루크의 존재 유무를 논한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무의미한 사족에 불과하다.
얼토당토않은 망상이나 할 정도로 격이 떨어졌음을 실감했는지 블린트가 실없이 웃었다.
“훗, 지금에 와선 그 어떤 가정도 무의미하단 건가. 정론이군.”
“미리 말해 두지만 왕족 대우는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기대하지도 않았네. 그 정도로 뻔뻔하진 않아서 말이지.”
루크는 대회의장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바이스를 불러다가 블린트를 포박하라고 지시했다.
대륙 조약에 따르면 데메그리 교와 내통한 자는 신성 제국에서 종교 재판을 받게 된다.
내통한 당사자는 사형, 가족들은 유배형.
블린트의 경우엔 직접적으로 데메그리 교와 내통한 적은 없으니 유배형을 받게 될 것이다.
신성 제국에서 호송대를 보내올 때까지 옥에 가둬 둘 예정이며 성기사 호송대가 도착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양도할 예정이었다.
포승줄에 묶여 끌려 나가던 중 블린트가 문득 걸음을 멈추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이거 하나만은 대답해 주게. 내가 왕족이 아니었다면 자네는 날 중용했을 것 같나?”
그에 대한 루크의 대답은 아까와 동일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만?”
아까와 같은 대답이었으나 명백히 어투가 달랐다.
아까는 신랄함이 담겨 있는 비아냥이었다면 이번엔 질문이 곧 대답이나 다름없다는 긍정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루크의 대답을 들은 블린트는 동공에 초점을 되찾으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도저히 못 당하겠군.”
이리하여 블린트가 패배를 시인하면서 겐크 왕궁이 루크의 손에 떨어졌다.
그러나 전쟁이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었다.
겐크 왕국 동부 전선과 서부 전선에선 아직 겐크군이 필사적으로 저항 중이다. 러스트와 바스커 백작이 그들을 수세에 몰아넣었다고 하니 조만간 정리되긴 할 것이다.
더하여 아레나 공국에선 한창 제랄드가 이끄는 2만 대군이 아레나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고 한다.
모든 전투가 끝나야만 공식적으로 전쟁이 종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곤 해도 겐크 왕국의 왕좌에 앉으니 기분이 남다르긴 하다.
루크는 왕좌 등받이에 등을 깊이 파묻으며 어깨에 들어간 힘을 뺐다.
“이걸로 또 하나 매듭을 푼 건가.”
카인 국왕 시절에 실질적으로 그를 배신한 자는 로메우이긴 하나 로메우를 부추긴 건 겐크 왕국이다.
아레나 왕국의 명맥을 끊고 속국으로 전락시킨 왕국이 지금에 와서 루크의 손에 떨어졌다.
그래서인지 예견했던 결과임에도 감회가 새로웠다.
공국의 왕도 왕이긴 하다만 왕국에 속한 속국의 왕이라는 사실 때문에 늘 찝찝했었다.
루크로서 산 지 수년의 세월을 거친 지금에 와서야 드디어 그토록 바라던 국왕 자리를 목전에 두게 되었다.
성취감을 만끽하던 중 화재 진압에 투입되었던 레이아가 뒤늦게 대회의장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전하, 분부하신 화재 진압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화재 현장에서 카이둔 국왕의 시신을 발견했는데 어떻게 할까요?”
“이미 타 버렸으니 그대로 화장시키는 게 낫겠지. 그래도 일국의 왕이었으니 약식으로라도 식을 치러 둬.”
“알겠습니다.”
“블린트의 처분은 대륙 조약에 따르기로 했어. 쌓인 게 많겠지만 이번에는 내 얼굴을 봐서 양보해 줘.”
“후후, 이럴 때 보면 인간미가 느껴져서 안심이 되네요. 왕이시니 명령 한마디면 그대로 따를 텐데 말이죠.”
“세상만사 행한 대로 돌아오는 법이니까.”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브리프와 왕궁 의원들은 현장에서 처분해도 될까요? 방금 보고가 들어왔는데 골디브 동쪽 고개 너머로 도주 중이라고 하네요.”
하니온군이 왕궁에 입성했을 때 왕궁을 지키고 있어야 할 왕궁 의원들과 로얄 나이트 단원들은 이미 도망간 지 오래였다.
유일하게 호프먼만이 남아서 블린트를 지키려다가 루크에게 제압당한 것이 전부다.
그 호프먼은 루크에게 일격을 맞고 기절해선 포로로서 잡혀 있다.
의무를 저버린 채 도망친 자들을 찾으라고 수색 명령을 내렸는데, 아직 멀리 도망가지 못했던 모양이다.
루크로선 레이아의 요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처형할 예정이었으니 중간 과정을 생략해도 상관없겠지. 쓸어버려.”
블린트의 명령을 브리프가 실행에 옮기며 그란데 백작가 식구들을 베어 냈었다.
꿩 대신 닭이라고 블린트 대신 브리프라도 처단하여 그란데 백작가 식구들의 한을 달래려는 듯하다.
레이아는 예를 갖추며 루크의 화끈한 명령을 받들었다.
“비행 부대 대장 레이아, 전하의 명을 받들어 잔챙이들을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리고 오겠습니다.”
* * *
“이랴! 이랴!”
골디브 동쪽 고개에서 마차 10대가 바쁘게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었다.
로얄 나이트 단원들이 마부석에 앉아서 부랴부랴 말을 재촉했고, 마차 안에선 왕궁 의원들이 쉴 새 없이 다리를 떨며 불안감을 표출했다.
“좀 더 빨리 가진 못하겠는가? 추격대가 붙기 전에 국경을 넘어야 하네!”
선두 마차를 몰고 있던 브리프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지금 최대한 빨리 이동하고 있는 거 안 보이십니까? 불평하실 거면 직접 모십시오.”
“브리프 경, 자네 말투가 그게 뭔가? 아무리 그래도 위아래 구분은 확실히 하게!”
“6인승 마차에 10명씩 올라타 놓고 속도가 나길 바라는 것 자체가 욕심 아닙니까?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그만 좀 재촉하십시오.”
“허 참, 이 친구 말하는 꼴 보게. 내 나중에 단단히 추궁할 것이니 그리 알게!”
망명길에 오른 와중에도 왕궁 의원들의 꼰대 기질은 여전했다.
왕년에 잘나가던 시절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버럭버럭 언성을 높이는 왕궁 의원들이었다.
하니온군이 예상보다 일찍 들이닥친 탓에 그 많던 재산 하나 챙기지 못하고 무일푼으로 도망치는 중이다. 심지어 가족들도 전부 버리고 가문을 이을 장남만 마차에 태운 참이었다.
이들을 두고 누가 중앙 정계에서 활동하던 귀족들이라고 생각할까.
비참하기가 시궁창 쥐보다 더하건만 본인들은 여전히 고귀한 귀족이라 자처하며 후일을 도모하려 들었다.
이쯤 되니 브리프도 마차를 몰고 있는 게 점점 후회되기 시작했다.
‘버리고 오는 게 나았을까? 아냐, 그래도 망명하고 나서 최소한 사람답게 살려면 늙은이들의 인맥이 필요해. 조금만 참자. 포로로서 처형당하는 것보단 늙은이들 뒤치다꺼리하는 게 나아.’
현재 그들은 대륙 북부에 있는 나라 중 하나인 크레인 왕국으로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레나 공국으로 가려고 했으나 그쪽도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라고 하여 방향을 급선회했다. 그나마 왕궁 의원들 중에 크레인 왕국의 귀족들과 연이 닿아 있는 자들이 있으니 망명하면 최소한 사람다운 생활 정돈 할 수 있다.
늙은이들의 구두를 핥으며 겨우겨우 로얄 나이트 부단장이 되었건만 설마 왕국이 몰락할 줄이야.
“젠장, 지지리 운도 없지. 부단장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왕국이 몰락할 게 뭐람.”
구시렁거리며 마차를 몰다 보니 어느덧 동쪽 고개 꼭대기에 다다랐다.
그와 동시에 경사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고개 너머의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자욱하게 깔린 먹구름 아래로 제비 한 마리가 힘차게 날개를 퍼덕이며 제자리 비행을 유지하고 있었다.
보란 듯이 대기하고 있는 삼색 제비, 그리고 제비의 등 위에 올라타 있는 남색 로브의 은발 여인.
분명 멀리 떨어져 있건만 그녀의 입술이 달싹이는 것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입이 달싹거리는 것이 주문을 읊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니시 에로우’
레이아의 몸 주위에 고압축 마나 화살이 생성되었다.
그 숫자가 금세 수백 개를 넘기면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기말을 연상케 하는 압도적인 광경 앞에서 브리프는 허겁지겁 방향을 선회했다.
“으아아아아!”
겁에 질린 자가 으레 어휘력을 상실하고 그저 비명만 줄창 내지르는 것처럼, 브리프라고 다를 건 없었다.
그나마 요행이라도 노려보고자 지나왔던 길로 되돌아가려 했으나, 한을 품은 은발의 여인은 그들에게 재 한 줌 이 세상에 남기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고압축 마나 화살이 떨어지며 빛의 기둥을 남겼고, 집중포화가 실시된 자리에 있던 브리프와 왕궁 의원 잔당들은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 * *
같은 시각, 격전이 벌어졌던 헥토 요새 근처에서 수레 한 대가 덜컹이며 움직이고 있었다.
마부석에선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알 수 없는 실눈처럼 가느다란 눈매를 지닌 젊은 청년이 즐거운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시체가 하나~ 시체가 둘~ 온전한 시체는 대박~ 팔이 없는 시체는 중박~ 다리 없는 시체는 필요가 없다네~”
경쾌한 운율과 다르게 가사는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수레의 짐칸에는 전투 후에 미처 수습하지 못한 시체가 가득 실려 있었다. 대부분의 시체들이 고르고 고른 듯 온전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마치 다시 활용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사내는 서쪽으로 향하려다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치며 북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아차~ 내 정신 좀 봐. 가장 중요한 시신을 놓고 갈 뻔했네.”
수레가 급선회하며 헥토 백작령 북쪽 숲으로 들어갔다.
이전에 보급고가 존재했던 북쪽 숲은 일련의 전투로 반쯤 불타 버린 이력이 있다.
드래고니안 브레스의 흔적이 역력한 숲속을 관통하며 이동하던 중 사내가 숲 한복판에서 정차했다.
“그래그래, 이걸 가지러 여기까지 왔는데 놔두고 가면 안 되지.”
사내의 손에 마나가 배열되며 텔레키네시스가 시전되었다.
땅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시체 하나가 염동력에 의해 붕 뜨며 짐칸 위로 옮겨졌다.
죽은 지 며칠이 지났음에도 시신의 외곽을 덮고 있는 비늘엔 여전히 붉은빛이 감돌고 있었다.
세로로 쪼개져 두 덩이로 나뉘긴 했으나 팔다리는 멀쩡히 붙어 있으니 이만하면 온전한 편이다.
쟈칼의 시신을 짐칸에 실은 사내는 재차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유유히 현장을 떠났다.
“돌아가세~ 돌아가세~ 교단으로 돌아가세~ 죽은 거인도 벌떡! 죽은 용인도 벌떡! 신성 제국 녀석들을 찍어 누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