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140화 이 한 몸 부서진다 한들(1)
겐크 왕국에서 한창 겐크군 잔당을 정리하고 있는 가운데, 아레나 공국에선 제랄드가 이끄는 2만 대군이 프레이머 지방에 도착했다.
프레이머 지방은 과거에 라그나로스 봉인석이 묻혀 있던 곳이기도 하다.
루크가 배신자 렌디를 처리할 때 이곳 지방에서 봉인석을 파내어 옮긴 이후부터 여타 지방처럼 정상적인 기온이 유지되고 있었다.
제랄드는 프레이머 지방에 들어서자마자 아캄프와 라샤를 불러 모았다.
“아레나 공국의 귀족들이 중앙 평야 끄트머리에 집결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병력은 얼추 2만쯤 되고, 적진에도 마나마스터 2명이 합류했다는군.”
프레이머 지방까지 오면서 크게 전투라고 할 만한 전투가 벌어진 적은 없었다.
지난날 루크가 한 번 초토화시켰던 루트인지라 당시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어서 물 흐르듯 지나쳐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로 사실상 이곳 프레이머 지방에서 처음으로 전투다운 전투를 벌일 기회가 찾아왔다.
이는 곧 공을 세울 기회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출세욕이 강하기로 유명한 아캄프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제야 제대로 한번 싸워 보겠군. 제랄드, 선두는 내가 맡겠어. 적진에 커다란 길을 뚫어 줄 테니 너희들은 그냥 따라오기만 하면 돼.”
새롭게 루크의 기사로 정착한 마나마스터 세 명 중에서 바이스와 라샤는 각자 루크와 함께 임무를 수행한 적이 있다. 그리고 직책상 제랄드와 마주칠 일이 별로 없어서 그다지 친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캄프는 다르다.
바이스와 라샤가 루크와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아캄프는 제랄드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예로부터 하니온의 중앙군과 수도방위군은 합동 훈련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제랄드는 호기를 부리는 아캄프의 태도가 익숙한 양 그의 제안을 칼같이 잘랐다.
“아니, 전면전에 돌입하면 저쪽은 북쪽에 산을 끼고 있어서 후퇴가 용이한데 우린 사방이 평야라 대승을 거두지 않으면 뒤가 없어. 보험 없이 전면전을 벌이는 건 사양이야.”
“그런가? 네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 거겠지.”
“전면전은 피하고 계책을 쓰는 쪽으로 가자고.”
“계책 좋지. 난 뭘 하면 돼?”
두 사내의 대화는 별다른 잡음 없이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라샤는 적응이 안 되어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고분고분하게 제랄드의 말을 듣고 있는 아캄프를 보고 있자니 닭살이 돋는다.
라샤가 아는 아캄프는 자신보다 약한 자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특히 공적을 세울 기회 앞에선 더더욱 독종이 되는 기사다.
그랬던 사람이 고작 마나유저 중급 수준의 사내가 하는 말에 고분고분 따르고 있다.
아캄프의 예전 모습을 아는 자라면 누구든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설마 못 보던 사이에 사람 성격이 바뀐 걸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성격이 드세서 그렇지 근본은 나쁜 편이 아니었으니 이제 와서 철이 든 것일 수도 있다.
라샤는 확인차 아캄프에게 넌지시 핀잔을 던져 보았다.
“우리 셋뿐이라지만 중요한 군사 회의인데 진득하게 생각 좀 하고 말할 순 없어?”
방금까지 제랄드의 말에는 고분고분하게 굴던 아캄프였으나 라샤가 핀잔 한마디 던지자마자 보란 듯이 맞받아쳤다.
“회의란 게 원래 이런 의견도 내고, 저런 의견도 내는 자리지. 너도 목석처럼 가만히 있지만 말고 뭐라도 의견을 내놓지그래?”
“어이, 아캄프. 네가 좀 가벼운 말투로 말하긴 했어. 그 부분을 지적하는 것 같으니 그냥 인정하고 넘어가.”
“크흠, 간만에 대규모 전투다 보니 들뜨긴 했지. 주의해야겠군.”
제랄드에겐 살갑게 굴더만 라샤에겐 예전과 다를 바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동안 두 사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성격 까다롭기로 유명한 아캄프가 저리도 따른단 말인가.
화가 나는 걸 떠나서 징그럽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라샤는 닭살이 돋는 통에 몸을 부르르 떨며 아캄프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났다.
“야! 그러지 마! 너 이런 사람 아니잖아! 갑자기 사람이 왜 그렇게 됐어? 도대체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거참 진득하게 말하라더니 지가 더 시끄럽구만. 제랄드가 작전 지시 내린다잖냐. 시끄럽게 굴지 말고 조용히 들어.”
“내가 알던 아캄프가 아냐. 나보다 약한 자의 명령은 듣지 않는다고 지껄이던 녀석이 어쩌다가…….”
“제랄드, 쟨 그냥 작전에서 빼는 게 어때? 정신 상태가 영 말이 아닌데?”
천막 내 분위기가 다소 어수선해진 것을 느낀 제랄드가 검지로 책상을 두어 번 두드렸다. 그러곤 둔탁한 타격음으로 분위기를 정돈한 후에야 작전 개요를 읊었다.
“오늘 밤에 난 별동대 2,000명을 데리고 숲에서 야영을 하겠어. 적들이 숲에 화공을 가하도록 유도할 테니 대기하고 있다가 불이 피어오르면 후방에서 아레나군을 치도록 해.”
“유인책을 쓰자는 건 알겠어. 하지만 고작 2,000명에 적들이 꾀여 들까?”
“숫자가 많아 보이도록 수를 취할 거야. 진영 내에 있는 깃발과 천막을 전부 가져갈 테니 그리 알아 둬.”
“일부러 숫자를 부풀려서 모든 병력이 숲으로 들어간 것처럼 꾸미자는 거군.”
예전에 루크가 데니스 백작을 숲으로 밀어 넣어 적의 화공을 유도한 적이 있었다.
제랄드의 작전은 과거에 루크가 썼던 작전을 응용한 것이었다.
아캄프는 제랄드의 작전에 동의했으나 라샤는 납득이 안 되는지 이의를 제기했다.
“작전의 개요는 이해했어. 하지만 인선은 이해하기 힘든걸? 본대가 적의 후방을 칠 때까지 불구덩이 속에서 2,000명이서 버텨야 한다는 거잖아.”
“그런 셈이지. 무슨 문제라도?”
“널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네 실력으로 화공 속에서 살아남긴 벅차지 않을까? 위험이 따르는 일이니 나나 아캄프가 맡는 게 맞다고 생각해.”
마나유저 중급의 실력을 가진 자에겐 부담스러운 작전이긴 하다.
마나마스터라면 화공 속에서 적에게 포위당하더라도 능히 살아남을 수 있을 터.
지휘관과 아군 병사들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강한 자가 미끼 역을 맡는 게 나았다.
한데 흡사 꺼내면 안 되는 이야기라도 꺼낸 양, 아캄프가 안절부절못하며 제랄드의 눈치를 살폈다.
“아하하, 얘가 아직 뭘 몰라서 꺼낸 말이니 제랄드 네가 참아. 오랫동안 해저 섬 원정을 다녀왔으니 모를 수밖에 없잖아. 안 그래?”
라샤는 아캄프의 반응이 이해가 안 갔다.
마나마스터가 마나유저 중급에게 실력이 모자란다고 말하는 게 무에 큰 잘못이라고 저리 쩔쩔매는지 모르겠다.
마치 제랄드가 자기들보다 강하다고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심지어 제랄드마저도 고수가 하수를 대하듯 관대한 말투를 구사했다.
“힘든 일을 자처하려는 마음가짐은 높게 사겠지만 이번에는 아캄프와 함께 움직이도록 해.”
“모처럼 전하께서 믿고 맡겨 주신 병력이니 어쭙잖은 수읽기로 패전을 겪는 건 사양이야. 그 부분은 확실히 해 줬으면 좋겠어.”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지. 그리고 참고로 알려 주겠는데, 난 너보다 수십 배나 되는 세월을 전하 곁에서 지내 왔어. 내 앞에서 충성도를 논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
분위기가 험악해지려는 것을 간파한 라샤가 멋쩍게 웃었다.
피차 루크의 기대에 응하려고 하는 일인데 의욕이 과한 나머지 불화를 빚으면 본말전도지 않은가.
“기분 나쁘라고 한 말은 아니었어. 단지 역할을 바꾸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싶어서 꺼내 본 말이야. 불쾌했다면 사과하겠어.”
“나야말로 예민하게 반응한 감이 없다고는 못하겠군. 사과하지.”
“같은 주군을 모시는 기사끼리 싸워서 좋을 거 없잖아? 좋게 좋게 가자고. 그런 의미에서 이쯤 해 두고 회의를 마무리하는 게 어때?”
“그러는 게 좋겠군. 밤에 작전을 개시하려면 지금부터 준비해야겠지.”
둥글둥글하게 마무리를 짓고 끝내려던 찰나, 아캄프가 능글맞은 표정으로 라샤에게 말을 걸었다.
“너랑 나도 같은 주군을 모시는 처지잖아. 우리도 이제 그만 싸우면 안 되겠냐?”
혼란한 틈을 타 관계 회복을 기대하는 낌새 속에서 라샤는 매몰차게 몸을 돌렸다.
“넌 예외야. 딴 데 가서 알아보시지.”
어림도 없다는 듯 성큼성큼 천막 바깥으로 나가 버리는 라샤였다.
아캄프는 그녀의 도도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멋쩍게 뒷머리를 긁었다.
“여러 의미에서 갈 길이 멀구만.”
* * *
그날 내내 라샤와 아캄프는 병력을 조금씩 산속으로 이동시켰고, 제랄드는 일부 병력만 데리고 숲으로 들어가 2만 명 규모의 야영지를 구축했다.
모든 깃발을 숲 곳곳에 교묘하게 배치해 놓고, 천막을 넓게 세워 흡사 모든 병력이 숲에서 야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라샤는 안개가 자욱하게 낀 산기슭에서 적의 화공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바위 위에 앉아 턱을 괴고 앉아 있는 내내 그녀의 머릿속에선 의문이 떠나질 않았다.
“마나유저 중급 수준으로 어떻게 저리도 당당한 거지? 정말이지 아캄프 녀석의 반응도 그렇고 이해 못할 일투성이네.”
언제 다가왔는지 등 뒤에서 아캄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랄드의 신경을 건드려서 좋을 거 없어.”
고개를 돌리자 아캄프가 쇠컵 두 개를 양손에 쥐고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여느 때처럼 관계 회복 분위기를 잡아 보려고 찾아온 낌새는 아니다.
때문에 라샤도 이번만큼은 그가 내미는 컵을 받아들며 질문을 던졌다.
“못 보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도 처음엔 너랑 비슷한 태도였어. 마나유저 중급이 나랑 동급의 직책을 가지고 있다는 게 마음에 안 들었지.”
“그건 너나 그렇지 난 아냐. 공왕 전하께서 인맥만으로 요직에 사람을 앉힐 분은 아니잖아?”
“어이쿠, 같이 원정 한 번 다녀오더니 백년 충신 다 됐군.”
“장난칠 거면 찻잔 도로 가져가.”
아캄프는 농담도 못 하냐는 의미에서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선 본제로 돌아갔다.
“사람이란 게 원래 저마다 선과 악의 경계를 가지고 있는 법이잖아. 하지만 제랄드 녀석에겐 경계란 게 없어.”
“무슨 의미야?”
“말 그대로야. 녀석에겐 전하의 명령이 곧 신념이고 판단 기준이야. 어찌 보면 충성심이라기보단 신앙심에 가깝지.”
“이상적인 신하의 모습인걸?”
“그래서 위험하기도 해. 선과 악의 경계가 없다는 건 전하의 명령에 따라 언제든지 천사가 될 수도 있고, 악마가 될 수도 있다는 거니까.”
달리 말하면 루크의 명령을 절대 기준으로 삼아 움직이고 있으니 임무를 행함에 있어 망설임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군을 상대로는 한없이 우호적일 것이며 적군을 상대로는 한없이 적대적일 것이다.
아캄프가 우려하는 바를 모르는 건 아니나 제랄드 같은 타입은 주군이 현명할수록 현명해질 것이고, 우둔할수록 우둔해지는 타입이니 이 경우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현재 제랄드의 주군은 다른 누구도 아닌 루크이니 말이다.
“우리가 배신만 안 하면 제랄드가 악마가 될 일도 없겠네. 근데 그것만으론 네가 제랄드에게 설설 기고 있는 게 설명되지 않는걸?”
“설설 기긴 누가 설설 기어? 그 정도까진 아냐.”
“그럼 쩔쩔매고 있다는 걸로 정정할게. 아무튼 그 녀석 마나유저 중급 아냐? 왜 그리 쩔절매?”
“쩝, 아까 내가 처음에 제랄드 녀석이 마음에 안 들었었다고 했었잖아.”
“응, 그랬었지.”
“그래서 언제 한번 남들 몰래 일대일 대련을 벌였었어.”
“결과는 어떻게 됐는데?”
아캄프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는지 몸서리를 치며 저도 모르게 목 부근을 쓰다듬었다.
“녀석이 봐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저 세상에 가 있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