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대급 재능으로 환생-141화 (141/200)

# 141

141화 이 한 몸 부서진다 한들(2)

숲으로 들어간 제랄드는 병사들을 시켜 깃발과 천막을 세우게 하였다.

암만 그래도 병사 2,000명으로 2만 명 분의 천막을 단시간에 세우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제랄드의 밑에는 상급 정령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령사, 그중에서도 땅의 정령은 힘쓰는 일에 특화되어 있다.

상급 정령사 스텔라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깃발 앞에 서서 하급 땅의 정령을 소환했다.

“노움 소환!”

다크엘프 특유의 백발이 흩날리며 그녀의 손에 마나가 모였다.

적포도주를 연상하게 하는 보랏빛 피부 표면에 마나가 맺히는가 싶더니 이내 곧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지면에 그녀의 마나가 스며들 때마다 돌로 이루어진 난쟁이가 소환되었다.

소환된 노움의 숫자는 총 50마리.

하급 정령이라곤 하나 한꺼번에 50마리를 부리는 것에서 스텔라가 지닌 정령사의 자질이 얼마나 뛰어난지 엿볼 수 있었다.

노움 한 마리가 일반 성인 장정 수십 명 몫의 노동을 해낼 수 있으니 시간 내에 깃발과 천막을 설치할 수 있을 것이다.

한창 노움에게 작업을 시키고 있는데 제랄드가 다가와 그녀에게 말을 붙였다.

“스텔라, 작업 진행 상황은?”

“작전 시간 전에는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나를 아껴 둬. 화공을 받은 후에 네 역할이 중요하니까.”

“네, 주의하겠습니다.”

두 사람 간에 딱딱한 어투로 사무적인 대화가 오갔다.

스텔라가 데메그리 교와 밀약을 맺고 루크군에 입대한 지도 벌써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그녀는 직업 군인으로 일하면서 기사 양성소 훈련을 받고 있었다.

기사 양성소 훈련 과정은 총 4년.

전쟁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면 특별 학점을 인정받아 수료 기간을 크게 앞당길 수 있다.

언젠가 데메그리 교에서 연락이 올 때를 대비하여 입지를 탄탄하게 다져 둘 필요가 있었다.

루크의 휘하에서 입지를 다져 두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녀에겐 또 한 가지 수행해 둬야 할 임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제랄드를 꼬셔 두는 것이다.

루크도 사람인 이상 가장 신뢰하는 자가 배신하면 심리적인 타격이 클 터. 그 역할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바로 제랄드였다.

여태까지 제랄드의 부관으로서 일하면서 수도 없이 많은 대시를 해 보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스텔라는 모처럼 둘만 있게 되었기에 막간을 이용하여 제랄드와의 거리를 좁혀 보려고 시도했다.

“저… 대장님?”

반면에 제랄드는 작업 현황을 살피느라 그녀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어. 왜?”

“대장님은 어째서 항상 위험한 역할을 자처하시나요?”

“전하의 기대에 부응한다. 그 외에 달리 이유가 필요하나?”

“대장님껜 전하가 정말 소중한 존재인가 보네요.”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그 소중한 사람이 한 명 더 추가될 순 없나요?”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뿐이지 사실상 고백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그간 고민 상담을 핑계로 제랄드와 일대일 술자리를 가져 본 적이 있긴 하다.

그러나 술을 마시고 전하는 말은 전부 취해서 하는 소리로 치부해 버리는 탓에 이번에는 말짱한 정신으로 작업을 걸어 보았다.

한데 별안간 제랄드가 검 자루에 손을 올리며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속셈이냐?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으면 베겠다.”

갑자기 왜?

그저 작업을 걸었을 뿐인데?

설마 정체가 들킨 건가?

평범한 작업 멘트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고민 상담을 빙자한 술자리에서 간간이 했던 말이지 않은가.

스텔라는 맥락을 알 수가 없어 얼떨떨해하며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대답을 않자 제랄드의 재촉이 이어졌다.

“주군을 한 명 더 섬기라니 그게 무슨 의미지? 내게 반역을 종용할 셈인가?”

이제야 맥락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이 주군 바보 사내의 머릿속에선 ‘소중한 사람=주군’이란 공식만 있는 모양이다.

맥락을 알고 나니 안도와 어이없는 감정이 뒤섞이며 깊은 한숨을 자아냈다.

“하아, 그게 아니라 절 추가해 줄 순 없냐는 얘기였어요.”

“응? 널 주군으로 섬기라고?”

“아뇨! 그게 아니라요! 아이참!”

“한꺼번에 마나를 많이 써서 피곤한가 보군. 작업이 끝나면 쉬어 둬. 작전을 실시할 때 집중하지 못하면 큰일이니까.”

과도한 작업량을 부여해서 미안하단 의미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스쳐 지나가는 제랄드였다.

제랄드가 떠나면서 홀로 남은 스텔라는 검지로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솔직히 처음에 밀약을 맺을 때만 하더라도 제랄드쯤은 쉽게 자빠뜨릴 수 있을 거라 확신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난적이다.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넘어오게 만들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이다.

* * *

자정을 막 넘겼을 무렵.

숲 곳곳에서 거센 불길이 피어올랐다.

겨울을 맞이하며 바짝 마른 초목과 낙엽은 제 몸을 장작 삼아 불길을 더욱 키워 주었고, 삽시간에 불길이 사방으로 번지며 숲 안을 매캐한 연기로 가득 채웠다.

제랄드의 예상대로 적들이 숲에 화공을 가한 것이었다.

숲속 야영지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랄드는 때가 되었음을 감지하고선 말에 올라탔다.

“깃발과 천막은 버린다! 미리 뚫어 둔 길로 진격해라!”

불길이 번지지 않도록 나무를 베어 길을 만들어 뒀었다.

겉보기엔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미리 나무를 베어 둔 길에는 불길이 닿지 않고 있었다.

제랄드는 직접 선두에 서며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검날이 검집 안쪽을 긁으며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평범한 검과는 다소 다른 모습을 띠고 있는 검이었다.

이전에 쓰던 철검과 다르게 현재 제랄드의 손에 쥐여 있는 검은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말을 몰며 미리 뚫어 둔 길을 주파던 중 연기 사이로 적장의 외침이 날아들었다.

“하니온군이 퇴각 중이다! 놈들을 살려 보내지 마라!”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판단했는지 다 이긴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연기 너머에서 궁수대의 실루엣이 아른거리는 것이 금방이라도 화살이 날아들 기세였다.

아니나 다를까 숲을 완전히 빠져나가기도 전에 사방에서 화살 세례가 쏟아졌다.

그에 대응하여 제랄드가 팔을 옆으로 뻗으며 수신호를 보냈다.

“스텔라, 대응해.”

“네! 노아스!”

스텔라의 부름 속에서 상급 땅의 정령 노아스가 소환되었다.

골렘을 연상하게 하는 커다란 덩치의 바위 거인이 지면에서 솟아났고, 스텔라의 지시 속에서 노아스가 강하게 발을 굴렀다.

쿠웅!

지진이라도 일어난 양 지면이 강하게 흔들리면서 길 양옆으로 바위 장벽이 솟아올랐다.

제랄드의 부대에 쏟아지던 화살 세례는 바위 장벽에 가로막혀 맥없이 튕겨 나가기 일쑤였다.

툭! 투둑! 툭툭!

빗방울이 우산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와중에 너른 공터가 나왔다.

공터만 지나면 숲에서 빠져나갈 수 있건만 이미 공터엔 적의 부대가 도착하여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적의 부대 선두에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는 자가 서 있었다.

범상치 않은 흑갑에 척 봐도 무거워 보이는 옥빛 장창을 한 손으로 들고 있는 젊은 사내였다.

사내는 제랄드를 스윽 보더니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쳇, 아캄프란 작자와 붙는 걸 기대했는데 하필이면 꽝이 걸렸군.”

감출 것도 없이 실망감을 표하며 제랄드를 잔챙이 취급하고 있었다.

사내의 정체라면 알고 있다.

아레나군을 상대하러 출전한 입장에서 적의 마나마스터에 대한 정보쯤은 당연히 파악해 뒀다.

제랄드는 말에서 내리며 신랄하게 맞받아쳤다.

“레들리 공왕이 크레인 왕국에서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를 데려왔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군.”

사내의 이름은 슈만.

크레인 왕국 출신의 기사이며 최근에 아레나 공국군에 합류했다고 한다.

레들리 공왕이 그를 섭외하기 위해서 80억 루소란 거액을 투자했다고 들었다.

대륙 북쪽에서 나름대로 이름을 날린 모양이긴 하나, 제랄드의 눈에는 그저 그런 애송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말 값어치 있는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법이다.

그 부분은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서도 다를 게 없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인재는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수준이라는 거다.

슈만은 돌격 자세를 취하며 조소를 머금었다.

“훗, 능력도 없는 주제에 입만 살았구만. 얼마나 머리를 잘 굴리길래 마나유저 중급이 사령관이 되었을까 싶었는데 지금 보니 영 아닌걸? 하니온 공왕도 사람 보는 눈이 엉망이구만.”

“내 앞에서 전하를 모욕하다니 배짱 한번 좋군.”

“꼴에 충견이라고 주인이 욕먹으니까 화가 나나 보지?”

“충견이라… 그 부분은 마음에 드는군.”

“개 취급을 당하는데 좋아하다니, 미쳤구만.”

“주군을 모욕하는 자에겐 맹견이 되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

대화 도중에도 조금씩 서로 간격을 좁혀 가고 있었다.

발을 끌며 간격 싸움에 돌입하던 중 먼저 제랄드가 땅을 박차며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사정거리는 당연히 창이 더 길다. 그러니 과감하게 서로 치고받을 수 있는 거리만큼 좁혀서 단숨에 승부를 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근거리 간격 싸움에 있어 창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슈만은 단박에 제랄드의 의도를 간파하며 창끝에 마나 스피어를 부여했다.

“어딜 파고들려고!”

마나 스피어가 쑤욱 돋아나면서 창의 사정거리가 한층 더 길어졌다.

때문에 제랄드가 미처 파고들기도 전에 슈만의 공격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마나유저 중급 수준의 마나 오오라로 마나마스터의 공격을 받아 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제랄드는 검을 휘둘러 마나 스피어를 쳐 내려 하였다.

제랄드의 대응을 본 슈만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감히 네놈 주제에?’란 생각이 고스란히 배어 나오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제랄드의 검과 슈만의 창이 경합을 이루었다.

뎅겅!

마나의 출력에 격차가 있는 탓에 한쪽의 무기가 잘려 나갔다.

한데 잘려 나간 쪽은 슈만의 창이었다.

순간적으로 검에 맺힌 마나 오오라가 마나 블레이드로 바뀌며 압도적인 출력으로 장창을 베어 낸 것이다.

마나 블레이드가 발현된 것은 찰나였으나 슈만은 똑똑히 보았다.

제랄드가 쥐고 있는 검 자루에서 일순 검은색 마나 회로가 뻗어 나오며 제랄드의 손에 파고든 것을.

“네, 네놈… 무, 무기에 무슨 짓을 한 거냐!”

슈만이 놀라든 말든 제랄드는 슈만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무심하게 한마디 날렸다.

“다음엔 맹견 주의라고 써 붙여 두도록 하지.”

다음 기회가 있다면 말이다.

제랄드는 지면에 두 발을 단단히 딛으며 허릿심을 이용해 검을 힘껏 휘둘렀다.

마나 오오라가 맺힌 검이 기다란 사선을 그으며 슈만의 몸을 지나쳤고, 슈만의 흑갑이 검의 궤적을 따라 갈라지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슈만을 베어 냄과 동시에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자주 쓸 만한 건 못 되는군.”

제랄드가 쥐고 있는 검은 무기형 마물을 개량한 마검이다.

아무리 기량을 갈고닦아도 재능에 한계가 있어선 루크를 보좌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오즈에게 부탁해서 만든 물건이었다.

이전에 루크가 사두 들개란 마물을 벨 때 한쪽 팔만 숙주로 내어 주어 일시적으로 출력을 높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착안한 무기였다.

오즈가 개량해 준 덕에 마검에 몸을 빼앗길 염려는 없었으나, 순간적으로 대량의 마나를 소모하는 터라 피로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게다가 마나 회로에 부담이 너무 가서 사용할 때마다 몸이 상하는 게 실감되었다.

슈만이 죽음과 동시에 사방에서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와아아아아!”

산기슭에서 대기하던 아캄프와 라샤가 적의 후방을 공격하기 시작했나 보다.

미끼 역할을 수행한 것만으로 만족할 생각은 없다.

제랄드는 쓰러진 슈만의 시신을 뛰어넘으며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적의 마나마스터가 고작 이 정도인데 병사들이라고 대수겠느냐! 아레나의 겁쟁이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자꾸나!”

“우오오오! 대장을 따르라!”

피로감?

적을 앞에 두고 몸 상태를 논할 정도로 약해 빠진 근성을 가진 적은 없다.

쓸 때마다 몸이 망가지면 어떤가.

천재의 그늘을 쫓으려면 피를 토하고 뼈를 깎는 대가를 치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눈앞의 적보다 1초라도 오래 사는 것.

그것이 주군을 지키는 검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일지니.

제랄드의 움직임에 있어 제 몸을 돌보는 기색 따윈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전투는 밤새도록 이어졌고, 날이 밝았을 무렵에는 숲속에 아레나군의 시신이 그득하게 쌓였다.

이 날 대승을 거둔 제랄드는 여세를 몰아 아레나 공국의 수도를 공격했다.

며칠간 공성전이 펼쳐지던 중, 겐크 왕국의 패전 소식을 들은 레들리 공왕이 항복 의사를 전하면서 드디어 헤테룬이 하니온군의 손에 떨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