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143화 신성 제국과의 마찰(2)
신성 제국.
대륙 북부에 있는 종교 국가이자 대륙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대국이다.
대륙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아슈타르 교의 총본산이기도 하고, 전 대륙에 신전을 뻗어 두어 다른 왕국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제국으로 불리고 있긴 하나 황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가장 높은 자리엔 아슈타르 교의 대주교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밑에 주교 12명이 놓여 있다.
신성 제국이 루크를 겁내지 않는 것은 본인들도 그만한 힘을 갖추고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신성 제국을 대륙 제일 최강국으로 만든 원동력으로 두 종류의 힘을 꼽을 수 있었다.
하나는 신내림, 또 하나는 육지의 3대 신기.
특히 육지의 3대 신기의 경우 신성 제국이 신기 3개를 모두 소유하고 있었기에 지금은 신성 제국의 상징이자 아슈타르 교의 성물이라 불리기도 한다.
대륙 최강으로 군림해 왔던 신성 제국이 혜성처럼 등장한 새로운 강국의 대두를 달갑게 여길 리 없었다.
다들 공공연하게 입 밖으로 내지만 않을 뿐이지 두 나라의 마찰은 예정된 일이었다.
길버트는 내심 기분이 언짢았다.
아슈타르 교의 교리에 따르면 아슈타르 교는 이 더러운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 신이 직접 교리를 내려 탄생한 종교이며 고위 사제들과 성기사들은 신이 파견한 천사들의 환생이라 하였다.
뼛속까지 교리에 물들어 있는 골수 신자이자 교단 내에서도 신임받는 4성급 성기사인 자신은 천사의 환생 중에서도 상당한 고위 천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신성 제국의 위엄과 아슈타르 교의 영향력을 감안하면 설사 그랜드마스터라 할지라도 한 수 접고 들어오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때문에 루크와 조우하여 사절단의 업무를 시행하는 내내 고자세를 취하였다.
“제국을 대표하여 데메그리 교와 내통한 카이둔 국왕을 처단, 그리고 그의 아들 블린트를 인계해 주신 것에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블린트는 신성 제국의 권한하에 종교 재판에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니 차후에 빌로스 왕국에서 반환을 요구해도 내어 드릴 수 없다는 점을 인지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냥 고맙다고 하고 끝내도 될 것을 굳이 한마디 더 붙이는 길버트였다.
완곡히 말하고 있으나 그 이면에는 신성 제국은 빌로스 왕국의 요구를 묵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뜻이 숨겨져 있었다.
아직까지는 루크도 크게 개의치 않는지 왕좌에 앉아 시종일관 옅은 미소를 띠었다.
“다시 가져가라고 해도 안 가져갈 테니 그 부분은 걱정할 거 없어.”
“듣던 대로 호쾌하신 분이시군요. 그런데 이곳에 오기 전에 신경 쓰이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빌로스 왕국에선 아슈타르 교를 국교로 선정할 생각이 없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헛소문일 테지요?”
대륙에서 아슈타르 교를 국교로 지정하지 않는다는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대놓고 신성 제국을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길버트의 질문은 단순히 국교로 선언하느냐 마느냐를 묻는 것이 아닌, 정말로 신성 제국과 척을 질 생각이냐고 묻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루크는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인 대답을 들려주었다.
“우리 빌로스는 종교 자유화를 추구할 생각이다만, 무슨 문제라도?”
“종교의 자유화라는 건 데메그리 교도 인정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종교 자유화 따윌 인정할 성싶으냐.
국교로 지정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크다. 전자는 국가의 지원이 당연시되지만, 후자는 국가에서 의무적으로 종교를 지원할 필요가 없다.
땅을 판다고 신전이 세워지는 것은 아니니 국가의 지원은 필수인데, 만약 지원을 받지 못하면 아슈타르 교 대신전의 모든 비용을 자신들이 부담해야 한다.
그러니 종교 자유화를 철회하도록 만들어야만 했다.
데메그리 교를 들먹이면 루크도 할 말이 없을 터.
길버트는 루크가 말을 얼버무리는 꼴을 기대했으나 실상은 정반대였다.
“방금 그 발언은 신성 제국을 대표해서 말한 건가?”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신성 제국은 데메그리 교를 종교로 인정한다는 거군.”
“네?”
“우린 데메그리 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아. 놈들은 범죄자 집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그런데 아슈타르 교에선 종교 집단으로 보고 있었다니 이거 놀랍군.”
“조, 종교 집단이긴 하지요. 다만 같은 종교 집단이고 그들은 이교도입니다. 절대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거참 이상한 일이군. 아슈타르 교는 데메그리 교에 관대해진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지.”
“어, 어찌 그리 끔찍한 말씀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처음 의도와 달리 말을 섞을수록 길버트만 당황하게 되었다.
길버트가 당황할수록 루크는 기세등등하게 그를 몰아붙였다.
“과거에 수백 명에 달하는 데메그리 교 세자들이 아슈타르 교 사제로서 하니온에 잠입한 전적이 있지. 그들 모두 아슈타르 교가 길러 낸 사제들로 알고 있다만?”
아슈타르 교에서 인정한 자들이 당당하게 아슈타르 교 사제복을 입고서 사람들을 마물화시킨 전적이 있다.
그 점을 비꼬고 있는 것이었다.
길버트는 제 나름대로 머리를 쥐어짜 내어 변명을 늘어놓았다.
“잠복한 놈들이 데메그리 교 사제였던 것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지, 우리 아슈타르 교에서 데메그리 교 사제를 기르고 있던 게 아닙니다.”
“그러면 아슈타르 교엔 누가 데메그리 교 사제인지 판별할 능력이 없다는 거군.”
“우리뿐만 아니라 누구도 알아내지 못할 겁니다. 꼬리를 드러내지 않고 잠복해 있는 자를 찾기란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렇다면 아슈타르 신학교 출신의 사제가 빌로스에 온다 쳐도 그가 정말 아슈타르 교 사제인지, 위장한 데메그리 교 사제인지 알 수 없다는 거군.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에게 백성들의 혈세를 지급하라고 요청하는 건가?”
“아니, 그건…….”
제 입으로 데메그리 교 사제를 사전에 간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 터라 더 이상 반박할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종교 자유화를 인정하는 발언을 해 버린 꼴이 되었다.
빌로스의 국왕이 달변가라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다.
말을 섞을수록 바보가 되는 느낌이었다.
길버트가 당황하든 말든 루크의 공세는 계속 이어졌다.
“아슈타르 교가 범죄자 집단의 위장 신분 용도로 쓰이고 있는데 신성 제국에선 아무런 조치도 안 하고 있더군. 신성 제국은 자신들이 이용당해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는 국가인가 보지?”
“말씀이 너무 지나치신 거 아닙니까?”
“그럼 묻도록 하지. 신성 제국에선 신분 위장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있긴 하나?”
“일단 방법을 모색 중이긴 합니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조치를 취한다는 게 가능한지 모르겠군. 내 눈에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늘어놓는 것 같은데 말이야.”
“무슨 말씀을…….”
“실제로 무슨 조치를 취했지? 우리에게 피해 보상도 안 해, 그렇다고 데메그리 교를 걸러 낼 방법을 찾은 것도 아냐. 도대체 이용당하는 것 외에 뭘 했지? 어디 한번 들어나 보도록 하지.”
길버트는 완전히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루크가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곤 해도 신성 제국과 척을 져서 좋을 건 없다.
한데도 필요 이상으로 공격적인 말투를 구사하는 게 자꾸 마음에 걸렸었다.
전부 피해 보상을 요구하기 위한 포석이었던 것이다!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길버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제길! 처음부터 피해 보상을 요구할 생각으로 판을 짜 온 거구나! 돌아 버리겠군. 여기서 대답을 얼버무렸다간 제국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꼴이 되잖아!’
‘신성 제국은 이용당하고만 있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려면 실제로 조치를 취하고 있는 티를 내야 한다.
현재 시점에서 유일하게 티를 낼 수 있는 방법은 빌로스 왕국에 피해 보상을 해 주는 것밖에 없다.
피해 보상을 해 주자니 금액이 만만찮고, 안 해 주자니 입만 살아 있는 무능한 제국이란 오명이 따라붙는다.
금전적인 손해냐, 제국의 위엄을 깎아 먹느냐.
어느 쪽이 더 손해냐고 묻는다면 과감히 후자 쪽이라고 말하겠다.
결국 정신을 차리고 보니 조금 덜 손해를 보느냐, 많이 손해 보느냐의 양자택일만 남아 있었다.
루크는 고민할 시간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회담을 마무리하려 들었다.
“대답을 못 하는 걸 보니 역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있나 보군. 대륙 북쪽의 다른 왕국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많이 실망하겠어. 어쩌면 대륙에 종교 자유화 열풍이 불지도 모르지.”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 말하거나. 피해 보상을 해 주는 걸로 조치를 취하고 있는 티라도 내거나.
아무것도 안 하면 신성 제국의 무능함을 알리겠다고 압박을 넣는 루크였다.
여기서 얼버무리고 도망쳤다간 신성 제국에 돌아가기도 전에 동네방네 소문이 퍼질 것이다.
이미 길버트의 권한을 한참 뛰어넘은 지 오래건만, 길버트에게 당장 대답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길버트는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을 내놓았다.
“조, 조만간 하니온 건과 관련된 보상금을 지급할 예정입니다.”
“이전에 요구했던 대로 빌로스 왕국 1년 치 예산을 5년에 걸쳐 분할 납부하는 걸로 하지.”
“네? 그땐 하니온 공국 시절이었으니 공국 1년 치 예산을 지불하는 게…….”
“그러게 말이야. 그때 무시하지만 않았다면 훨씬 적은 금액으로 끝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 안 그래?”
“큭, 그 부분은 추후에 적임자를 파견하여 다시 논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일단 제국에서 피해 보상이란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셨으니 제국에 대한 무례한 언사를 철회해 주십시오.”
“그래? 그럼 그렇지. 명성 높은 대륙 최고의 나라가 가만히 이용만 당하고 있을 리가 없지. 발언은 철회하겠어. 그리고 현명한 조치를 취한 신성 제국에 경의를 표하도록 하지.”
칭찬을 빙자한 비아냥이 더더욱 길버트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이제 제국에 돌아가서 뭐라고 보고한단 말인가!
귀국 후에 온갖 질책과 불이익이 들이닥칠 걸 알면서도 루크가 원하는 대로 해 줄 수밖에 없는 현실이 답답할 따름이었다.
분명 처음에 루크와 마주할 때만 하더라도 종교 자유화를 빌미로 기를 눌러둘 생각이었는데,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회담이 마무리되면서 이제야 루크의 압박이 풀리는가 싶었다.
그러나 아직 한 발 남았다는 양 루크의 한마디가 화살이 되어 그의 가슴을 관통했다.
“경의의 말 한마디를 사기 위해 수천억 루소를 지불하다니, 과연 신성 제국답게 통이 크군.”
마지막까지 속을 뒤집어 놓는 루크의 말에 길버트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 * *
한 달 후 아슈타르 교의 총본산이자 신성 제국의 상징인 대신전 안에서 주교들이 언성을 높였다.
“그걸 지금 보고라고 하는가! 피해 보상을 하기로 했다니! 대체 거기까지 가서 무슨 짓을 했길래 그따위 결과가 나온단 말이냐!”
“종교 자유화라니, 그딴 걸 인정하는 것이냐!”
“대주교님! 빌로스 왕국을 가만히 놔두어선 안 됩니다! 다른 왕국에서 놈들을 본보기 삼아 덩달아 종교 자유화의 바람이 불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귀국한 길버트로부터 회담 결과를 전해 들은 주교들은 펄펄 열을 내며 빌로스 왕국 처단을 외쳤다.
원탁을 사이에 두고 주교들의 성난 목소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주교관을 쓴 백발노인이 눈을 감았다.
백발노인은 다름 아닌 16대 대교주인 오스카였다.
오스카는 머릿속으로 길버트의 보고를 하나하나 되짚어 본 후에야 눈을 떴다.
“길버트의 보고대로라면 루크 국왕은 장차 신성 제국에 큰 위협이 될 테지.”
“그러니 당장…….”
“진정들 하게. 지금은 시대의 흐름과 그자의 명운이 맞아떨어지고 있는 시기일세. 이번 일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지. 조급하게 움직이면 될 일도 안 될 걸세.”
“하면 저리 기세등등하게 굴고 있는데 가만히 놔두자는 말씀이십니까? 다른 왕국들이 선동당한 후에는 늦습니다. 저희에겐 아슈타르 신의 말씀이야말로 진리이자 구원의 길임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이 있지 않습니까?”
“허허허, 누가 가만히 놔두자고 했는가? 지금은 상승세이니 하락세를 타도록 만들 필요가 있을 테지.”
“묘안이라도 있으십니까?”
기대에 찬 질문과 함께 오스카가 백발수염을 쓸어내리며 인자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발언은 인자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듣자 하니 거인국에 루크 국왕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는 볼모가 잡혀 있다더군. 그 볼모를 이용할까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