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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재능으로 환생-144화 (144/200)

# 144

144화 빌어먹을 팔자(1)

신성 제국의 사절단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추수철이 되었다.

지난 몇 년간의 흉년을 보상하듯 루크 즉위에 맞춰 풍년이 찾아왔다.

농사일에 전념하라는 의미에서 임시로 모든 징집병들의 군사 훈련을 면제해 준 것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귀족 물갈이를 실시하면서 몰수했던 토지를 백성들에게 싸게 임대해 주면서 국가와 백성 모두 소득이 소폭 상승하는 경제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들에선 백성들이 품앗이 노래를 부르며 이삭을 털어 냈고 집집마다 술 익는 냄새가 그윽하게 풍겨 나왔다.

경제 회복의 시발점이 될 첫 풍년이 찾아오면서 루크를 비롯한 고위층도 드디어 한시름 놓게 되었다.

더불어 추수 감사절을 앞두고 루크에게 이른 선물이 도착했다.

“저 아쿠아, 주인님이 맡기신 임무를 완수하고 지금 막 복귀했습니다.”

오랫동안 루크의 곁을 떠나 있던 아쿠아가 복귀한 것이다.

그간 장거리에서 루크의 마나를 빌려 쓰며 오션마린을 채굴하던 아쿠아다. 반대로 말하면 지난 전쟁에서 루크는 계속 아쿠아에게 마나를 공급하면서 적들과 싸웠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아쿠아도 루크에게 부담이 갈 것을 염려하여 최대한 효율적으로 마나를 쓰긴 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정령술은 다른 분야에 비해 마나 연비가 나쁜 편이다.

그중에서도 정령왕은 특히나 연비가 나쁜 편이라 항상 루크의 마나 중 3할은 아쿠아를 유지하는 데 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살아남으려면 항상 실력의 3할은 감춰 두라는 말이 있는데, 그런 면에서 루크는 강제적으로 전력을 감추게 된 셈이었다.

루크는 아쿠아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수고했어. 일단 그 모습은 너무 눈에 띄니 작은 크기로 줄어들지 않겠어?”

바다를 건너 강을 거슬러 올라와 왕궁 안의 분수대에서 치솟은 터라 수 미터에 달하는 물의 정령왕이 왕궁 한복판에 서 있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워낙에 특이한 광경인지라 왕궁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제자리에 못 박은 듯 꼼짝 않고서 아쿠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주변의 이목이 집중된 것을 느낀 아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작게 축소시켰다. 그리고 힘껏 뛰어 루크의 손바닥 위에 올라탔다.

이후에 루크는 개인 집무실로 돌아가 책상 위에 아쿠아를 올려놓았다.

“오션마린은 전부 캐낸 거야?”

“네, 해저 섬에 매장되어 있던 걸 전부 캐냈어요. 지금쯤 하니온 공국 사람들이 선박에 실어서 운반 중일 거예요.”

“그거 말인데, 네가 채광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지명이 바뀌었어. 지금은 빌로스 왕국의 국왕이고, 하니온 공국은 하니온 지방으로 편성됐지.”

“아, 일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었나요? 인간 사회는 정말 빨리 바뀌네요.”

“보통은 이렇게 빨리 안 바뀌어. 나니까 빠른 거지.”

“라그가 잘 따르는 이유를 알겠네요. 걔 의외로 자기주장이 강한 존재한테 약하거든요.”

“그래서 네게도 약한 모양인가 보군.”

“후후, 전 그렇게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 아니랍니다. 그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순리대로 순탄하게 지내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서요.”

조만간 오션마린이 하니온 지방에 도착할 것이다.

캐낸 오션마린 중 일부는 하니온 지방에서 마나유저 및 마법사를 육성하기 위해 사용할 것이고, 일부는 빌로스 왕국 본토로 옮겨서 마찬가지로 인재 육성에 활용할 예정이었다.

육성용 오션마린을 제외한 나머지는 수출할까 싶다.

풍년이 들었다곤 해도 바닥난 국고를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북쪽 대륙에서 온 지원은 쓰러져 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해 모두 투입한 지 오래며 그레이트 쉘 양식 산업은 하니온 지방을 부흥시킬 수 있는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오션마린을 수출하여 비어 있는 국고를 채울 생각이었다.

대화를 마친 루크는 아쿠아를 정령석으로 되돌리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언제 새장에서 탈출했는지 책장 위에 숨어 있던 파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쬐끄매! 쬐끄매!”

그러고 보니 파이는 아쿠아를 본 게 이번이 처음이었던가?

라그나로스와 비슷하나 물로 이루어져 있는 아쿠아가 신기한지 대번에 책상 위로 날아드는 파이였다.

그리고 처음에 꼬마 라그나로스와 조우했을 때처럼 부리로 꼬마 아쿠아의 머리를 쪼며 깐족거렸다.

“앗 차가! 앗 차가!”

화염 속에 본체가 숨겨져 있는 라그나로스와 달리 아쿠아는 전신이 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인지 아쿠아를 쪼아 대고 있다기보단 물그릇에 부리를 담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나저나 파이가 라그나로스만큼 아쿠아를 좋아하긴 할까?

라그나로스의 경우엔 쪼는 맛이 있는 데다 따뜻해서 좋아했다지만 아쿠아는 정반대다.

쪼는 맛이 없는 데다 차갑기까지 하다. 라그나로스와 달리 아쿠아를 꺼려 할지도 모른다.

하나 루크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걱정과 달리 파이는 아쿠아의 몸을 관통해서 지나치길 반복하며 혼자만의 물놀이를 즐겼다.

“쬐끄만데 차가워! 쬐끄만데 차가워!”

이 녀석은 그냥 작으면 다 좋아하는 건가.

어쩌면 레이아도 작아서 좋아하는 걸지도.

이제야 한 가지 의문이 풀린 기분이다.

때마침 문 쪽에서 노크 소리가 울리며 레이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전하, 레이아예요. 들어가도 될까요?”

요즘 그녀는 비행 부대 대장으로서 비행 훈련을 도맡으면서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루크의 업무를 돕고 있다.

그녀가 행정에 입문하게 된 데에는 그란데 공작의 입김이 작용했다.

명색이 개국 공신의 가문 출신이니 마법 외에도 왕국에 도움이 되는 능력을 익히는 게 마땅하다고 그녀를 설득한 모양이다.

가장 직접적으로 국왕을 도울 수 있는 분야가 바로 행정 분야이니 시간이 날 때마다 왕궁에 들러 루크를 보좌하고 있다.

루크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출입을 허락했다.

“들어와.”

문이 열리며 타이트한 스타일의 녹색 제복을 입은 은발 여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항상 남색 로브를 걸친 차림만 보았던지라 평범한 제복으로 갈아입었을 뿐인데도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레이아는 절도 넘치는 동작으로 예를 갖추고선 용건부터 꺼냈다.

“거인국에서 사신이 도착했어요. 어떻게 할까요?”

“예정일은 다음 달 아니었나? 어지간히도 빨리 국보를 가지고 돌아가고 싶나 보군.”

신성 제국의 사절단이 다녀간 직후 루크는 곧바로 거인국에 사신을 보냈다.

용건은 다름 아닌 ‘겐크 왕국 시절 맺었던 불가침 조약의 해지’, 그리고 ‘서로 담보로 맡겨 두었던 볼모와 국보의 교환’이었다.

조만간 대답을 들려주겠다는 말과 함께 다음 달에 사신을 보낸다 했었건만, 예정보다 한 달 일찍 사신이 도착했다.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 거인국의 사신들에겐 대회의장에서 대기하라고 전해 둬.”

“아, 다들 덩치가 커서 대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하겠더라고요. 정원으로 안내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럼 그렇게 해.”

“네. 그리고 이건 순전히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묻는 건데, 엘리나가 돌아오면 그녀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레이아가 엘리나를 부르는 호칭에서 알 수 있듯 더 이상 엘리나는 왕족이 아니다. 겐크 왕가가 몰락하면서 일개 일반인 신분으로 전락했다.

그녀를 버리면 거인국의 국보가 고스란히 루크의 손에 떨어지고, 국보를 빌미로 거인국으로부터 많은 이득을 취할 수 있다.

과연 엘리나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냐고 묻는 것이었다.

레이아의 말투에서 견제의 뉘앙스가 풍기는 건 기분 탓일까.

루크는 외투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쳐 두며 시원스레 대답했다.

“중책을 맡겨야지.”

예상하고 있었지만 내심 다른 대답을 기대했던 것인지 레이아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따로 생각해 두고 계신 바가 있겠지만 그녀를 바로 중책에 앉히면 모양새가 안 좋지 않을까요?”

“바로 중책에 앉힌다고 하진 않았어. 아랫자리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승진시킬 생각이야. 엘리나의 능력이라면 금세 치고 올라올 수 있겠지.”

“그게 아니라…….”

“무슨 말인지 알아. 하지만 카이둔 국왕과 관련된 연좌제라면 이미 해결됐잖아?”

얼마 전 신성 제국에서 카이둔 국왕 건을 두고 종교 재판이 열렸었다.

재판 결과 블린트는 유배가 확정되었으며 엘리나는 국가 간의 불가침 조약의 담보로 잡혀 있는지라 거인국과 빌로스 왕국의 외교 관계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 형벌을 내리지 않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이미 엘리나에 한하여 무죄 판결이 떨어졌으니 더 이상 그녀에게 연좌제를 적용할 수 없다.

하나 레이아는 연좌제 부분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양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아니라 전 겐크 왕국의 왕족이었던 사람을 등용하면 기존에 업무를 보고 있는 자들이 불편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내 왕궁에 그 정도로 속 좁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만?”

“그… 정말 능력 때문에 불러들이는 거 맞나요?”

“아까부터 너답지 않게 왜 그리 꾸물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확실히 말해.”

“그녀에게 사적인 감정을 품고 계신 게 아닌가 싶어서요.”

평소답지 않게 말을 빙빙 돌린다 싶었는데 결국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과거에 루크와 엘리나 사이에 스캔들이 터진 적이 있으니 사적인 감정 때문에 등용한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괜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확실하게 말해 둘 필요가 있었다.

“어디까지나 엘리나의 행정 업무 능력을 인정하기 때문에 불러들이는 것이야. 사심은 일체 없어.”

“역시 그렇죠?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 전하가 사적인 이유로 인재를 등용할 리가 없는데 말이죠.”

“아무리 나라도 왕비 후보란 이유만으로 중책을 맡기진 않아.”

“전하는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하시니 당연한… 네?”

“왕비 후보 말이야. 이제 슬슬 고려하기 시작해야지. 뭐, 아직까지 이 정도면 결혼해도 나쁘지 않겠다 싶은 사람은 너랑 엘리나 정도밖에 없더라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폭탄 발언인지라 레이아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주변에서 그렇게 장가 좀 가라고 애원해도 코웃음 치며 무시했던 사람이잖은가.

심지어 후보 중에 자신이 섞여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지라 충격이 배가 되었다.

루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걸음을 옮기며 문을 열었다. 그러면서 바깥으로 향해 손을 저으며 자리를 비워 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잡담은 여기까지. 일할 시간이야, 레이아 보좌관. 거인국 사신들에게 가서 정원에서 대기하라고 전해 둬.”

“아… 아, 네. 그래야죠. 네, 그럴게요.”

어지간히 충격이었는지 고장 난 호두 까기 병정처럼 딱딱한 움직임으로 걸어 나가는 레이아였다.

책상 위에서 레이아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파이가 파란 눈을 깜빡이며 말하길.

“죽창! 죽창!”

그에 루크는 그만 깐족거리란 의미에서 파이의 이마에 대고 검지를 튕겼다.

* * *

거인국과 빌로스 왕국 간의 협상은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겐크 왕국이 멸망하면서 사실상 불가침 조약은 무용지물이 되었기에 더 이상 서로 담보를 잡아 두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고로 거인국에서 먼저 엘리나를 돌려보내면 그 후에 빌로스 왕국이 거인국의 국보를 돌려주기로 약속했다.

그리하여 엘리나는 약 2년간의 볼모 생활을 마치고 빌로스 왕국으로 향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후우, 이제 이 지긋지긋한 볼모 생활과도 안녕이네. 얼마나 바뀌었으려나.”

볼모로 잡혀 있는 동안 이만저만 고생한 게 아니다.

물과 음식이 몸에 안 맞는 건 기본이고 거인들은 기본적으로 걸음 소리가 커서 지내는 내내 생활 소음에 시달려야 했다.

거기다 어차피 돌아갈 사람이란 인식 때문인지 모두가 차갑게 대하는 통에 서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버텨 냈다.

볼모 생활만 끝나면 루크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그간 지겹게 따라붙던 왕족이란 족쇄가 벗겨져 나갔으니 이번에야말로 가진 능력을 한껏 펼칠 수 있으리라.

기다림이 길었던 만큼 기대도 한껏 부풀어 오른지라 돌아가는 내내 지루할 틈이 없었다.

하나 말이 씨가 된다고 그녀가 볼모로 잡혀가기 전에 했던 말은 아직까지도 유효했다.

-이쯤 되면 평생 고통받는 팔자로 태어난 게 아닐까 싶어요.

사건은 국경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터졌다.

그녀가 타고 있는 마차와 볼모 호위를 위해 파견된 거인 호위단이 인적 드문 산길로 들어선 순간.

능선 위에서 검은색 구체가 날아들며 마차 뒷바퀴에 직격했다.

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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