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146화 많다! 크다! 넓다!(1)
엘리나를 습격한 범인은 데메그리 교나 신성 제국,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거인국 호위단을 격파할 실력자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루크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자들은 그들밖에 없다.
혹시라도 습격자의 배후에 데메그리 교가 있다면 마물을 감지하는 능력을 가진 자의 동행은 필수다.
고로 이번 일에 가장 적합한 동행자는 레이아밖에 없었다.
레이아는 그란데 공작으로부터 루크의 말을 전달받고선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전하는 국왕이 되어서도 여전하시네요.”
“나로선 아캄프와 라샤 조합도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전하께서 꼭 자기가 직접 가겠다고 하시더구나.”
“그 두 사람도 괜찮긴 하죠. 둘 다 마나마스터고 티격태격하는 것치곤 사이가 좋으니까요. 그래도 전하께서 직접 움직이시는 게 더 확실하잖아요? 이왕 하는 거 확실하게 처리하는 게 좋죠.”
“아무튼 흔치 않은 기회이니 아예 기정사실을 만들어 버리거라.”
그란데 공작도 레이아를 통해 루크가 최근 들어 왕비 후보를 물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이제서야?’란 생각이 들긴 한다.
루크의 나이가 벌써 30대 중반을 바라보고 있다.
최근에는 왕족, 귀족 가릴 것 없이 20대 초중반에 결혼하는 추세였다. 이르면 10대에도 식을 올리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 면에서 루크는 한참 늦은 편이었다.
후계자를 키우려면 못해도 20년은 걸리니 지금 당장 후손을 본다고 해도 루크가 환갑에 이르러서야 겨우 왕세자를 둘 수 있다.
이제는 그란데 공작 개인의 희망이 아닌,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혼사를 서둘러야 했다.
레이아는 옷장에서 남색 로브를 끄집어내며 일부러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놀러 가는 게 아니라 일하러 가는 거예요. 전하가 어떤 성격인지 잘 아시잖아요.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면 가차 없이 내치실 분이죠.”
“거참, 내 딸이지만 어쩜 저리 융통성이 없는 건지 원. 서로 마음 통하는 거 확인했으니 확 저질러 버리면 되지 뭘 그리 망설이느냐.”
“아이참, 알아서 할 테니까 저리 가요.”
“왕녀님껜 미안한 말이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후보는 너밖에 없잖느냐. 그러니 안심하고 저질러 버리거라. 뭣하면 내가 조언을…….”
“아! 정말! 나가요, 나가! 빨리빨리!”
기어코 그란데 공작을 쫓아낸 후에야 느긋하게 여행 채비를 갖출 수 있게 된 레이아였다.
이미 비공식 작전을 수행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짐을 싸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물건은 최대한 간편하게, 부피가 작으면서도 가벼운 물건 위주로 챙겼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인간의 나라가 아닌 타 종족의 나라로 여행을 가는 것인 만큼 현지 문화에 맞춰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순조롭게 짐을 싸던 중 레이아는 의도치 않은 난관에 부딪혔다.
“이번에는 다른 로브를 입고 갈까? 아냐, 그래도 비공식 작전이니 역시 눈에 안 띄는 남색 로브를 입고 가는 게 나을지도… 으으, 어쩌지.”
예전부터 루크를 의식하고 있긴 했으나 너무나도 격이 다른 탓에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는 감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접근해도 된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머리가 복잡해졌다.
옷은 뭘 입어야 할까? 피부가 엉망인데 이상하게 보진 않을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나도 조금은 그쪽 방면의 지식을 익혀 두고 가야 할까?
있는 지식 없는 지식을 총동원하여 경우의 수를 나열하다 보니 금세 머리에 열이 올랐다.
결국 정신을 차리고 보니 레이아의 고민은 원점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서 로브는 뭘 입고 나가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문 쪽에서 그란데 공작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아빠는 베이지색을 추천한다.”
지금까지의 중얼거림이 모두 새어 나갔단 사실에 레이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조금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아버지의 관심 속에서 레이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공작이 되어서도 어쩜 저리 한결같을까. 내가 정말 못 살아.”
* * *
며칠 후 루크는 레이아와 함께 빌로스 왕궁에서 빠져나왔다.
부재중의 행정 업무는 그란데 공작에게 위임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부재중인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한 정보 통제를 지시해 두었다.
이전에는 드골이 도맡던 업무를 그란데 공작이 이어받게 된 셈이다.
얼마간 이동하여 빌로스 왕궁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도착했을 무렵 루크는 지도를 펼치며 작전 개요를 설명했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이번 작전은 볼모 습격 사건의 진범을 찾는 게 목적이야.”
“범인은 신성 제국일 수도 있고, 데메그리 교일 수도 있다고 하셨었죠.”
“라샤가 물어 온 정보에 따르면 거인국에선 제대로 수색조차 하지 않았다고 해. 그러니 파이를 타고 국경을 넘어서 곧장 범행 현장부터 들릴 거야. 거기서부터 단서를 찾자고.”
“사건이 발생한 후로 한참이 지났는데 단서가 남아 있을까요?”
“무턱대고 움직일 정도로 계획성이 없진 않아. 사전에 라샤가 협력자를 구해 뒀다고 했으니 현지에 가서 물어보자고.”
현장까지 파이를 타고 이동할 예정이다. 고공으로 날아올라 이동하면 굳이 검문을 거치지 않아도 국경을 넘을 수 있다.
지금쯤 거인국에선 루크를 죽일 놈 취급하고 있을 테니 최대한 정체를 들키지 않는 선에서 움직이는 게 좋다.
루크는 로브 가슴팍을 검지로 톡톡 두드리며 안주머니 세입자를 불렀다.
“어이, 파이. 일어나.”
라그나로스, 아쿠아 정령석과 함께 안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던 파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리고 잠이 덜 깬 것처럼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곧 레이아를 포착했다.
“레이아! 레이아!”
격하기 그지없는 파이의 인사에 레이아가 흐뭇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파이.”
작은 새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도 힘이 여간이 아닌지라 금세 루크의 손에서 빠져나가는 파이였다.
파이는 레이아의 어깨 위에 앉으며 그녀의 뺨에 부리를 비비며 애교를 부렸다.
게다가 새 주제에 후각이 얼마나 민감한지 레이아의 어깨에 앉은 것만으로 금세 몸에서 풍기는 냄새를 판별해 냈다.
“사과 냄새! 사과 냄새!”
“오랜만에 향수를 뿌렸거든.”
루크는 이동 중에 사용할 2인용 등자를 준비하다가 레이아의 말을 듣고선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향수 같은 거 안 뿌리지 않아?”
“아, 그게 말이죠. 선물 받은 게 있어서요. 이왕 받았는데 안 쓰면 아깝잖아요?”
“남자야?”
“네? 아뇨, 절대 아니에요. 저번 생일 때 비행 부대 대원들이 선물해 준 거예요.”
“그래? 그거 우연이군.”
“어떤 부분이요?”
“내 방에 있는 사과향 향초를 보고 향수를 고른 게 아닐까 싶었거든.”
일순 레이아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고민 끝에 결국 빛바랜 남색 차림에 장신구를 일체 걸치지 않은, 기존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루크가 딱히 치장에 신경 쓰는 타입도 아니고, 오히려 일하러 나가는 데 치장하고 나서면 더 안 좋게 볼까 싶어 가장 무난한 차림을 택한 것이었다.
그래도 향수 정도는 괜찮을 거라 판단하여 직접 시내까지 가서 골랐다.
이전에 보고서 전달차 침실에 들렀을 때 맡았던 향초 냄새까지 고려하면서 말이다.
레이아는 향수 냄새가 그의 마음에 든 것보다, 선물을 받았다고 말하자마자 남자한테 받았냐고 물어봐 준 것 때문에 입가에 미소가 피어 나왔다.
푸석푸석한 카스텔라 속 얇은 크림이 유달리 달게 느껴지는 것처럼 무심함 속에서 은은히 배어 나오는 질투가 기쁘기 그지없다.
2인용 안장의 끈을 풀어 헤친 루크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아 참, 파이가 유독 널 좋아하는 이유를 알아냈어.”
“그래요? 저한테도 알려 주세요.”
“작은 걸 좋아하나 봐.”
작다는 말에 레이아의 어깨가 다시 한 번 들썩였다.
이번에는 아까와 다른 의미의 들썩임이었다.
그녀는 남색 로브의 가슴팍 부분을 힐끗 내려다보고선 한껏 부정했다.
“이 정도면 평균이에요.”
“평균보다 조금 작지 않아?”
“실제로 본 적도 없으시면서…….”
“매일 보는데 그 정도야 알지.”
“매일요?”
“의외군. 키에 민감한 성격인 줄은 몰랐는걸.”
“네? 아~ 키를 말씀하시는 거였구나. 그거라면 납득이 가네요.”
“무슨 얘기인 줄 안 거야?”
“아하하, 당연히 키 얘기죠. 자자, 시간도 늦었는데 빨리 출발하죠. 파이도 얼른 준비하자.”
떠밀리듯 지면에 착지한 파이가 날개를 퍼덕이며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갔고, 루크가 파이의 등에 안장을 걸치며 위에 올라탔다.
앞자리엔 루크, 뒷자리엔 레이아.
더불어 라그나로스를 소환하여 비행 중 온도 조절을 부탁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뜨끈뜨끈하게 데워진 안장에 몸을 걸친 채로 거인국 국경을 넘기 위한 장거리 비행에 나섰다.
* * *
고공 비행 덕에 두 사람은 소리 소문도 없이 국경을 넘는 데 성공했다.
대륙 북서부 지방의 돌출된 반도 지역 전부가 거인국 영토이며 예로부터 윈터 랜드라 불리던 지역이었다. 지명에서 알 수 있듯 1년 365일 내내 겨울인 지역이다.
거인국보다 더 북쪽에 있는 신성 제국도 사계절이 엄연히 존재하건만, 유독 거인국만 1년 내내 춥다.
그 이유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누군가는 블루 드래곤 간에 전쟁이 벌어졌던 여파 때문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1차 마계 침공 때 죽은 마계 4대 장군의 저주 때문에 봄이 찾아오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루크는 상공에서 라샤에게 건네받았던 지도를 펼쳐 들었다.
“지도대로라면 이 부근일 텐데 말이지.”
지도에 표시된 장소를 찾아내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습격 장소였던 산기슭에 착륙한 두 사람은 가장 먼저 현장 주변을 살폈다.
혹시나 싶어서 현장을 살펴보았으나 이렇다 할 단서를 찾진 못했다.
습격 사건이 벌어진 직후에 거인국에서 잔해를 치워 버린 데다, 사건 이후로 상당한 시간이 흐른 터라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하더라도 지워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각자 흩어져서 현장을 살펴보던 중 레이아가 산길 한복판으로 나가더니 루크를 불렀다.
“루크 씨, 여기예요. 여기 마법의 흔적이 남아 있어요.”
비공식 작전 중에는 호칭을 달리하기로 했었기에 전하 대신 이름을 부르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루크는 걸음을 옮겨 레이아가 있는 지점으로 이동했다. 마차의 잔해는 사라졌어도 습격 당시에 생긴 폭발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길 한복판에 움푹 패어 있는 구덩이를 본 루크가 구덩이의 깊이를 가늠했다.
“폭발형 마법이고 위력은 5서클 마법사 수준쯤 되겠군.”
5서클 마법사만으로 거인 호위단을 처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5서클 마법사 말고도 강력한 조력자가 있었던 듯하다.
거인 호위단의 수준을 감안하면 최소 마나마스터 수준의 조력자가 있지 않았을까?
레이아도 흔적에서 단서를 발견했는지 손으로 땅을 훑으며 알아낸 바를 읊었다.
“적중률이 뛰어난 마법사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여길 보세요. 폭발 흔적 위에 윈드 커터 흔적이 남아 있어요. 처음에 마차를 먼저 공격하고 그 후에 호위단과 싸운 게 틀림없어요.”
“처음엔 엘리나만 죽이고 빠지려다가 실패한 건가.”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확인 사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호위단을 상대한 거라고 봐야겠죠.”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암살자는 아니라는 거군.”
“범인은 암살자를 고용할 수 없는 집단에 속해 있다고 봐야겠죠.”
돈이면 무슨 짓이든 하는 암살 길드에도 금기란 게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데메그리 교의 의뢰는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신성 제국이라면 절대로 자기네들 사람을 암살에 투입하지 않을 것이다.
제아무리 루크가 마음에 안 든다 하더라도 그간 쌓아 올린 이미지를 망쳐 가며 위험한 작전을 속행할 만큼 우둔한 작자들은 아니다.
차라리 전문 암살 길드에 맡겼으면 맡겼지, 암살에 익숙하지 않은 자를 파견할 리가 없다.
소거법에 따라 용의자는 하나로 좁혀졌다.
“범인은 데메그리 교였군.”
“그만큼 당해 놓고 질리지도 않나 보네요.”
“주제 파악을 할 지능이 있을 정도로 똑똑한 집단은 아니니까.”
거인국 내에 숨어 있는 데메그리 교 잔당들을 소탕하다 보면 단서를 끌어낼 수 있을 거다.
단서가 부족한 만큼 말단부터 차례차례 처리하는 과정을 밟게 될 듯하다.
레이아는 벙어리장갑을 마주 비비며 하얀 입김을 내뿜었다.
“후우, 데메그리 교가 어디 있는지부터 찾아야겠네요. 분명 협력자가 데메그리 교와 관련된 정보를 지니고 있다고 했었죠?”
“라샤가 그리 말하긴 했었지. 사전에 미리 만날 약속을 잡아 뒀다고 했는데 아직 안 보이는군.”
라샤의 보고에 따르면 지정한 시간에 사건 현장에서 합류하기로 약속을 잡아 뒀다고 했다.
그녀가 엘프의 숲에서 빠져나와 떠돌이 생활을 할 무렵에 알게 된 지인이라 했으니 신용도에 있어선 문제될 것이 없었다.
약속 시간이 다 되어 갈 즈음 능선 너머에서 심상치 않은 낌새의 포효가 들려왔다.
“우오오오오!”
쿠웅! 쿵! 쿠우웅!
포효의 여운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강한 타격음이 전해져 왔다. 포효와 타격음은 능선 너머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을 시사했다.
그와 동시에 레이아가 무언가 감지한 듯 표정을 달리하며 마나를 끌어 올렸다.
“마물의 기척이 느껴져요! 능선 너머에 마물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