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148화 많다! 크다! 넓다!(3)
크다! 많다! 넓다!
거인국의 문화는 이 세 단어로 압축할 수 있었다.
사용하는 물건은 하나같이 크고 먹는 양은 인간의 수십 배나 되며 집은 천막인데도 웬만한 귀족 저택보다 넓다.
그나마 인구수가 적으니 망정이지 인구수까지 많았다면 자연이 거인의 소모량을 따라가지 못했을 거다.
다비드가 소속된 싸이클롭스 부족의 경우 부락 전체에 500가구가 살고 있다. 그럼에도 식량 소모량은 인간 왕국 대도시 수준에 달했다.
“으으~ 음냐.”
옆에서 들려오는 옹알이에 루크는 저도 모르게 잠에서 깨어났다.
옆에선 레이아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자고 있었다.
저리 자면 숨은 제대로 쉴 수 있는 걸까?
이젠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레이아의 잠버릇이 나쁜 건 이전에 둘이서 여행할 때부터 늘상 보아 왔던 광경이다.
침낭에서 자면 자는 동안 어느새 저 멀리 굴러가 있고, 어쩌다 한 번씩 2인실에서 같이 잘 때도 수면 내내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되레 루크 쪽에서 잠이 깰 때가 많다.
하늘이 아직 어슴프레한 걸로 봐선 새벽 5, 6시쯤 된 것 같다.
어차피 평소에도 이 시간에 일어나는 편이기에 다시 눈을 감는 대신 팔로 머리를 받치며 옆으로 누운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자고 있는 레이아를 찬찬히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특이한 녀석.”
루크는 잠시 레이아를 살피다가 이불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어젯밤 싸이클롭스 부족에 도착하여 다비드가 제공한 빈 천막에서 하룻밤을 보낸 참이다.
거인의 덩치에 맞춰 제작된 천막이다 보니 안에 있는 물건의 크기 또한 남달랐다.
침대만 하더라도 어지간한 킹사이즈 침대 9개를 3×3 형태로 붙여 놓은 수준의 크기를 자랑했다.
그 때문인지 한 침대에서 수면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같이 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불에서 빠져나온 루크는 가볍게 마나 호흡을 시행했다.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한 번은 마나 호흡을 하는 편이다. 아무리 많은 마나를 가지고 있고,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 하더라도 힘을 유지하려면 꾸준한 관리가 필요하다.
한 번 감량했다고 체중이 영원히 유지되는 건 아닌 것처럼, 그랜드마스터의 경지를 유지하려면 회로 관리는 필수였다.
잠시 후 마나 호흡을 마치고 눈을 뜬 루크는 옆에서 레이아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뭐 할 말이라도 있어?”
“아뇨,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었어요.”
“더 잘 거냐?”
“이제 슬슬 일어나야죠. 근데 이불 무겁지 않았어요? 하도 무거워서 몸을 바깥으로 빼내서 잤다니까요.”
“그것보다 난 화로의 불길이 신경 쓰여서 잠이 와야 말이지.”
솜도 모이면 무겁다고 이불이 크다 보니 무게 또한 만만찮았다.
거기다 밤새 춥지 말라고 다비드가 피워 놓고 간 화톳불은 캠프파이어를 방불케 하는 크기인지라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중간에 불을 끄고 라그나로스를 소환하여 새벽까지 온기를 유지하며 잤었다.
아침에 다비드가 직접 식사를 가지고 찾아오기로 했으니 그전에 세수를 마쳐 둬야 한다.
루크는 파란색 정령석을 꺼내어 소량의 마나를 불어넣었다. 마나가 스며듦과 동시에 정령석이 투명한 액체로 변하면서 작은 소녀의 형상을 띠었다.
“아쿠아가 주인님께 인사드립니다.”
소환되자마자 파이의 위치부터 확인하는 라그나로스와 달리 아쿠아는 무척 차분했다.
왜냐하면…….
“쬐끄매! 쬐끄매!”
달려들어 놀려고 해도 아쿠아의 몸을 관통하여 지나칠 뿐 아쿠아 본인에겐 아무런 영향도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아쿠아의 몸을 지나칠 때마다 이물질이 떨어져 나가 깨끗해지니 파이 본인도 시원해서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루크는 아쿠아에게서 떨어질 생각을 않는 파이를 한참 바라보다가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비키라고 말을 꺼내 봤자 입만 아프니 차라리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게 속 편했다.
붉은색 정령석을 꺼내어 마나를 부여한 후에 베개 위로 던지자 파이가 번개 같은 속도로 반응하며 냅다 베게 위로 뛰어올랐다.
라그나로스는 난데없는 부리 세례 속에서 오늘도 억울함을 호소했다.
“야! 이 앵무새 녀석 돌보는 역할 떠넘기지 말랬지! 어휴, 한때 잘나가던 몸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런 극한 직업에…….”
“후후후, 라그. 여전히 즐겁게 지내고 계시네요.”
“응? 아쿠아 네가 왜 여기 있어?”
“일이 끝났으니까 돌아왔죠. 제가 싫으세요?”
“어, 싫어.”
“후후, 라그다운 대답이네요.”
조신하게 웃는 아쿠아를 두고 라그가 시뻘건 화염을 일렁이며 콧방귀를 뀌었다.
루크는 파이가 라그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에 세수를 끝내고자 했다.
“아쿠아, 오늘도 부탁해.”
“네, 오늘은 어떤 스타일로 해 드릴까요?”
“적당히 깔끔한 느낌으로.”
이번 여행 중에 세수며 복장 관리는 전부 아쿠아에게 맡기고 있었다.
아쿠아의 세척 능력은 단순히 물을 끼얹는 것과 달리 꼼꼼하게 피부의 이물질을 제거해 주기에 한번 케어를 받고 나면 일반 세수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
아쿠아는 자신의 몸을 넓게 펼쳐 물의 장막으로 변형하고선 루크의 몸을 휘감았다.
이내 곧 장막이 걷혔고 루크의 모습은 잠에서 깬 부스스한 몰골에서 세안을 마친 말끔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어서 레이아도 아쿠아의 효과를 받아 단장을 마쳤을 무렵 천막 입구에서 다비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친구들, 식사 가져왔어. 일어나 있지?”
“안 그래도 부르려던 참이었어. 들어와.”
천막 입구 부근이 걷히면서 다비드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들고 온 쟁반 위에는 큰 그릇 1개와 작은 그릇 2개가 담겨 있었다.
다비드는 불이 꺼진 화로 주변에 그릇을 하나씩 놓으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라샤가 썼던 식기를 찾으려니까 없더라고. 하는 수 없이 종지 그릇에 담았으니 불편하더라도 이해해 줘.”
거인 입장에서나 종지 그릇이지 인간 입장에선 일반 접시와 다를 바 없는 크기였다.
더불어 루크와 레이아가 쓸 수 있는 포크와 스푼이 없는지라 손으로 먹을 수 있는 빵과 야채, 구운 닭 다리 등을 준비하는 등 곳곳에 세심한 배려가 깃들어 있었다.
루크는 왕궁에선 감히 실행할 수 없는 호쾌한 동작으로 닭 다리를 뜯으며 일 얘기를 꺼냈다.
“데메그리 교에 대한 단서를 쥐고 있었다고 했었지. 그 부분부터 들어 볼까?”
대형 고기 완자를 씹던 다비드가 입에 있는 음식물을 모두 삼킨 후에야 입을 열었다.
“혹시 환상초라고 알아?”
“씨앗을 먹으면 환각을 보여 주는 풀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긴 해.”
“요즘 떠돌이 거인들 사이에서 환상초의 씨앗을 갈아 만든 마약이 돌고 있는 모양이야. 그리고 마약이 돌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거대 마물이 나타나기 시작했어.”
“마물 소재가 될 거인을 확보하기 위해서 일부러 마약을 퍼뜨린 거로군.”
“적어도 나는 그렇게 추측하고 있어.”
“대족장에게 건의는 해 봤고?”
“물론 했었지. 하지만 실제로 마약 판매 루트를 족쳐 보니 아무 상관없는 잔챙이만 우수수 쏟아져 나오더군.”
거인국이라고 거인만 사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비롯하여 엘프, 오크, 용인 등등 수많은 타 종족들이 거인국에 들어와 살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끼리 모여서 마을을 이루고 있고 거인들은 그들이 모여 있는 마을을 두고 ‘난쟁이 타운’이라 부르고 있었다.
얼마 전 다비드는 환상초 씨앗과 거인의 마물화 사건 사이에 연관이 있을 거라 여겨 대족장에게 조사를 건의했고, 실제로 조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조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난쟁이 타운에 있던 마약 범죄 일당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은 데메그리 교와 아무런 관계없는 조무래기 범죄자들에 불과했고, 결국 마약과 거인의 마물화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결론이 떨어지면서 수사가 종결되었다고 한다.
루크는 다비드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질문을 날렸다.
“결론은 놈들을 족쳤는데도 계속 마약이 유통되고 있다는 거지?”
“그렇지. 근데 대족장 측에선 이번에도 조무래기라고 여기고 있어. 그래서 난쟁이 타운에 있는 인간들에게 직접 놈들을 잡으라고 명령을 내려놓기만 하고 전쟁 준비에 매진하는 중이지.”
“아마 처음에 잡았다는 마약 판매자들은 더미일 가능성이 높겠군.”
“나도 그렇게 생각해. 데메그리 교는 물건만 제공하고 유통과 판매는 전적으로 아무 상관없는 자들에게 떠넘긴 걸 테지.”
“효과적으로 마약을 퍼트릴 수 있고, 원금 회수가 바로바로 가능하고, 만약에 대족장이 개입해도 잡히는 건 자기네들과 아무 상관없는 자들뿐이니까 그야말로 일석삼조로군.”
이 세상에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특히 거인국에 거주하는 이들은 자국에서 추방당하여 우여곡절 끝에 거인국까지 흘러 들어온 자들이다.
데메그리 교 사제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평범한 사람인 척하며 ‘물건을 싸게 줄 의향이 있다.’라고 권유하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쌍수 들고 환영할 부류였다.
인생의 내리막길에 이른 자들에게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만큼 달콤한 제안도 없으니 말이다.
지금도 데메그리 교와 아무 관계없는 잔챙이들이 좋아라 하며 마약을 팔아 대고 있을 것이다.
이에 다비드는 역할 분담을 제안했다.
“우리 거인들은 몸집이 커서 난쟁이 타운에서 적극적인 조사가 불가능해. 그러니 데메그리 교 수색은 너희들이 전담해 줘. 대신 우리는 최대한 전쟁을 늦출 수 있도록 시간을 끌겠어.”
거인이 인간의 마을에 들어가면 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주목을 받게 된다.
그러니 여기선 루크와 레이아만 조사에 나서는 게 나았다.
그 부분에 있어선 루크도 이견이 없었다.
“자국에서 추방당한 자들이 모여서 만든 마을이라… 그리 질이 좋은 마을은 아니겠군.”
루크는 상당히 거친 여정이 될 것을 예감하며 난쟁이 타운으로 떠날 채비를 갖췄다.
* * *
난쟁이 타운으로 이동하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진 않았다.
다비드가 제공한 지도를 참고하여 비행한 결과 반나절 만에 난쟁이 타운에 도착했다.
난쟁이 마을이라길래 작은 규모일 줄 알았는데 막상 도착해서 살펴보니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는 도시였다.
뭐, 거인의 입장에선 부락의 반도 안 되는 규모이니 마을이라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도시 내부는 무법천지였다.
관리하는 귀족이 없다 보니 모든 것을 힘으로 해결하고 있었고 길거리 곳곳에선 심심찮게 주먹 다툼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어이, 어이! 뭐하는 거야! 일어나서 싸워! 싸우라고!”
“잘했어, 죠니! 네 덕분에 5만 루소 벌어 간다!”
거리에서 싸움만 났다 하면 구경꾼들이 몰려와 저희들끼리 돈 내기를 하기 바빴다.
돈 내기에서 진 놈은 돈을 안 내려고 튀다가 걸려서 다시 싸움이 벌어지고, 새로 열린 싸움판에 다시 돈 내기가 걸리고… 질서와 규칙은 개나 줘 버렸는지 도시 전체가 난잡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소매치기와 호객 행위가 어찌나 많은지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루크는 길거리보단 골목 안쪽을 주로 관찰하며 단서 찾기에 나섰다.
“일단 환상초 씨앗을 파는 놈부터 찾아보자고.”
“아직까진 의심 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네요. 거인들한테 한번 당한 것 때문에 몸을 사리고 있는 걸까요?”
“이래서 정리를 할 땐 한번에 깔끔하게 해야 한단 말이지.”
거인들이 어설프게 들쑤신 탓인지 한참 동안 골목 안을 돌아다녔는데도 단서를 잡지 못했다.
현지에 가면 현지의 법을 따르라고 했던가.
돌아다니는 걸론 부족하다 여겨 좀 더 적극적인 수를 취했는데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뒷골목 노숙자에게 평범하게 물어보기도 하고, 호객 나온 창부에게 정보료를 주며 물어보기도 하고, 시비를 걸어오는 건달을 힘으로 제압하며 반협박식으로 정보를 뽑아내려고도 해 봤다.
그러나 다들 모르쇠로 일관할 뿐, 이렇다 할 단서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있건만 수확은 하나도 없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방법을 달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정공법으론 무리겠군.”
“차라리 미인계를 쓸까요?”
“관둬. 그거 아니라도 쓸 방법은 많아.”
“후후, 알겠어요. 루크 씨가 하지 말라면 하지 말아야죠.”
그리 특별한 대답을 한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좋은지 레이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루크는 무심한 표정으로 레이아의 볼을 쭈욱 잡아당겼다.
“아야야, 저 뭐 잘못했어요?”
“아니, 그냥. 웃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아고, 볼이야. 달리 방법이 있으신 건 맞죠?”
확인을 요하는 질문에 루크가 볼을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이쪽에서 찾아가는 게 무리이니 저쪽에서 알아서 기어 나오게 만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