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150화 오순도순 저승 땅이나 밟아보도록(1)
에레키 조직의 두목인 조슈아는 시가의 끄트머리를 잘라 내며 불을 붙였다.
치익!
“개당 50만에 300알이면 1억5천만인가. 이번 거래만 끝나면 당분간 휴식기 좀 가지자고. 모두 어때?”
“저희야 좋죠. 이 빌어먹을 추운 땅 말고 따뜻한 곳에 가서 요양 좀 합시다.”
“요양 좋지. 쌔끈한 간병인들을 불러다가 돌봐 달라고 하면 아주 끝내주겠군.”
얼마 전에 거인들이 들이닥쳤을 때 조슈아를 비롯한 대부분 조직원은 몸을 숨기는 데 성공했으나 하필이면 자금 운반책이었던 자들이 거인들에게 붙잡히는 탓에 지금까지 벌었던 수익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거인들 말로는 데메그리 교의 끄나풀인 것 같아서 들쑤셨다는데 조슈아의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약을 파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약쟁이에겐 약쟁이만의 고충이 있다고!
언제 또 거인들이 들쑤실지 모르니 대놓고 장사를 하지도 못한다.
한때 잘나간다고 밑에 사람을 수십 명씩 두고서 약을 팔았었는데 이젠 인건비 감당이 안 되어 3명 빼고 다 잘랐다.
그러니 이번에 난쟁이 마을에 나타난 호구 거부에게 거하게 뜯어내야 한다.
조슈아는 거금을 펑펑 쓰며 유흥을 즐길 생각에 실실 웃으면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후~ 그나저나 이것들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급한 거래라고 그렇게 강조했건만.”
환상초 씨앗을 공급해 주는 이들을 만난 건 아직 조슈아가 화대 수금이나 하러 다니던 양아치 시절 때였다.
어떤 노인이 찾아와서 마약 장사를 해 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고, 자기는 몸이 불편해서 발품 팔아야 하는 일은 못하기 때문에 브로커 역할을 대신할 사람을 찾고 있다고 했다.
조슈아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무법 지대인데 마약 좀 판다고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렇게 생산자에게 제공받은 씨앗을 떠돌이 거인이나 난쟁이 마을 주민에게 팔면서 지내왔다.
한창 시가를 태우며 기다리던 중 황야 지평선 부근에 거무스름한 실루엣이 아른거렸다.
실루엣은 곧장 조슈아 일행이 있는 장소로 다가왔고, 이내 말수레를 모는 노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노인은 조슈아 일행의 지척에서 말수레를 세웠고 등이 굽은 몸으로 어기적어기적 지면에 발을 디뎠다.
“저번 물건을 받아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벌써 다 팔았나? 요즘 장사가 잘되나 보구먼.”
“왜 이렇게 늦었습니까? 제가 급한 거래라고 오전 내로 가져다 달라고 했지 않습니까.”
“이 사람아, 나도 갑자기 연락을 받아서 부랴부랴 나온 걸세. 알 까는 작업이 어디 쉬운 줄 아나.”
“이참에 우리 진지하게 얘기 좀 합시다. 몸도 불편하신데 농장을 넘기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허허허, 꿈 깨게. 내 농장은 자네들이 올 곳이 못 된다네.”
“거참, 우리 사이가 어디 보통 사이입니까? 영감님은 따박따박 임대료 챙기고 우린 우리대로 편하게 물량을 확보하고. 서로 좋은 일에 마냥 빼지만 말고 조금은 고려해 주십쇼.”
“허허허, 한번 고려해 보… 헉!”
소탈하게 웃던 노인이 갑자기 헛숨을 들이마셨다.
노인의 시선은 조슈아의 어깨 너머 후방에 꽂혀 있었고 노인의 동공이 크게 흔들리는 부분에서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조슈아는 자신의 등 뒤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닫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뒤를 돌아보니 웬 금발 사내와 은발 여인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에겐 낯선 얼굴이었으나 카프와 호위들은 금세 두 남녀를 알아보았다.
“응?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누군데 그래?”
“두목, 저 사람입니다. 우리한테 씨앗 300알을 구매하기로 했던 부자 말입니다.”
사내의 정체를 듣고 나니 조슈아도 슬슬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1알당 10만 루소짜리를 30만 루소에 사고 그것도 모자라 자기가 먼저 50만 루소에 사겠다던 호구 부자가 어째서 여기에 있단 말인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와중에 노인이 경기를 일으키듯 부르르 떨며 심상치 않은 반응을 내비쳤다.
“아, 아냐. 마, 말도 안 돼. 저자가 어떻게 여기에… 그럴 리가 없어.”
“영감님, 뭘 그렇게 무서워하십니까? 혹시 저자랑 아는 사이입니까?”
“나, 날 잡으러 왔어. 날 잡으러 온 게야.”
저승사자라도 마주한 것처럼 겁에 질려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는 노인이었다.
날 잡으러 왔다고 중얼거리는 것에서 처음부터 노인을 노리고 접근해 온 자임을 알 수 있었다.
거인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남에게 말하기 힘든 과거를 지니고 있다.
노인도 그중 한 명이니 무언가 일을 저지르고 거인국에 왔을 거다.
하지만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쳐 왔다 하더라도 보통은 거인국까지 수사망을 좁혀 오진 않는다.
고로 타국의 귀족이나 기사는 아닐 터.
기껏해야 원한을 품고 이 먼 곳까지 쫓아온 일반인 정도로 추정된다.
조슈아 입장에선 거래 자체가 속임수였던 데다 자신의 돈줄인 씨앗 생산자를 해치러 온 사람인 셈이다.
방금까지 사치스러운 휴가를 상상하며 즐거워하고 있었건만 사기였다는 걸 알자마자 1억5천만 루소를 잃은 기분이 들어 속에서 천불이 났다.
조슈아도 한때 마나유저 초급의 기사였던 몸이다.
중간에 공금 횡령이 걸려 추방당하긴 했어도 마나유저 초급이었던 실력이 어디 가겠는가.
조슈아는 눈썹을 씰룩이며 장검을 뽑았다.
“오호라, 거래는 구라고 처음부터 우릴 안내역으로 쓸 생각이었다 이거지? 참 나, 이런 엿 같은 경우를 봤나. 손님이라고 오냐오냐해 주니까 뵈는 게 없나 보구만.”
눈을 부라리며 위협을 해 보았으나 금발 사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겁을 먹기는커녕 어른들 얘기에 끼어든 아이를 다루듯 손을 휘휘 저었다.
“좋은 말로 할 때 조용히 돌아가는 걸 추천하지.”
“거참, 이 새끼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못하네.”
“그쪽을 위해서 하는 소리야. 괜히 끼어들어서 피 보지 말고 조용히 무법 지대에서 건달 놀이나 계속하도록 해.”
“이게 뒤지게 맞고 싶… 꾸엑!”
금발 사내가 한 번 더 손을 휘젓자 매직 미사일이 생성되어 조슈아에게 날아갔고 정확하게 그의 턱을 가격했다.
빠각! 빠각! 빠각!
오로지 속도에만 치중하여 사출한 매직 미사일이기에 위력은 별 볼 일 없었다. 기껏해야 주먹으로 적당히 후려치는 정도의 위력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뒷골목 건달들을 기절시키기엔 충분했다.
금발 사내, 루크는 바닥에 쓰러진 조슈아 일행의 몸을 뛰어넘으며 입을 달싹였다.
“미안하지만 너희랑 실랑이를 벌일 때가 아니라서 말이야.”
조슈아 일행이 기절하면서 조슈아 일행의 몸에 가려져 있던 노인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노인은 방금까지 등을 굽히고 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선 마부석 위로 뛰어오르고 있었다.
“이랴! 어서 출발하거라! 어서 가지 못하겠느냐! 놈이 온단 말이다! 빨리 좀 달리란 말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했던가.
한눈에 루크를 알아본 것도 모자라 스스로 데메그리 교 사제임을 입증하듯 망설임 없이 도주를 택한 노인이었다.
타깃을 그대로 보내 줄 정도로 호락호락하진 않다.
루크는 마법을 시전하여 도주로를 차단했다.
“파이어 월.”
무심하게 읊조린 영창과 함께 노인이 도주하려던 방향에 불의 장막이 솟구쳤다.
지나치는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릴 듯 사납게 일렁이는 불길 앞에서 노인은 황급히 고삐를 잡아당겼다.
“으앗! 제길!”
“히이잉!”
말이 놀라 앞다리를 번쩍 들어 올리면서 말수레가 급정거했다.
동시에 루크의 신형이 연기처럼 꺼지는가 싶더니 노인의 옆에 나타났다.
블링크로 단숨에 거리를 좁힌 루크가 해왕검을 뽑아 노인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노인이 목에 걸고 있던 비취 목걸이에 날카로운 검날이 닿으면서 목걸이 줄이 끊어졌다.
후두둑!
비즈처럼 알알이 줄에 걸려 있던 비취가 아래로 떨어지면서 노인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자글자글하게 패어 있던 주름이 매끈한 피부로 바뀌었으며 호호백발이었던 머리가 검게 물들면서 20대 청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루크는 해왕검에 마나를 부여하며 입을 열었다.
“이중 삼중으로 위장해 뒀군. 하지만 포장지가 여러 겹이라고 악취가 안 날까?”
조슈아가 거인들에게 붙잡힐 경우를 대비한 변장이었다.
다른 모습으로 위장해 두면 설사 조슈아가 씨앗 공급자의 인상착의를 분다고 하더라도 손쉽게 수사망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
급한 나머지 등 굽은 노인 연기를 잊고 허리를 세우며 도주에 나선 것이 힌트가 되었다.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간 데메그리 교 사제는 이를 악물며 오른손에 마기를 끌어모았다.
“빌어먹을 놈! 어떻게 된 놈이 우리가 가는 곳마다 나타난단 말이냐!”
같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정보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양 근거리에서 마법을 시전한 것이었다.
하나 사제의 발악을 잠자코 지켜볼 만큼 관대하진 않다.
루크는 가볍게 손목을 틀어 해왕검을 내리찍었다.
푸욱!
해왕검이 사제의 오른손에 틀어박히며 처절한 비명이 튀어나왔다.
“크아아악!”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솔직히 대답해 줬으면 좋겠군.”
“크으으, 차라리… 죽여라.”
순순히 말할 생각이 없는지 핏발이 선 눈으로 루크를 노려보는 사제였다.
아무래도 좋게 말해선 안 될 것 같다.
검 자루를 쥔 손을 조금씩 비틀자 사제의 오른손에 박혀 있던 해왕검이 손바닥 내부를 저미며 고통을 가중시켰다.
즈즈즈즉!
“크아아아악!”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아도 좋아. 스스로 말하게 해 주세요, 라고 내뱉을 때까지 어울려 주겠어.”
“크어억! 컥컥! 제길! 제기랄!”
아직 멀었다.
이걸론 죽은 엘리나도 만족하지 않을 터.
없어지지 않는 각종 흉터를 안고서 단 한 번, 그저 한 번이면 족하니 루크와 함께 나란히 걸어 보고 싶어 했던 여자다.
그 한 번의 기회를 위해 헌신도, 희생도 마다치 않은 사람이었건만.
애석하게도 세상은 그녀에게 단 한 번의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 한 번의 기회를 짓밟은 자들을 가만 놔둘 생각은 없다.
사람은 사람으로 잊고 피는 피로 씻으라 했던가.
그녀를 기리는 진혼식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즈즈즈즉!
“크아아아악!”
“끄륵… 저희 지부에서… 대주교의 명령을 받고… 습격했습니다.”
사제가 피거품을 문 채로 습격 사실을 인정했다.
소시지 칼집처럼 전신에 자잘한 자상이 남아 있는 모습에서 그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사제를 내려다보는 루크의 눈빛에 자비라곤 1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제야 하나씩 풀리기 시작하는군. 다음 질문을 하지. 마물화시킨 거인은 어디에 쓸 작정이지?”
“저도… 모릅니다. 3성급 대형 마물은… 거인으로 둔갑시켜 어디론가… 이동시켰습니다. 1, 2성급 마물은 마물 탐지기에… 걸리니 그냥 방목하고 있습니다.”
거인들이 마물의 존재를 알면서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건 실질적인 피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원래 상층부의 일 처리가 그렇잖은가.
윗대가리들은 큰 문제가 터져야 본격적으로 나서기 마련이다.
1, 2성급 마물쯤이야 쉽게 제압할 수 있으니 사태가 그리 심각한 건 아니다 싶어 우선순위 아래로 미뤄 둔 것이었다.
거인국 강경파에게 있어선 당장 문제가 안 되는 마물보단 빌로스 왕국과의 마찰이 더 큰 문제일 테니 말이다.
3성급 마물들을 어디로 옮기고 있는지는 알 바 아니다.
중요한 건 데메그리 교 놈들의 씨를 말려 버리는 것이니까.
“그래서 거인국 지부의 위치는?”
“…….”
즈즈즈즉!
무릎 아래쪽에 박혀 있던 해왕검이 천천히 비틀리면서 피가 스멀스멀 배어 나왔다.
“크아아악! 툰드라 산맥! 툰드라 산맥 남쪽 세 번째 봉우리 아래에 있습니다!”
습격 사건의 진범이 데메그리 교였다는 것, 3성급 이상의 대형 마물을 둔갑시켜 타국으로 옮기고 있다는 것, 데메그리 교 거인국 지부의 위치.
이만하면 뽑아낼 수 있는 정보는 모두 뽑아냈다고 봐도 무방하다.
루크는 사제의 무릎에서 해왕검을 빼내며 레이아를 불렀다.
“레이아.”
“네, 말씀하세요.”
“이 녀석을 데리고 거인 대족장에게 데려가서 증언하도록 시켜. 파이를 붙여 줄 테니 타고 가.”
“그거라면 저도 같이…….”
해왕검의 검 끝에 맺힌 핏방울이 한 방울씩 뚝뚝 떨어지는 가운데 루크의 입에서 냉랭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따라오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정신 건강에 그리 좋은 광경은 아닐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