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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재능으로 환생-153화 (153/200)

# 153

153화 죽은 자를 위한 진혼식(2)

레이아의 눈썹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빌로스에서도 성깔 있는 축에 속하면 속했지 온순한 성격은 아니다. 꺼지라는 말을 듣고 얌전히 물러날 리 없었다.

레이아는 도도함이 물씬 풍기는 분위기를 띠며 대차게 반격을 날렸다.

“꺼지라고 말하기 전에 자기가 누구인지 밝히는 게 먼저가 아닐까요? 거인국의 대족장인지 아니면 어딘가의 빌어먹을 양아치인지 정확하게 알아야겠거든요.”

레이아의 대찬 반격에 이번에는 블러디 자이언트가 미간을 좁혔다.

정황상 그가 대족장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모른 척한 건 그저 만인 앞에서 그를 ‘빌어먹을 양아치’로 칭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족장도 레이아의 의도를 알기에 불쾌함을 드러냈다.

“빌로스에서 온 난쟁이 계집아, 내가 대족장 모건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따위 말을 씨부리는 것이냐.”

“어머, 너무 천박한 말투라서 대족장님일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앞으로는 거인국의 수준을 감안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죠.”

연이은 레이아의 도발에 거인 인파가 크게 술렁거렸다.

기껏해야 자신들의 발목 언저리 신장밖에 안 되는 작은 여인이 자신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도 주눅 들지 않고 대놓고 도발을 날리고 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거나, 무서운 걸 참고 억지로 허세를 부리는 것이 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 추측하며 저희끼리 수군거렸다.

“저 난쟁이,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저러지?”

“그러게 말이야. 대족장님이 화나시면 멀쩡히 돌아가지 못할 텐데 말이야.”

“쯧쯧, 인간들은 하나같이 주제를 모른다더니 저런 쬐깐한 계집까지도 극성이구먼.”

조롱 반 우려 반 섞인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거인들에게 있어 대족장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거인들의 대화를 통해 거인국 대족장은 경외의 대상이자 거인국의 상징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레이아는 흐트러짐 없이 모건을 직시했다.

“거인국에선 볼모 습격 사건을 빌로스 왕국의 자작극으로 단정 짓고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죠?”

“단정 짓고? 마치 우리가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우리의 소중한 국보를 손에 쥐고서 갖은 요구를 하려고 자작극을 벌이지 않았느냐.”

“억지의 뜻을 모른다면 알려 드리죠. 지금 모건 대족장께서 말씀하신 모든 부분이 억지랍니다. 명색이 대족장쯤 되시는 분이 그 정도도 모르진 않으실 텐데요?”

모건 곁에 있던 다른 족장들이 참다못해 강하게 발을 굴렀다.

쿵!

“말조심하거라! 더 이상 대족장님을 욕보인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당장이라도 찢어 죽일 요량으로 흉흉한 살기를 피어 올리는 족장들이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모건이 팔을 옆으로 뻗어 진정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고 턱을 치켜들며 하찮은 생물을 보듯 오만한 눈빛으로 레이아를 내려다보았다.

“난쟁이 계집아, 항복 의사가 아니면 무슨 용건으로 찾아온 것이냐? 도발이나 하러 온 것이라면 당장에 목을 뽑아 네년의 왕에게 보낼 테니 그리 알 거라.”

레이아는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나며 파이의 등 위에 묶여 있는 사제를 가리켰다.

“이번 사건의 진범을 밝혀냈어요. 저기 있는 데메그리 교 사제가 진범을 밝혀 줄 증인이죠.”

데메그리 교 사제란 말에 다시금 인파가 크게 술렁였다.

거인국에서도 자국 어딘가에서 데메그리 교가 활동 중이라는 걸 알고 있긴 했다.

그들을 찾아내기 위한 최소한의 병력을 파견했으나 여전히 이렇다 할 단서를 잡지 못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언제 입국했는지도 모를 빌로스의 여인이 보란 듯이 사제를 발견하여 데리고 왔다.

분명 똑같이 소수 정예로 조사를 펼쳤을 터.

한데도 결과를 낸 쪽은 빌로스 측이니 상대적으로 자신들이 무능하게 느껴지는 탓에 불쾌감을 감출 수 없었다.

레이아는 여세를 몰아 사제의 입에 물려 놓았던 재갈을 풀었다.

“있는 그대로 증언하세요.”

사제는 루크에게 당하면서 심각한 트라우마를 떠안게 된 나머지 겁에 질린 채로 사실을 토해 냈다.

“그, 그… 데메그리 교 상층부에서 엘리나를 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저희 거인국 지부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엘리나와 거인 호위대를 습격했습니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증언이건만 모건은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으려 했다.

“증언만으로는 못 믿겠군. 그 증인이 조작된 게 아니라는 증거는 어디 있지?”

“정 못 믿으시겠다면 툰드라 산맥에 조사단을 보내 보시죠. 지금쯤 국왕 전하께서 데메그리 교 거인국 지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두셨을 테니까요.”

“루크 국왕이? 그런 건가. 루크 국왕이 자리를 비우고 거인국에 들어와 있다는 거군.”

처음에는 별 의미 없는 중얼거림처럼 들렸다.

한데 모건의 표정을 본 순간 왠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

절대 일이 수틀린 자가 지을 법한 표정이 아니다. 좀 더 다른… 마치 비장의 수를 감춰 둔 자가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이전부터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다.

아무리 거인국이라도 구 겐크 왕국의 영토, 현 겐크 지방의 북부에 있는 카라스코의 장벽을 쉽게 뚫을 순 없을 것이다.

한데도 무엇을 믿고 이리 억지를 쓰며 명분을 만들려고 하는 걸까.

이래서야 마치 반드시 이길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해 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레이아는 대족장이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숨기고 있음을 직감했다.

“못 믿으시는 것 같으니 며칠 더 유예 기간을 두는 걸로 합의를 보죠. 거인국에서 직접 툰드라 산맥의 지부를 확인할 때까지 여기 남아 있겠어요.”

“판단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증인을 남겨 두고 떠나도록. 결과는 추후에 통보하마.”

처음에 다짜고짜 꺼지라고 한 것도 그렇고 자꾸만 레이아를 쫓아내려고 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모건의 태도 덕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분명 무언가 숨기고 있다.

‘당장 여기에 남는 건 무리일 것 같고… 일단 물러났다가 조용히 잠입해서 알아봐야겠는걸.’

다비드가 부락 내에 체류하고 있으니 잠입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괜한 고집으로 일을 크게 만드는 것보다 조용히 추이를 살피는 쪽을 택하는 게 나아 보인다.

지금쯤이면 루크가 이곳으로 오고 있을 테니 그가 도착한 후에 본격적으로 움직여도 늦지 않다.

“음, 정 불편하시다면 물러나겠어요. 이만큼 단서를 제공했으니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기대하죠.”

레이아는 증인을 파이의 등에서 끌어 내려서 거인들에게 양도했다.

그 후 파이의 등에 올라타기 위해 몸을 돌리던 찰나.

다수의 병사들이 부락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숫자는 대략 수천 명쯤 되어 보인다.

분명한 건 다가오고 있는 병사들이 거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몸집은 인간과 비슷한 수준이었고 녹음을 그대로 옮겨 담은 양 진녹색 복장을 입고 있었다.

더불어 병사 전원이 궁술에 능한 듯 큼지막한 활을 등에 매고 있었으며 인간치고는 귀의 길이가 긴 편이었다.

궁술에 능하며 귀가 긴 종족이라면 달리 생각할 것도 없다.

엘프밖에 더 있겠는가!

그러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엘프가 무슨 이유로 거인국에 온 것일까?

전쟁을 앞둔 나라에 타국의 군대가 찾아올 이유로는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하나는 침략하기 위한 파견, 또 하나는 지원을 위한 파견이다. 이 경우에는 두말할 것도 없이 후자 쪽이었다.

일련의 단서를 통해 거인국이 감추고 있던 패가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랬구나! 엘프의 숲이랑 동맹을 맺은 거였어!’

엘프와 동맹을 맺고 빌로스 왕국을 친다면 거인국의 승률은 급격히 상승한다.

어떤 방법으로 엘프의 숲을 설득한 것인지는 모르나 두 나라 간에 모종의 거래가 오간 것만은 확실하다.

이 사실을 루크, 그리고 빌로스 왕국에 알려야 한다.

그녀는 신속하게 파이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은 빠르게 움직이되 서두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 주의를 기울였다.

하나 파이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등 뒤에서 모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봐 버렸군.”

비장의 수를 알아 버린 이상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의사가 명확히 전해져 왔다.

들켰다면 어쩔 수 없다.

이리된 이상 싸우는 수밖에.

레이아가 메모리 스태프에 마나를 부여하며 응전 태세에 돌입하려던 찰나, 잠자코 있던 다비드가 모건에게 망치를 휘둘렀다.

콰앙!

큼지막한 망치가 모건에게 부딪쳤다. 아니, 정확히는 피로 이루어진 방패에 부딪혔다.

블러디 자이언트의 혈족 귀속 능력이자 피를 원하는 형태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인 ‘블러드 프레임’을 이용해 방패를 만들어 낸 것이다.

다비드는 힘으로 모건을 밀어내며 외쳤다.

“어서 가!”

“하지만…….”

“망치는 이미 휘둘렀어! 의미 없게 만들지 마!”

모건의 힘과 레이아의 힘을 모두 아는 다비드가 내린 판단이다. 그의 말은 곧 모건의 힘이 레이아보다 우위에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은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상대해야 할 적은 비단 모건 하나만이 아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블러디 자이언트와 각 부족의 부족장들, 지금 다가오고 있는 엘프 군대까지.

다비드가 어떤 심정으로 망치를 휘둘렀는지 알기에 더더욱 자존심보단 실리를 택해야만 했다.

레이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입을 달싹였다.

“윈드 차징!”

레이아의 몸을 중심 삼아 강한 바람이 원 형태로 퍼져 나가며 주변에 있는 거인들을 밀어냈다.

인파를 빙자한 포위망을 이루고 있던 거인들이 뒤로 밀려나면서 아주 잠깐 행동 불능 상태에 빠졌다.

그녀는 거인이 저희들끼리 뒤엉킨 틈을 타서 블링크를 시전했다.

“블링크!”

이미 파이도 사태를 깨닫고 미리 날갯짓하여 추진력을 붙이던 중이었다.

파이의 몸이 떠오름과 동시에 레이아의 몸이 파이의 등 위에서 나타나며 정확히 안장 위에 안착했다.

지상에서 각종 욕설과 비난의 목소리가 날아들었으나 1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오로지 루크와 빌로스 왕국에 소식을 전하는 것만 머릿속에 담아 두었다.

미리 추진력을 붙여 둔 덕인지 파이는 금세 거인들의 손이 닿지 않는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레이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려다가 문득 묘안을 떠올려 내곤 파이에게 지시를 내렸다.

“파이, 현 위치를 유지해.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어.”

* * *

레이아를 보낸 후 홀로 블러디 부락에 덩그러니 남은 다비드는 망치를 고쳐 쥐었다.

사방에서 적의가 쏟아진다.

기밀 사항을 알아낸 적이 도주할 수 있도록 도왔으니 당연히 질책의 시선이 쏟아질 수밖에 없다.

망치질에 밀려난 모건이 자세를 바로잡으며 진득한 노기가 담긴 쇳소리를 내었다.

“다비드, 지금까지 싸이클롭스 부족의 능력을 감안해서 여러모로 편의를 봐주고 있었건만 지금 건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구나.”

“용서를 바라고 취한 행동으로 보입니까?”

“어째서냐? 따뜻한 땅에서 사는 것은 모든 거인의 숙원이거늘.”

“억지를 쓰면서까지 이유를 만들어야 했습니까? 자신의 가치를 낮춰 가면서까지 이룰 만한 소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네놈의 지인이 빌로스에서 중역을 맡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친구 놀이 때문에 싸우기 싫다는 거 아니더냐.”

“그 아이를 통해 우린 타 종족과의 공존이 가능하다는 걸 배웠습니다. 분명 전쟁 말고도 다른 길이 있었을 겁니다.”

관계가 틀어진 지금에 와서도 전쟁이 아닌 공존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다비드였다.

라샤를 마냥 적국의 장수로 보는 게 아닌 공존의 교두보로 본다면 협상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싸우지 않고도 빌로스 왕국 영토의 일부를 자치령으로서 제공받는 방안도 있었을 터.

모건의 행동은 유일한 공존 가능성을 스스로 닫아 버린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모건은 다비드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이익에 미친 인간들이 생산량보다 소비량이 많은 우리 거인들을 받아 줄 거라 생각하나? 흥, 꿈에 젖어 허울 좋은 소리만 늘어놓는구나.”

역시 설득은 무리인가.

사방은 온통 적뿐이고 상황은 절망적이다.

그럼에도 다비드는 망치에 라이트닝 인첸트를 부여하며 손을 까딱였다.

“잠자코 죽어 줄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덤비십시오. 갈 땐 가더라도 그 썩어 빠진 근성만은 지져 드리고 가겠습니다.”

레이아를 탈출시켰으니 할 일은 다 했다.

나머지는 루크가 해결해 줄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고 모건만 두들길 각오로 망치 손잡이를 힘껏 움켜잡던 중.

갑자기 다비드의 발밑에 시커먼 구멍이 생성되었다.

상공으로 날아오른 레이아가 다비드에게 텔레포트 홀을 시전한 것이다.

찰나의 순간에 혼자 내빼는 것이 아닌 가진 수단을 이용하여 모두 살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려 낸 레이아의 파인 플레이였다.

다비드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선 하늘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거야 원. 나한테 신세 지는 게 지독히도 싫었나 보구만.”

생성된 구멍이 삽시간에 다비드를 빨아들여서 무작위 장소로 보내 버렸다.

다비드가 무사히 탈출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상공에 떠 있던 파이가 속도를 붙여 부락으로부터 멀리 벗어났다.

텔레포트 홀이 닫히면서 다비드가 서 있던 자리에는 차디찬 공기만이 맴돌았다.

모건은 농락당했다는 생각에 이를 뿌득 갈며 언성을 높였다.

“크윽! 당장 남하할 준비를 해라! 루크 그놈에게 자리를 함부로 비우면 어떻게 되는지 톡톡히 알려 주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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