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154화 카라스코 건축물에서 보인 징조(1)
“무우우우~”
플라이 마법으로 이동하고 있던 루크는 지상에서 들려오는 짐승 울음소리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상에는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호수가 있었고, 물가를 따라 거대한 순록 떼가 물을 마시는 중이었다.
거인국에서만 서식하는 동물이자 거인들에게 윈터 랜드의 축복이라 불리는 자이언트 루돌프였다.
외견은 평범한 순록과 똑같으나 다른 점이 딱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밤에는 코가 야광으로 빛난다는 점.
또 하나는 덩치가 거인보다도 크다는 점.
안 그래도 몸집이 거대한데 거기다 순록 특유의 거대한 뿔까지 더해져서 덩치만 따지면 라그나로스도 한 수 접을 수준이었다.
다만 덩치가 거대한 것과 달리 1년에 몇 번씩이나 새끼를 치며 새끼가 성체가 되는 시기가 매우 짧다고 한다.
거기다 수명이 매우 짧아서 성체가 된 지 1년 만에 죽는다고 하니, 따로 사냥할 것도 없이 죽은 자이언트 루돌프의 사체만 취해도 한 부족이 일주일간 섭취할 수 있는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오죽하면 윈터 랜드의 추운 날씨는 자이언트 루돌프의 고기를 오래 보존하기 위해 존재하는 거란 말까지 나오겠는가.
한창 자이언트 루돌프가 만들어 내는 장관을 감상하던 중 호숫가 한편에 웬 싸이클롭스 한 명이 쓰러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싸이클롭스는 흡사 물에 빠졌다가 물가로 떠내려온 것인지 홀딱 젖은 채로 기절해 있었다.
더불어 싸이클롭스 주변에선 허름한 장비로 무장한 인간 무리가 서성이는 중이었다.
“이봐, 외눈박이 형씨. 눈 좀 떠 봐. 어이, 눈 떠 보라고.”
싸이클롭스의 눈꺼풀 위를 발로 툭툭 차는 걸로 추측건대 도와줄 생각으로 모인 자들은 아닌 것 같았다.
지상의 인간들은 발로 차도 깨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선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야야야, 아무래도 뒤진 것 같은데?”
“어휴, 병신 새끼. 가슴팍 오르락내리락하는 거 안 보여? 혹시 눈깔이 유리구슬로 되어 있으세요?”
“말하는 꼬라지 하고는. 그거 좀 못 볼 수도 있지 왜 다짜고짜 욕질이야?”
“니가 병신이라서 그런다, 왜? 꼽냐?”
“너희 둘 다 병신이니까 닥치고 물건부터 챙겨. 일단 챙겨야 난쟁이 마을까지 가지고 가서 팔든지 말든지 할 거 아냐.”
남자들의 가성비 갑 단어 중 하나인 병신 소리를 연발하며 싸이클롭스의 소지품을 챙기고 있었다.
말하는 걸로 봐선 황무지를 돌아다니며 도둑질과 약탈을 일삼는 도적 떼인 것 같았다.
도적 떼라곤 해도 거인들은 무서워서 건드리지 못하고 혼자 떠돌아다니는 인간을 습격하거나 거인들이 남기고 간 자이언트 루돌프의 고기를 채취하여 가져다 파는 것이 고작이다.
굳이 따지자면 도적 떼라기보단 하이에나에 가까운 놈들이었다.
난쟁이 마을은 원래 자국에서 추방당한 범죄자들이 모이는 곳이니 도적 떼가 있다 한들 이상할 건 없다.
장소가 바뀐다고 사람 본성이 바뀌겠는가. 쓰레기를 집 안에서 집 밖으로 옮긴다고 더러운 점이 바뀌는 건 아니니 말이다.
동선이 도둑질 현장과 겹치는지라 이동할수록 현장에 있는 싸이클롭스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근데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이다.
루크는 싸이클롭스의 얼굴을 확인하고선 고개를 갸웃거렸다.
“쟤가 왜 여깄지?”
쓰러져 있는 싸이클롭스는 다름 아닌 다비드였다.
블러디 부족에서 대족장을 설득하고 있어야 할 자가 한참 동떨어진 지역에서 대자로 뻗어 있다.
아무래도 설득 과정에서 일이 꼬인 모양이다.
필시 문제가 생겨서 블러디 부족에서 이탈했고 도주 과정에서 벌어진 사고 때문에 물에 빠진 것이 아닐까 싶다.
‘레이아가 증인을 데려갔는데도 문제가 생겼다는 거군.’
증인까지 있는데 일이 꼬였다는 건 레이아와 다비드가 멍청하게 어버버거렸거나, 대족장 모건이 논리 따윈 개나 주라는 듯 억지를 썼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의심할 여지도 없다.
단언하건대 후자 쪽인 게 틀림없다.
자세한 경위는 다비드에게 직접 들어 봐야 할 것 같다.
루크는 플라이 마법의 경로를 수정하여 지상으로 내려갔다. 그동안에도 도둑들은 다비드의 가죽옷을 잘라 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
무두질한 루돌프 가죽은 비싸게 팔리니 큼지막하게 썰어 팔아넘길 작정인 것이다.
이윽고 루크가 지상에 착지했을 때, 그제야 도둑들이 루크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허억! 씨발, 깜짝아! 넌 또 뭐야?”
도둑들을 상대로 길게 대화를 나눌 생각은 없다.
고로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검을 뽑아 마나를 부여했다.
해왕검 표면에 마나 블레이드가 일렁이면서 푸른빛을 발했고, 반면에 도둑들의 얼굴은 본래 색을 잃고 새하얗게 질렸다.
‘마, 마나마스터!’ 같은 판에 박힌 반응이 튀어나오기 전에 루크가 먼저 선수를 쳤다.
“가만히 있지 말고 도망가지 그래?”
잡도둑들이야 벨 것도 없이 마나 블레이드를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니나 다를까, 도둑들은 들고 있던 짐을 내팽개치며 뒤도 안 돌아보고 도주에 나섰다.
도둑들을 쫓아낸 루크는 해왕검을 도로 검집에 집어넣으며 마법을 시전했다.
“어스퀘이크.”
쿠구구구!
직접 흔들어 깨울 순 없으니 어스퀘이크를 약하게 시전하여 다비드의 몸을 흔드는 방법을 택했다.
어스퀘이크의 효과로 인해 주변 일대의 땅이 흔들렸고, 진동에 놀란 다비드가 깜짝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흐억! 이게 무슨 생난리야!”
이내 흔들림이 가라앉으면서 루크의 입이 열렸다.
“몸뚱이가 커서 보통 방법으로는 깨울 수가 있어야지.”
“응? 뭐야, 너였냐. 후우, 깜짝 놀랐네. 어? 내 옷은 또 왜 이래?”
도적 떼가 가죽을 취한답시고 아무렇게나 옷을 도려낸 탓에 의도치 않게 짧은 의상이 되고 말았다.
루크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선 시선을 허공에 두었다.
“하마터면 각막이 손상될 뻔했군.”
“안 그래도 옷이 엉망진창이 됐는데 뼈까지 때려야겠냐.”
“뭐, 그 부분은 넘어가기로 하고 설명부터 들어 볼까?”
“후우, 말도 마. 모건이 엘프들을 끌어들였어. 믿는 구석이 있으니 무리해서 억지를 썼던 거지.”
이어서 다비드는 모건이 레이아를 제거하려 한 것부터 레이아와 다비드가 탈출에 성공하게 된 과정까지 상세히 설명했다.
모든 사정을 듣고 나니 국보를 포기하면서까지 전쟁을 고집한 게 납득이 되었다.
“그럼 레이아는 파이를 타고 이쪽으로 오고 있는 건가?”
“아마도? 내가 구멍에 빨려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봤을 때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으니 이쪽으로 오고 있을 거야.”
“흠, 레이아도 아직 멀었군.”
“무슨 소리야?”
“이쪽 얘기야. 신경 쓸 거 없어. 어쨌든 비장의 수를 사전에 들켰으니 모건도 다급해졌겠군.”
“예정되어 있던 남하 일정을 앞당겨서 바로 출발했을 가능성이 높아. 그러니 곧바로 대응해야… 아! 그래서 멀었다고 한 거였구만.”
거인과 엘프가 손을 잡았다는 걸 안 순간에 레이아가 취해야 할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루크에게 알리는 게 아니라 빌로스 왕국으로 곧장 날아갔어야 한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긴 해도 다비드를 통해 정보를 취했으니 레이아가 루크와 합류하는 건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설사 다비드와 마주치지 않았다 하더라도 루크라면 블러디 부락에 도착하자마자 맥락을 파악했을 터.
이왕 이렇게 된 거 현 상황에 맞추어 계획을 짜야 했다.
“다비드 넌 일단 싸이클롭스 부락으로 돌아가서 전사들을 데리고 각 부족을 순회하도록 해.”
“다른 부족을 순회하라고? 다른 부족들을 공격하라는 말이야?”
“말을 끝까지 들어. 지금부터 대족장이 될 방법을 알려 줄 테니 내가 말한 대로 움직여.”
루크는 다비드에게 대족장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찬찬히 설명해 주었다.
작전을 듣는 내내 다비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내 모든 작전 개요를 들은 다비드가 혀를 내두르며 얼떨떨해했다.
“어떤 작전인지는 이해하겠어. 근데 너무 악랄하지 않아?”
“억지 부리면서 전쟁을 강행하는 저능아를 계속 대족장으로 놔두는 것보단 나을 텐데?”
“뭐, 그렇기야 하지만서도… 쩝, 어쩔 수 없지.”
“알아들었으면 어서 움직여. 지금부터 시간 싸움이야.”
작전 전달을 마친 루크는 플라이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 마나를 배열했다.
레이아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하니 일단 그녀와 합류한 후에 작전을 펼치고자 한다.
다시금 플라이 마법을 시전하려던 찰나 다비드가 멋쩍게 코를 긁으며 루크를 불렀다.
“저기 말이야. 미안한데 호수에 가라앉은 내 망치 좀 건져 주지 않겠어? 이동할 때 호수 중앙에 떨어져 버려서 망치 챙기다가 같이 가라앉아 버렸거든.”
다비드가 물을 먹어 기절한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수영을 못해서 물에 빠진 게 아니라 망치를 챙기다가 물을 먹은 거다.
거인국엔 거인의 크기에 맞는 무기를 만들 자원도 그럴 기술력도 없다. 한 번 잃어버리면 다시 구하기 어렵기에 필사적으로 챙기려다 웃지 못할 해프닝이 발생한 것이다.
루크는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다비드를 한 번 스윽 보고선 호수를 향해 푸른색 정령석을 던졌다.
“아쿠아, 호수 밑바닥에서 망치 하나 건져와.”
다비드와 헤어진 루크는 플라이 마법을 시전하여 동쪽으로 날아갔다.
레이아와 마주친 건 몇 시간 후의 일이었다.
자신을 찾아올 게 아니라 바로 왕국으로 갔어야 했다고 말하자 레이아가 플라이 마법으로 날고 있는 자신을 지목하더니…….
“문제 하나 낼게요. 파이는 어디 가고 제가 직접 플라이로 날고 있을까요?”
듣자 하니 블러디 부족의 부락을 벗어나자마자 파이를 따로 빌로스 왕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블러디 부족의 부락을 벗어난 후의 일이기 때문에 다비드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탑 개 3년이면 주문을 영창한다고 했던가.
100점짜리 답안을 내고서 당당히 가슴을 펴고 있는 레이아를 보고 있자니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루크는 툰드라 산맥에서의 일로 거칠어져 있던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끼며 차분히 말을 꺼냈다.
“어차피 가는 길이니 난쟁이 마을에 들렀다 가자고.”
“응? 난쟁이 마을에는 왜요? 혹시 저 없는 동안 따로 작전 회의라도 하셨어요?”
“다비드를 대족장으로 만들어서 휘하에 두면 좋겠다 싶어서 말이야. 일이 잘 풀린다면 겸사겸사 거인군의 진군도 늦출 수 있겠지.”
* * *
난쟁이 마을은 지난번에 들렀을 때와 똑같이 여전히 유흥과 향락에 취해 있었다.
별다른 변화가 없는 걸로 봐선 아직 이곳에는 거인들의 움직임이 전해지지 않은 듯하다.
루크와 레이아가 마을에 들어서자 대부분 사람이 두 사람을 알아보았다.
“저 사람 약쟁이 부자잖아. 한동안 안 보인다 싶더니 다시 나타났네.”
“저번에 소문을 들었는데 조슈아한테 환상초 씨앗을 대량으로 구매했다더라고. 그동안 약에 절어 있다가 바람 쐴 겸 나온 거겠지.”
“또 포커 테이블이 한 차례 달아오르겠군. 저 사람한테 돈 잃는 놈들이 그대로 갚아 주겠다고 엄청 벼르고 있더만.”
사람들의 수군거림 속에서 루크와 레이아는 곧바로 도박장으로 향했다.
이미 마을 내에서 승부사이자, 호구 부자이자, 환상초 중독자로 유명해진 터라 벌써부터 구경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루크는 다른 종목은 쳐다보지도 않고 포커 테이블로 직진하여 의자에 착석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전에 루크에게 호되게 당했던 도박꾼들이 실실 웃으며 도발을 날렸다.
“오랜만이야, 부자 형씨. 듣자 하니 약값으로 상당히 날린 모양이던데? 약값 때문에 개털 되고 잔돈 벌이나 하러 온 거면 코흘리개 테이블에 가서 앉지그래?”
그에 루크가 돈이 가득 담긴 자루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조슈아를 처리하면서 놈이 가지고 있던 금화를 모두 챙겼었다. 놈을 찾기 위한 경비로 쓴 돈이니 도로 가져오는 게 당연하잖은가.
다만 루크는 이번에 꺼낸 돈을 마치 다른 곳에서 가져온 돈인 것처럼 말했다.
“돈이라면 썩어 날 정도로 넘쳐나지. 요즘처럼 돈 벌기 쉬운 시기에 돈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특히 항상 돈에 굶주려 있는 도박 중독자들에게 ‘쉬운 돈벌이’만큼 매혹적인 단어도 없을 거다.
방금까지 도발을 하던 자들은 솔깃한 이야기인 나머지 은근슬쩍 운을 띄웠다.
“돈벌기 쉬운 시기라니 농담이 심하구만.”
“뭐야, 다들 모르는 건가. 거인 녀석들 빌로스랑 전쟁 치른다고 전사들 긁어모아서 남쪽으로 내려갔어. 심심하면 한 번씩 들러서 값어치 나가는 물건 좀 가져오는데 그만큼 쏠쏠한 게 없더라고.”
루크의 말에 도박장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거인들이 전쟁 준비 중이란 것까진 알고 있었으나 이리도 빨리 출정할 줄은 몰랐던 참이다.
대부분 전사를 데려갔다면 각 부락에는 최소한의 병력과 노인, 여자, 아이 등의 비전투원만 남아 있을 것이다.
아무리 중요한 전쟁이라도 비전투원이 먹을 식량은 남겨 뒀을 터.
그 양이 거인의 입장에선 적다 하더라도 인간의 기준에선 팔자를 고칠 수 있는 수준의 물량이다.
더군다나 이미 난쟁이 마을에서 유명인으로 자리 잡은 루크의 말이기에 남다른 파급력을 행사했다.
도박장에서 시작된 소문은 금세 난쟁이 마을 전역으로 퍼져 나가며 범죄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이거 도박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잖아! 칩 전부 돈으로 바꿔 와! 전당포에 맡긴 무기부터 되찾아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