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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재능으로 환생-157화 (157/200)

# 157

157화 엘프의 숲은 이미 (1)

도널드 후작은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자신은 충을 논할 자격이 없다고.

그도 그럴 게 구 겐크 왕국의 국왕이 데메그리 교와 연루되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충성했다.

이 세상에 친부모는 하나뿐인 것처럼 자신의 주군은 카이둔 국왕뿐이라며 끝까지 충의를 지키려 했다.

줄곧 섬겨 왔던 주군을 끝내 외면하고 새 국왕을 섬기고 있는 자신이 어찌 충을 논하겠는가.

충의로 채워져 있던 몸뚱이에 충의가 사라졌으니 제대로 기능할 리가 없다.

껍데기만 남은 몸뚱이를 채워 넣을 새로운 동기가 필요했다.

때문에 장벽을 지키라는 왕명 자체를 새로운 동기로 삼기로 했다.

장벽을 지키지 못한 순간 도널드 후작은 다시 텅 빈 껍데기가 되고 만다.

동기부여가 없는 인간이 과연 인간이라 불릴 수 있을까. 밥만 먹고 잠만 자는 것으로 이루어진 삶이라면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죽는 것보다 지키지 못하는 게 더 두렵다.

안 그래도 구차하게 부지한 목숨이거늘. 최소한 사람으로 죽어야지, 죽어도 짐승으로는 못 죽는다.

도널드 후작은 장벽을 디딤대 삼아 장벽 바깥으로 높이 뛰었다.

“하아아앗!”

장벽 아래에서 혈족 귀속 능력을 이용해 지혈을 하고 있던 모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놈의 큼지막한 동공에 위에서 뛰어내리는 도널드 후작의 전신이 비쳤다.

놈이 경악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중독도 마다하지 않고 덤벼든 것도 모자라, 15미터 높이의 장벽 위에서 스스로 몸을 던지는 자가 제정신으로 보일 리 없다.

하나 때로는 비정상이 정상을 밀어내고 올바른 질서로 자리 잡을 때도 있는 법이다. 특히나 전쟁 중에는 더더욱 그렇다.

도널드 후작의 검이 아래로 떨어지며 모건이 쓰고 있는 피의 투구를 가격했다.

쩌적!

피로 이루어진 투구에 균열이 벌어지며 마나 블레이드가 균열 사이로 침투했다.

그러나 모건의 왼손이 날아들며 도널드 후작의 몸을 후려쳤다.

빠각!

이게 정녕 사람을 후려치는 소리란 말인가.

집게로 호두를 부술 때나 날 법한 거칠고도 둔탁한 파쇄음이 울려 퍼졌다.

무식하기 짝이 없는 후려치기 앞에서 도널드 후작의 몸이 크게 튕겨 나갔다.

허공 높이 붕 떠오른 도널드 후작을 향해 모건이 추가 타격을 날리고자 바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떨어진 오른손에 쥐어져 있던 혈검을 도널드 후작을 향해 휘둘렀다.

후우웅!

바람 이는 소리가 심상치 않다. 검의 두께가 두껍다 보니 검보다는 둔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따귀 한 방에 찌그러지며 제 기능을 잃은 갑옷이 혈검을 막아 낼 리 없을 터. 적중당한다면 베이는 게 아니라 으깨질 것이다.

다행히 도널드 후작이 혈검에 적중당하는 일은 없었다.

혈검이 도널드 후작에게 적중하기 직전에 파이가 날아들어 후작의 몸을 낚아챘기 때문이다.

“위험! 위험!”

파이는 발톱으로 도널드 후작의 몸을 움켜쥐고선 재빨리 하늘로 날아올랐다.

파이가 고도를 높이자마자 간발의 차로 혈검이 파이의 발치를 스쳐 지나갔다.

블러디 부락에 있을 때도 파이 때문에 레이아를 놓쳤던 기억이 있는 모건이다. 중요한 국면마다 훼방을 놓는 새가 달갑게 느껴질 리 없었다.

“미련한 새대가리 놈아, 네깟 것이 잡아채 간다고 그 늙은이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안물! 안물!”

“큭, 저 빌어먹을 새 새끼부터 조졌어야 했거늘.”

모건과 파이 사이에 신경전이 오가는 동안 도널드 후작의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파이 덕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긴 했지만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모건의 피가 독성을 띠고 있다는 건 피로 이루어진 갑옷도 독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나 블레이드로 피의 갑옷을 베어낼 때 도널드 후작의 몸이 재차 독기에 노출되면서 안 그래도 중독된 몸이 더더욱 독에 찌들게 된 것이다.

도널드 후작도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손바닥으로 파이의 발을 두드렸다.

“파이, 날 전장 한복판에 내려다오.”

“거절! 거절!”

“이대로 독에 찌들어 죽느니 한 놈이라도 더 베다가 적에게 죽고 싶구나. 그게 이 늙은이의 마지막 사명 아니겠느냐.”

“…….”

항상 깐족거리는 파이도 도널드 후작의 애절한 부탁만큼은 쉬이 거절하지 못했다.

양초는 꺼지기 직전에 가장 밝게 타오른다 했으니.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살아왔다는 일념으로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불사를 작정이었다.

그러나 파이가 방향을 틀기도 전에 더 높은 상공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싸우겠다고 말하는 거 보니 아직 팔팔한 것 같은데?”

파이에게 붙들려 있는 터라 위를 보기 힘든 자세에 놓인 도널드 후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결에 실려 온 목소리만으로 목소리의 주인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전하!”

루크는 레이아와 함께 나선 형태로 크게 돌며 파이의 옆에 따라붙었다. 그리고 파이의 발톱에 붙들려 있는 도널드 후작에게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아슬아슬하게 늦지 않은 모양이군.”

“죄송합니다. 적의 독공에 당하여 오래 버티지 못할 듯싶습니다.

아직 방어선은 유지되고 있으니 전하께 지휘권을 양도해드리기 전에 마지막 전투에 참가하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그 긴말을 또박또박 제대로 읊을 정도라면 당분간은 문제가 없겠군.”

“저는 괜…….”

“파이, 도널드 후작을 장벽 안으로 데려가서 응급 처치를 받게 해.”

“응급! 응급!”

“전하! 전 아직 싸울 수 있습니다! 전하~!”

파이가 잽싸게 멀어지면서 도널드 후작의 목소리도 극히 희미하게 들릴 따름이었다.

바통을 이어받은 루크는 상공에 머무르며 전장의 상황을 살폈다.

“지금까진 잘 버티고 있군.”

공중에서 관측한 전황은 5 대 5였다.

거인군이 쉴 새 없이 바위 계단을 오르고 있으나, 도널드 후작이 보여 준 패기에 자극을 받은 빌로스군이 거인들을 밀어내며 버티고 있는 형국이었다.

하루만 늦었더라도 거인군 측으로 전세가 크게 기울었을 것이다.

난쟁이 마을의 범죄자들을 소모품으로 활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인, 엘프 동맹군이 진군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길래 마나를 아낌없이 쓰며 날아왔다.

만약에 동맹군의 소식을 조금이라도 늦게 접했거나, 마나를 아낀답시고 속도를 줄였다면 돌이킬 수 없는 참상이 벌어졌을 거다.

전투에 가세하기 위해 태세를 정비하던 중 옆에 있던 레이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잠시만요. 뭔가 이상한데요?”

“뭐가?”

“거인들만 싸우고 있지 엘프들은 움직일 기미가 안 보여요. 다른 꿍꿍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요?”

레이아의 말대로 엘프군은 전장에서 다소 떨어진 장소에서 가만히 대기하고만 있었다.

엘프군까지 가세했다면 동맹군은 좀 더 손쉽게 우위를 점할 수 있었을 거다.

한데 아직도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는 건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까지 거인들의 목적은 파악했는데 엘프들의 목적은 뚜렷하게 아는 바가 없다.

루크와 레이아가 전장에 가세했으니 엘프들도 부랴부랴 움직임을 취해야 할 텐데 오히려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마치 싸우는 것보다 피해를 입지 않는 것에 주력하는 것처럼 말이다.

루크는 엘프군의 낌새를 주의 깊게 살피다가 거인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엘프들은 일단 잠시 놔두자고. 거인들부터 정리하는 게 좋겠어.”

“우두머리부터 족칠까요? 잔챙이들부터 족칠까요?”

“반반씩 맡는 걸로 하지. 내가 모건을 칠 테니 넌 잔챙이들을 족쳐.”

“잘 족치면 상이 있나요?”

“공을 세우면 황금과 비단이 기다리고 있지.”

“흐응~ 그거 말고 다른 보상도 있을 텐데요?”

“…….”

싸이클롭스 부족에서 하룻밤을 보낸 이후부터 레이아가 묘하게 적극적으로 바뀐 것 같다.

겉보기도 여러 의미에서 반질반질해진 느낌도 들고 말이다.

눈을 반짝이며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냥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생각해 보겠어.”

“후후, 그럼 간만에 의욕을 내볼까요? 오늘 메모리 스태프에 열 좀 오르겠는데요?”

“알겠으니 움직이기나 해.”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예요.”

허공에서 루크와 레이아가 동시에 다른 방향으로 몸을 틀며 각자 맡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움직였다.

지상에선 모건이 블러디 자이언트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모건을 중심으로 한 데 보인 블러디 자이언트들이 검으로 자신의 팔뚝을 그었고, 그들의 팔에서 흘러나온 피가 모건의 잘린 팔 단면을 통해 흘러 들어갔다.

혈액을 공급받은 모건은 가장 먼저 피를 이용해 오른쪽 의수를 만들었고, 이어서 거대한 혈검을 생성했다.

다른 블러디 자이언트의 피를 끌어몰아서 만들어 낸 혈검의 길이는 장장 12미터에 달했다.

풍문을 통해 루크의 투영검이 10미터 길이라는 것을 듣고선, 그보다 더 길면서도 우람한 검을 준비한 것이다.

검의 강도는 어느 정도인지 몰라도 위용만 놓고 보면 결코 투영검에 뒤지지 않았다.

모건은 팔뚝의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강하게 힘을 주어 대형 혈검을 들어 올렸다.

“흐읍! 네놈과의 전투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 것 같느냐?”

먼저 헥토 요새를 점령하고 루크와 싸우려고 했으나 순서가 뒤바뀌었다.

그렇다 한들 처음부터 루크와의 전투는 예견되어 있었으니, 루크와의 일전을 대비하여 비장의 수를 준비해 두었던 것이다.

모건에게 피를 제공하고 있던 블러디 자이언트들이 점점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대형 혈검뿐만 아니라 모건의 몸을 감싸고 있는 혈갑까지 강화하느라 가진 피의 대부분을 전달했기 때문이었다.

블러디 자이언트의 체질상 다른 거인 종족의 두 배에 달하는 출혈량을 감당할 수 있으나, 그 체질로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피를 제공한 것이다.

그야말로 동족의 희생을 요하는 수단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루크와 조우할 때까지 아껴둔 것이고 말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만큼 희생을 해야 겨우 루크에게 대적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모건은 루크를 향해 대형 혈검을 겨누며 갖은 도발을 날렸다.

“네놈 하나를 상대하기 위해 갈고닦은 검이다. 자신 있다면 내려와서 내 검을 받아 보거라.”

예전에 분명 루크가 이리 말했었다.

‘거인은 덩칫값을 못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지.’라고 말이다.

루크 입장에선 공중에 머무르며 투영검만 내려보내도 된다.

바람이 부는 상공에 머무르면 혈검과 경합 시 퍼져 나오는 맹독으로부터 자유로우니 굳이 지상으로 내려갈 이유가 없다.

그러나 루크는 지상으로 내려가는 쪽을 택했다. 루크의 신형이 천천히 낙하하더니 두 발이 지면에 닿았다.

“너무 자신만만해하니 부수기 미안해지는걸.”

모건은 분명 루크가 도발에 넘어와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판단하곤 조소를 머금었다.

바람을 등지고 있으니 경합 시 피어 나올 독기는 루크 쪽으로 향할 터.

검의 강도 또한 부족민의 희생을 발판 삼아 만든 만큼 결코 투영검에 뒤지지 않으리라 자신했다.

무패 신화를 자랑하는 인간계 정점이란 칭호도 오늘을 기점으로 간판을 내리게 될 것이다.

하나 모건의 자신만만한 표정은 오래 가지 못했다.

루크가 소환한 투영검의 길이가 5미터, 6미터, 7미터… 그리고 기존에 알려져 있던 10미터 길이를 한참 뛰어넘어 15미터 길이까지 늘어나는 게 아닌가!

툰드라 산맥에서 대량의 마기 회로를 흡수하면서 다시 한번 자신의 한계를 갱신한 루크였다.

왜 공중이 아닌 지상전을 택했겠는가.

어차피 부술 거라면 정신적인 타격까지 가미하는 게 더 효과적일 테니까.

뭐, 간단히 말하자면 모건에게 최고의 절망을 선사하고 싶었을 뿐이다.

루크는 투영검을 띄우고선 입꼬리를 씩 올렸다.

“아까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지. 자신 있다면 받아 보도록.”

허공을 누비는 군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수준의 투영검 앞에서, 모건은 나라 잃은 자처럼 절망에 물든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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