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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재능으로 환생-158화 (158/200)

# 158

158화 엘프의 숲은 이미(2)

퉁! 투웅! 투우웅!

투영검과 대형 혈검이 경합을 이루며 둔탁한 타격음을 만들었다.

이를 두고 누가 칼싸움이라 생각하겠는가.

공성 병기끼리의 전투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한 방, 한 방이 위력적이었다.

인공적으로 거인의 한계를 뛰어넘어 초월자의 영역에 들어선 모건을 상대로 루크는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그랜드마스터가 된 이후에도 늘 향상심을 품고 있던 것은 바로 지금과 같은 경우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것에 만족하여 정체된 채 지냈다면 이토록 압도적인 힘을 행사하기 어려웠을 거다.

역대급 재능이라는 것도 인간 수준에서 역대급이라는 거지 타 종족이나 혈족 귀속 능력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들에 비하면 그리 대단할 것도 없다.

퉁! 쩌적!

경합 도중 대형 혈검에 기다란 균열이 생겨났다.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쌓아 올린 돌탑과 편법으로 순식간에 쌓아 올린 모래 탑이 같은 강도를 지니고 있을 리가 없다.

루크는 해왕검을 높이 들었다가 내리치며 균열이 생긴 대형 혈검에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콰득! 콰지직!

결국 투영검의 위력을 감당하지 못한 대형 혈검이 반 토막으로 부러지며 그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루비를 높은 곳에서 떨어뜨린 듯한 이색적인 광경이었다.

붉은 파편이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이며 사방으로 퍼지는데, 파편 사이로 모건의 일그러진 얼굴이 얼핏 보이는 것에서 정복욕이 충족되는 게 느껴졌다.

모건도 다른 범부들과 다를 바 없이 일이 틀어지자마자 현실을 부정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안 돼! 이럴 리가 없어. 이건 꿈일 거야. 어떻게, 어떻게…….”

늘 보아 왔던 반응인지라 이젠 별 감흥도 없다.

아, 페르난도를 베고 와서 그런가?

데메그리 교가 한 행동에 비하면 모건이 한 일은 거슬리는 축에도 안 든다.

게다가 모건은 자신이 데메그리 교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걸 자각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를 보고 있으면 화가 난다기보단 멍청하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루크는 토막 난 대형 혈검을 들고 있는 모건을 향해 해왕검을 사선으로 그었다.

“거인은 덩칫값을 못한다라… 누가 만든 건진 몰라도 참 잘 만든 문구란 말이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투영검이 해왕검의 궤적을 그대로 투영하며 모건의 몸을 베어 냈다.

* * *

모건이 전사하면서 전세는 급격히 빌로스군 쪽으로 기울었다.

남은 거인군은 모건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저항했다. 거인들이라고 전세가 기울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물러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후방에 남겨 둔 가족과 이웃들이 난쟁이 마을의 범죄자 무리에게 고통받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강행군을 고집했다.

패전 후에 돌아가 봤자 가족과 이웃을 버린 패배자 취급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투항할 생각이 없는 거인군을 두고 루크는 붉은색 정령석을 꺼내어 라그나로스를 소환했다.

가진 마나의 5할가량이 한꺼번에 소비되는가 싶더니 전성기 수준의 라그나로스가 전신을 드러냈다.

“하하하! 주인아, 요즘 너무 후하게 마나를 제공해 주는 거 아니냐?”

“잔말 말고 쓸어 버리기나 해.”

라그나로스가 숨을 한껏 들이마시더니 거대한 화염을 내뿜었다.

라그나로스의 공격이 이뤄질 때마다 루크의 몸에서 마나가 삽시간에 소모되었다.

화력의 정점이라 불리는 라그나로스를 소유하고도 전투에 자주 투입시키지 않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마나 연비가 안 좋아도 너무 안 좋다.

자유 계약 상태의 라그나로스는 자기 스스로 마나를 취할 수 있으나, 계약 상태의 라그나로스는 오로지 계약자를 통해서만 마나를 확보할 수 있다.

즉, 라그나로스를 쓰는 건 장식을 주렁주렁 매달아 무겁기만 한 연비 최악의 호화 마차를 모는 격이다.

그럼에도 라그나로스를 소환한 건 이번만큼은 라그나로스를 쓰는 게 더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전투 후에 거인의 시체를 처리하는 데 드는 비용과 인력은 인간끼리의 전투 때보다 몇 배는 더 소요될 터.

때문에 차라리 처치하면서 재로 만들어 버리자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라그나로스의 화염이 거인군을 집어삼키고 있는 동안 전장 한편에선 빛의 기둥이 떨어지고 있었다.

루크는 쉴 새 없이 적을 쓰러뜨리고 있는 레이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어지간한 보상으론 어림도 없겠군.”

* * *

결국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던 거인군은 전멸을 면치 못했다.

한데 거인군이 당하는 와중에도 엘프군은 끝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전장을 라그나로스에게 맡기고 줄곧 엘프군을 주시하던 루크는 의문을 감추지 못했다.

“스스로 손해를 감수하려고 동맹군을 파견한 건 아닐 거고. 도무지 속셈을 모르겠군.”

아무리 곱씹어 봐도 엘프들에게 이익이 될 만한 경우의 수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전쟁에 참가한 이상 빌로스 왕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리란 건 저쪽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제 와서 항복한다고 ‘네, 알겠습니다.’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도 손해를 자처하는 움직임을 취하고 있는 게 이해가 안 갈 따름이었다.

이해가 안 갈 땐 당사자에게 직접 묻는 게 가장 빠른 해결책이다.

루크는 경계심을 곤두세운 채로 엘프군의 지척까지 접근했다.

그리고 엘프군 선두에서 백마에 올라타 있는 지휘관에게 인사를 겸한 도발을 날렸다.

“특등석답게 만만찮은 관람료를 치르게 될 텐데, 감당할 자신이 있나 보지?”

심기를 자극하는 신랄한 도발 앞에서도 엘프 지휘관은 목석처럼 무심한 표정을 일관할 따름이었다.

일절 반응이 없으니 귀머거리에게 도발을 날린 느낌마저 들었다.

몇 초 후, 엘프 지휘관이 스스로 백마에서 내리며 두 손을 위로 들었다.

“항복할 테니 포로로서 수용해 주게.”

“싸우지 않을 거면서 어째서 군대를 이끌고 왔지?”

“이 파견이 날 죽이기 위한 상부의 명령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엘프의 숲 내부에서 모종의 세력 다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엘프들은 천공 섬의 용인들과 더불어 폐쇄성이 짙은 종족이다. 때문에 내부의 사정이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일이 거의 없다.

같은 맥락에서 엘프 지휘관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근거가 없었다.

고로 루크는 해왕검에 마나 블레이드를 부여하며 경계의 뜻을 밝혔다.

“그게 내 영토에 군대를 이끌고 온 자를 살려 둬야 할 이유가 되진 않는 것 같은데?”

“거래를 하지. 모건의 포이즌 도핑에 중독된 자를 살릴 수 있는 해독제를 가지고 있다네.”

“거래 재료로는 부족하군. 그 정도 독쯤은 우리 의료진도 해독할 수 있어.”

“과연 그럴까? 포이즌 도핑으로 생성된 맹독은 특수하다네. 블러디 자이언트 비전의 해독제가 아니면 해독할 수 없도록 되어 있지.”

모건은 실수로 동포를 중독시켰을 때를 대비한 전용 해독제를 부락 내에 준비해 뒀었다고 한다.

그걸 거인, 엘프 동맹군 결성을 위해 블러디 부락에 들렸을 때 몰래 빼돌려 둔 것이고 말이다.

처음부터 거래를 할 작정으로 몰래 해독제를 챙겨 둔 것 같다.

하지만 루크 입장에선 거래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요구를 들어줄 것도 없이 실력 행사로 가져오면 그만이니까.

먼저 남의 영토에 들어와 군사 작전을 펼친 건 저쪽이니 명분은 차고도 넘친다.

해왕검을 휘두르려던 찰나, 엘프 지휘관이 또 한 가지 거래 재료를 추가했다.

“영 미심쩍으면 해독제에 정보까지 얹어 주겠네. 현재 엘프의 숲이 어떤 상태인지 아나?”

“글쎄. 쓸모없는 정보는 머릿속에 담아 두지 않는 편이라서 말이야.”

“요정왕이 데메그리 교와 손을 잡았네. 자네 때처럼 말일세.”

마지막에 내뱉은 한마디로 지금까지의 행동이 단번에 납득이 되었다.

카이둔 국왕이 데메그리 교와 손을 잡았던 것처럼 엘프의 숲에 있는 요정왕도 마찬가지로 데메그리 교와 손을 잡은 것이다.

증거를 잡으려는 움직임에 낌새를 눈치챈 요정왕이 엘프 지휘관을 죽이기 위해 사지로 보냈다고 한다.

아무래도 좀 더 자세히 들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름은?”

“요정왕 일족의 라울.”

“요정왕 일족인가. 라샤가 탐탁지 않아 하겠군.”

“감당할 각오는 되어 있다네.”

라샤의 요정왕 일족 혐오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라울을 포로로 잡아들였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과연 그녀가 가만히 있을까?

당장 단검을 들고 죽이려고 달려들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 부분은 감당할 각오가 되었다는 듯 해독제가 담긴 병을 내미는 라울이었다.

* * *

루크는 포로 구속 및 이송 절차는 레이아에게 맡기고선 장벽 안으로 돌아갔다.

장벽 안의 병동에선 한창 부상자들을 치료하느라 의무병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모건의 포이즌 도핑에 중독된 이들은 만약을 대비해 따로 격리되어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격리 병동으로 들어가자 도널드 후작이 백지장 같은 얼굴로 누워 있는 게 보였다. 벌써 중독 증세가 심각한 수준까지 진행된 것이다.

도널드 후작은 루크의 복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전투가 끝났나 보군요.”

“방금 끝났어.”

“죽기 전에 승전보를 들었으니 더 이상 여한이 없습니다.”

“아직 포기하긴 이를 텐데?”

“허허허, 심심한 위로의 말씀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그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방금 의무병에게 해독제를 만들 수 없을 것 같다는 통보를 들었으니 말입니다. 쿨럭! 쿨럭!”

이젠 각혈조차 나오지 않는지 고통스럽게 마른기침을 토해 내는 도널드 후작이었다.

겨우 기침을 가라앉힌 도널드 후작이 해탈한 표정으로 천장을 응시했다.

“충을 논할 자격도 없는 신하에게 중책을 맡겨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전하의 명을 끝까지 완수했으니 이젠 여한 없이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한이 없다니 그거 놀랍군.”

“방금 막 유언장을 써서 집으로 보냈습니다. 그동안 아내 몰래 감춰 왔던 잘못들을 이런 식으로나마 고백하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하군요.”

아내 몰래라는 말에 루크는 조만간 도널드 후작에게 닥칠 일을 상상하며 아찔한 표정을 지었다.

“잘못이라곤 해도 사소한 일들밖에 없지? 알아도 웃으면서 지나갈 수 있는 일들 말이야.”

“허허허, 아무렴 제가 외간 여자를 집에 들였겠습니까. 그건 아니고 젊을 적 얘기나 몇 자 끄적였습니다. 다른 귀족 영애에게 보내려던 편지가 잘못 전달돼서 지금의 아내와 식을 올리게 되었지요. 줄곧 마음의 짐이었는데 편지로나마 털어놓으니 홀가분하군요.”

“그, 아직 유언장을 보내진 않았지?”

“방금 두 장 모두 발송한 참입니다.”

“두 장?”

“원래 편지를 받았어야 할 여인에게도 보냈지요.”

“아아.”

털어놓는 김에 다 털어놓는답시고 젊을 적에 좋아했던 여인한테도 유언장을 보낸 것이다.

수십 년 만에 전달하는 진심이라… 유언장을 쓰면서 로맨틱 그 자체라고 자부했을 도널드 후작을 상상하니 가슴이 아팠다.

루크는 조심스럽게 해독제를 침상 옆 서랍 위에 올려 두었다.

“해독제야. 좀 더 빨리 가져올 걸 그랬군.”

그러고선 황급히 몸을 돌리며 격리 병동 바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도널드 후작의 애석한 절규가 들려왔다.

루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의 등짝이 무사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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