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
159화 카라스코의 정체(1)
전투가 끝난 후 루크는 헤테룬으로 돌아가 현 상황에 대한 공식 발표를 거행했다.
‘엘리나 습격 사건은 빌로스 왕국의 자작극이다!’란 거인국의 입장에 반박하여 빌로스 왕국에선 명확한 증거와 증인을 제시했으나, 모건이 자신의 야욕을 위해 모든 증거를 묵살하고서 강제로 남침을 강행한 것임을 알렸다.
결코 가벼운 사건이 아니었건만 생각보다 세간의 반응은 잠잠했다.
이번 거인국의 침공을 두고 백성들이 말하길…….
-적군이 적군했다!
…라며 주제넘게 빌로스 왕국을 넘본 모건을 비꼬았다.
특히 카이둔 국왕 시절을 견뎌 온 구 겐크 왕국의 백성들이나 로메우 공왕 시절을 견뎌 온 구 아레나 공국의 백성들에겐 이번 사태가 생소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외세의 침략이 이렇게나 쉽게 막아지는 것이었나?
예전 같으면 젊은 남자들한테 소집령이 떨어지고, 사재기꾼들이 날뛰면서 물가가 껑충 뛰고, 군대에 가기 싫다고 야반도주했다가 붙잡혀서 옥살이하고…….
전쟁 전부터 난리가 났을 텐데 루크 통치하에선 편안하기 짝이 없었다.
이만큼 잘 싸워 주는데 국방비로 들어가는 세금이 무에 아까우랴.
공식 발표가 왕국 전역에 퍼질 때쯤.
길거리나 광장에선 음유 시인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쳐 각색한 루크와 거인들의 노래가 은은히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공식 발표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비드가 헤테룬에 방문했다.
다비드는 왕궁 분수대 앞 광장에 엉덩이를 깔고 앉으며 책상다리를 했다. 그리고 하나뿐인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이야, 이게 루크네 집이란 말이지?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니까 제법 넓은걸? 우물도 큼직하니 좋구만.”
분수대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려는 다비드의 행동에 그란데 공작이 다급히 저지에 나섰다.
“그건 마시는 물이 아닐세!”
“아, 그래? 거인국 바깥으론 나와 본 적이 없어서 뭐가 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말이야. 차근차근 익힐 테니 당장은 이해 좀 해 줘.”
“후우, 오크들을 받아들일 때보다 몇 배는 더 힘들구먼.”
“이런 몸뚱이라서 말이지. 그 부분은 미안하게 됐어.”
“사과할 것까진 없다네. 타고난 건데 어쩌겠나. 그리고 타 종족과의 공존을 시도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니 걱정 말게나.”
모건의 경우엔 아예 사절단 전용 훈련 일정까지 만들어서 대외 활동을 전담하는 인력을 길러 냈었다.
타 종족을 밟지 않거나 건물을 부수지 않기 위한 전문 훈련을 받아야 할 정도로 거인과 타 종족의 공존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란데 공작은 경비병들을 동원하여 대야에 물을 담아 오라 시켰다.
다비드가 머그잔을 쥐듯 대야를 잡고서 목을 축이는 동안 본궁에서 루크가 귀족과 궁녀를 대동하고선 분수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루크는 대야를 홀짝이는 다비드를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저번에 그 대야로 걸레를 빠는 걸 본 것 같은데 말이지.”
“푸웁!”
놀란 다비드가 물을 뿜으면서 그란데 공작을 비롯한 귀족들이 물벼락을 뒤집어썼다.
워낙에 제대로 뿜은 탓에 대형 분무기라도 분사한 것처럼 허공에 옅은 무지개가 피었다.
졸지에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된 그란데 공작이 손으로 얼굴의 물기를 훑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깨끗한 새 대야입니다, 전하. 꼭 저흴 괴롭히셔야 직성이 풀리십니까?”
“그 말 레이아한테도 그대로 전해 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런 게 있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그란데 공작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루크는 미리 설치한 단상 위로 올라가 다비드와 눈높이를 맞췄다.
“시킨 일을 제대로 수행했는지부터 들어 볼까?”
“물론 제대로 했지. 각 부락을 상대로 노략질하던 도적 떼들을 전부 소탕했어. 하는 김에 난쟁이 마을 청소도 했고.”
“각 부락에 모건이 죽었다는 소식은 전해졌고?”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남은 거인들끼리 모여서 새롭게 대족장을 선출하기로 했어.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별 문제없으면 내가 대족장이 되겠지.”
다비드에게 전투에 참가하는 대신 부락 순회를 시킨 건 그를 대족장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난쟁이 마을의 범죄자들이 부락을 습격할 때 모건은 후방의 거인들을 지키는 것보다 남쪽으로 진군하는 것을 택했다.
그로 인해 지금껏 강경파를 지지해온 거인들의 인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거인국의 여론이 강경파에 대한 악감정으로 발전할 즈음 온건파인 싸이클롭스 부족이 도적 떼를 퇴치하면서 단박에 민심을 휘어잡은 것이다.
루크에겐 거인들을 관리할 중개역이 필요했고, 그 적임자로서 다비드가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기에 그를 대족장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즉, 단 한 수로 범죄 도시 청소, 중개역 확보, 거인군에게 조급함을 심어 주는 일석 삼조의 효과를 얻어 낸 셈이었다.
다비드가 대족장 자리를 차지하는 것까진 일사천리로 진행될 예정인데 그 뒤가 문제였다.
“알고 있겠지만 우리 거인들은 따뜻한 땅에서 사는 게 소원이야. 내가 대족장으로 취임할 시에 지켜야 할 공약이기도 하고. 그 부분만 해결되면 우린 언제든지 빌로스 왕국의 휘하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어.”
오크라는 타 종족을 받아들일 때와는 180도 다른 성향을 지닌 안건이었다.
거인족의 몸집을 감안하면 인간과의 공존은 많이 힘들다.
결국 거인족을 받아들이려면 자치령을 지정해야 하는데, 현재 남아 있는 땅 중에서 거인의 의식주 소비량을 감당할 옥토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루크는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다는 양 손쉽게 해결책을 내놓았다.
“안 그래도 너희들이 살 땅을 확보해 뒀어.”
“그게 정말이야?”
“네튤 제도라고, 대륙에서 약간 동떨어진 곳에 있는 섬이 있어. 얼마 전에 현지 어인들과 교류 조약을 맺었으니 거기 들어가서 살도록 해.”
“네튤 제도… 네튤 제도, 거기 혹시 옥토버의 땅이지 않아?”
“한참 전에 쓸어버렸어. 지금은 어인 소수 민족들만 지내고 있지.”
원래는 네튤 제도를 거인국 함락을 위한 전진 기지로 삼으려 했었다.
하지만 해군 기지를 만들기도 전에 엘리나 습격 사건이 터지면서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안 그래도 네튤 제도를 개발하기 위한 대규모 인력이 필요했는데 잘 됐다.
빌로스 왕국은 전진 기지와 거인 군대를 확보하고 거인족은 따뜻한 땅에서 살 수 있게 되었으니 서로 윈윈인 셈이었다.
이주를 위한 이동 수단은 거인국 서쪽 해안의 부족이 소유한 거인 상선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대규모 이주가 될 것이고 네튤 제도에 정착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테니 아마 몇 년이란 긴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간주된다.
즉문즉답에 가까운 시원한 해결 속도에 다비드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렇구나. 어인만 사는 섬이면 거인들도 지낼 만하긴 하지. 허…….”
“반응이 영 시원찮은 것 같다만?”
“그게 아니고 이렇게 쉽게 해결되어도 되나 싶어서. 대화로 풀려고 하면 이렇게나 쉽게 해결되는데 말이야.”
“머리를 숙이는 게 죽어도 안 되는 족속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상대를 높이고 자신을 낮추면 분쟁이 생길 일은 없다.
지나가는 어린아이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로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자는 몇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항상 대우를 받고 싶어 하고, 뽐내고 싶어 하니까.
그리고 어떻게든 남의 결점만 찾아내려고 기를 쓰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행동하기 전에 한 번이라도 자신을 되돌아보면 자신이 틀렸다는 걸 알 수 있을 텐데도 그게 안 되는 자들이 많다.
모건도 그중 하나였고 말이다.
빌로스 왕국에서 거인들에게 자치령을 제공해 주기로 하면서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어졌다.
다비드는 그란데 공작이 알려 주는 대로 예를 갖추며 루크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했다.
“싸이클롭스 부족을 비롯한 거인국의 모든 부족은 지금 이 순간부터 빌로스의 일원으로서 살아갈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 * *
이로써 거인국과의 분쟁이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안건 하나를 해결하기 무섭게 또 다른 안건이 루크를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후 루크는 헤테룬 외곽에 위치한 임시 포로수용소에 들렀다.
포로수용소라곤 해도 중앙군의 막사 하나를 비워서 엘프들의 출입만 제한하고 있을 뿐 족쇄를 채우거나 체벌하는 등의 가혹 행위는 일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막사 내에 위치한 어느 방 안, 루크와 라울은 다른 이들을 물려 놓고 둘이서 대화를 나누었다.
“요정왕이 데메그리 교와 결탁해서 활동하는 중이라고 했었지. 구체적으로 말해 봐.”
“요정왕 소리아, 내 숙부 되시는 분이지. 그분은 오래전부터 자네의 힘을 두려워하고 있었다네. 항상 인간들이 엘프의 숲을 침공할 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지.”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언젠간 엘프의 숲을 손에 넣으려고 했으니까.”
“…….”
“무슨 문제라도?”
“아니, 보통은 부정하지 않나?”
“뭐, 손에 넣는다는 게 꼭 침공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니까. 종족 불문하고 전 대륙이 하나로 묶인다면 꽤 보기 좋은 세상이 되지 않겠어?”
“너무 꿈 같은 얘기라 오히려 현실성이 떨어지는군.”
“실제로 오크와 거인, 어인은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지.”
오랫동안 그어져 있던 영토의 틀만 부수어도 세상은 크게 바뀐다.
단순히 최강의 정복왕 칭호나 따자고 이 성가신 짓거리를 할 리가 없잖은가.
오크, 거인, 어인이란 성공 사례가 루크의 계획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라울은 반박할 말이 없음을 시인하듯 어깨를 으쓱였다.
“괜한 사족으로 이야기가 옆길로 새었군. 본제로 돌아와서 얘기하자면 요정왕은 오래 전부터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 왔다네.”
“모색 끝에 도달한 종착지가 데메그리 교였나 보군.”
“확실한 증거를 잡진 못했네. 단지 수상쩍은 까마귀가 요정왕의 침소에 몇 번 들락거리는 걸 목격한 게 전부지.”
“의심할 만한 상황이긴 한데, 데메그리 교와 연결시키기엔 퍼즐 조각이 많이 부족하군.”
“까마귀가 들락거린 직후에 요정왕이 고대 정령왕의 봉인석을 두 개나 손에 넣었다면?”
고대 정령왕을 제어하기 위해선 해당 정령왕의 기운이 섞인 물품이 필요하다.
아쿠아 때는 오션 서클릿에 박혀 있던 아쿠아의 눈물을 매개체 삼아 아쿠아를 통제할 권한을 얻었었다.
바람의 고대 정령왕인 윈터와 대지의 고대 정령왕인 어스.
요정왕에게 두 정령왕의 기운이 담긴 물건이 있는 걸 알고서 그를 이용할 작정으로 봉인석을 내준 게 틀림없다.
대화 도중 루크는 한 가지 의문을 느꼈다.
“엘프들이라면 현재의 정령왕을 소환할 재능을 갖추고 있을 텐데? 구태여 정령계에서 추방당한 고대의 정령왕을 확보할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말이지.”
“모르고 있나 본데, 현재의 정령왕들은 계약을 거부하고 있다네.”
“그건 처음 듣는 얘기군.”
“제2의 추방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지. 자기네들도 계속 인간계에 관여하다 보면 고대 정령왕들처럼 금기를 어기게 될지도 모르니까.”
고대 정령왕들이 금기를 어겨 추방된 것까진 루크도 알고 있다.
다만 어떤 금기를 어긴 것인지는 모른다.
라그나로스나 아쿠아에게 있어선 민감한 사안인지라 질문을 삼갔기 때문이다.
엘프의 숲이 데메그리 교와 손을 잡게 된 이상, 그 둘이 꺼려 할지라도 금기라는 게 어떤 것인지 들어 둘 필요가 있었다.
“이전부터 궁금했어. 어떤 금기를 범했길래 추방을 당하게 된 거지?”
라울은 선뜻 말하기 어려운 듯 턱을 매만졌다. 고대 정령왕을 소유한 자에게 이걸 말해도 되나 싶어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후 결국 말하기로 결단을 내렸는지 라울이 입을 달싹였다.
“기록에 따르면 라그나로스가 자신의 계약자를 죽이면서 대참사가 시작되었다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