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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재능으로 환생-160화 (160/200)

# 160

160화 카라스코의 정체(2)

결국 라울이 알고 있는 단서라곤 요정왕 소리아가 고대 정령왕의 봉인석 2개를 손에 넣었다는 것뿐이었다.

그 외에는 잡다한 군사 정보나 엘프의 숲 현 상황에 대한 정보가 오갔다.

대화가 마무리될 즈음 라울은 엘프 포로들의 처우에 대한 희망 사항을 밝혔다.

“나 말고 다른 엘프 전사들은 엘프의 숲으로 돌려보내 주게. 요정왕에게 협상 의사가 있다고 전하면 황금과 교환하자고 할 걸세.”

“윗대가리가 문제지 일반 병사들이 뭔 죄겠어. 그 부분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쓸 거 없어.”

대륙 조약에 따르면 포로 교환은 종족을 불문하고 3단계 과정을 거쳐야 한다.

1단계는 포로의 조국에 대가 지불을 할 의향이 있는지 문의하는 것.

2단계는 조국이 대가 지불을 거절할 시 포로에게 귀화 기회를 주는 것.

이 경우엔 국왕의 재량에 따라 몇 년간 수용소에 수감된 후에야 귀화 기회를 준다.

3단계는 포로 자신이 귀화를 거부할 시 사형에 처하는 것이다.

보통 3단계는커녕 2단계까지도 안 가고 1단계에서 마무리되는 편이다.

돈 몇 푼 아끼려고 대가 지불을 거절했다간 백성들의 신뢰를 잃을뿐더러 적국에 귀화한 병사들이 부메랑이 되어 자신의 목에 검을 들이밀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단, 이번 포로 반환 대상에 라울은 포함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라울을 죽이려고 일부러 사지에 파견한 요정왕이다. 서로 사이가 안 좋은 마당에 패전 장군이 되어 돌아온 라울을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라울은 자신 혼자만 남는 걸 희망했다.

“외부에는 내가 패전 책임을 느끼고 수용소에서 자결한 걸로 밝혀 주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본인이 귀국 거부를 했다고 말하는 걸로도 충분할 텐데?”

“훗, 그랬다간 본국에 남아 있는 내 처자식들이 피를 보겠지. 가족들이 라이프 트리 안에 거주하고 있는 것만 아니었어도 한참 전에 망명했을 걸세.”

라이프 트리는 엘프의 숲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거대한 나무를 말한다. 엘프의 숲의 상징이자 요정왕 일족의 거처이기도 했다. 인간 사회로 치면 왕궁이라고 보면 된다.

요정왕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걸 알면서도 도망치지 않은 건 전부 가족 때문이었다.

라울이 섣부른 짓을 하면 라이프 트리 안에 거주 중인 가족들이 죽을 것이기에 고분고분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죽은 걸로 발표하면 내 가족들은 요정왕의 안중 밖으로 밀려날 걸세.”

“죽은 척하고 후일을 도모하겠다는 거군.”

“다른 보상은 필요 없네. 가족을 되찾을 기회를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네. 그러니 후에 엘프의 숲과 부딪히게 된다면 반드시 날 기용해 주게나. 기용만 해 줘도 평생에 걸쳐 그 은혜를 갚겠네.”

제안을 받아들이면 포로 반환을 통해 수십억 루소의 자금이 흘러 들어올 것이고, 동기 부여가 확실한 상급 정령사가 전력에 포함된다.

루크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그렇다곤 해도 한때 적군의 지휘관이었던 자였는데 최소한의 감시와 족쇄 정돈 달아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마침 거의 눈에 안 띄는 활동만 하는 데다 라울이 이상한 낌새를 보이면 가차 없이 처벌을 내릴 수 있는 직책이 하나 있다.

루크는 만약을 위해 다시 한번 라울의 의사를 확인했다.

“저번에 라샤의 분노는 개인적으로 알아서 감당한다고 했었지?”

“그럴 생각일세. 갑자기 그건 왜 묻나?”

“지금 네 상황이라면 정보국 말단 자리가 가장 안성맞춤일 것 같아서 말이야.”

“직책의 높고 낮음은 상관없네.”

“정보국의 국장이 라샤인 데도?”

“…….”

라샤의 부하로 지내고 있으란 말에 라울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감당하겠다고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각오 이상의 험한 꼴이 예상되는 가운데 라울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기용과 감시를 동시에 하겠다는 거군.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게 맞긴 하지.”

“그래서 대답은?”

“감당한다고 했으니 감당해야지. 그 아이 손에 죽지 않게 최대한 노력해 보겠네.”

* * *

볼일을 마친 루크는 왕궁에 복귀했다. 그리고 라샤를 불러다가 라울과 오갔던 대화를 들려주었다.

당분간 기용 겸 감시를 위해 정보국 말단으로 두겠다고 말하자 라샤가 반응하길.

“명령대로 이행하겠습니다.”

너무 담담한 반응이라 오히려 더 살벌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루크의 밑에서 일하면서 감정보다 명령을 더 우선시하게 된 라샤다.

예전만큼 감정 기복이 심하진 않으니 자기 나름대로 어느 쪽이 루크에게 이로울지 생각하며 행동할 것이다.

이걸로 라울에 대한 처분이 일단락되면서 하루 일과가 끝이 났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침실로 돌아갔는데 생소한 광경이 루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왔네. 기다리다 지쳤다고. 오늘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사건이 있었어.”

아침에 분명 파이랑 놀아 주라고 꼬마 라그나로스를 소환해 두고 가긴 했다.

평소에는 침실에 돌아올 때마다 파이가 라그나로스를 깔고 앉은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데 오늘은 상황이 정반대였다.

파이와 라그나로스의 위치가 뒤바뀌어 있었다. 무려 라그나로스가 파이를 깔고 앉아 있는 게 아닌가.

파이는 예복에 딸린 장식용 끈에 꽁꽁 묶여선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정작 파이 본인은 당했다고 생각하지 않는지 몸을 흔들며 라그나로스와 놀아 주는 시늉을 했다.

“오구오구! 오구오구!”

승패란 건 쌍방이 승부라고 인식하고 있을 때나 성립하는 것이다.

파이와 라그나로스의 경우 조카가 삼촌을 이기고서 기뻐하는데 삼촌은 ‘어이구, 잘한다.’ 하고 치켜세워 주는 느낌이었다.

라그나로스는 인격적으로 우위에 서려는 파이의 반응을 보고선 길길이 날뛰었다.

“야! 그런 식으로 말하면 네가 봐준 것처럼 보이잖아!”

“우리 라그 잘한다! 우리 라그 잘한다!”

“하지 말라고, 이 나쁜 자식아!”

“오구오구! 오구오구!”

“크아!”

루크는 손으로 파이를 덥석 잡고선 복잡하게 얽힌 끈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새장 문을 열어 파이를 안에 집어넣었다.

“라그랑 할 얘기가 있으니까 방해하지 말고 안에 들어가 있어.”

밥 먹고 잠이나 자라는 의미에서 새장 안의 모이통에 말린 고기를 가득 채워 주었다.

파이를 등지며 의자에 앉자 라그나로스가 조그마한 팔을 교차하여 팔짱을 끼고선 향초에 등을 기대었다.

라그나로스의 등이 닿은 부분이 미세하게 녹기 시작하면서 상큼한 사과 향이 그윽하게 풍겼다.

“할 얘기라니, 뭘 물어보려고 그래?”

“엘프의 숲에 나머지 두 고대 정령왕의 봉인석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왔어.”

라그나로스의 본체를 감싸고 있는 화염이 크게 일렁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내심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반응이었다.

“놈들과 싸우게 될 확률은 얼마나 돼?”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

“만약 윈터의 봉인이 풀린다면 내가 상대하겠어.”

“사이가 안 좋은 모양인데, 괜찮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려주지 않겠어?”

해저 섬에서 아쿠아가 ‘윈터’란 이름을 언급했을 때 라그나로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과거에 라그나로스와 윈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만약 윈터와의 관계가 악화된 원인이 ‘정령은 계약자를 죽이면 안 된다.’는 금기를 어긴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루크에게도 과거의 사건을 들을 권리가 있다.

현 계약자로서 다시는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할 필요가 있으니 말이다.

라그나로스는 한참 동안 뜸을 들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별로 좋은 얘기는 아냐. 고대에 우리 고대 정령왕 넷을 모두 소환할 수 있는 괴물 같은 놈이 한 명 있었지.”

“녀석이 네 예전 계약자로군.”

“맞아. 그때는 지금보다 더한 난국이었어. 어딜 가든 전쟁이 끊이질 않았지. 놈은 우리 넷을 가지고 전쟁을 종결시키고 싶어 했어. 하지만 여러 왕국을 돌며 전쟁을 끝낼 때마다 국왕들은 감사는커녕 놈을 좀 더 이용하려고 들었지.”

햇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먼 옛날의 일이건만 마치 어젯밤 일처럼 생생히 당시의 상황을 읊는 라그나로스였다.

그는 회상에 잠기듯 잠깐 허공을 응시하다가 재차 말을 이었다.

“결국 놈은 인간 혐오에 빠지게 되었지. 차라리 그때 은거라도 생각했다면 좋았으련만…….”

“안 좋은 쪽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건가?”

“안타깝게도 말이지. 절망한 나머지 인간은 존재해선 안 되는 종족이란 사고방식을 품게 되었지. 윈터는 거기에 동조했고 난 반대하는 입장이었어.”

“아쿠아와 어스는?”

“그 둘은 중립이었어. 선악을 떠나서 명령하면 따르는 게 당연하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거든. 아무튼 놈과 윈터의 계획을 막으려면 놈을 죽이는 수밖에 없었지. 그 뒤에는 너도 알고 있을 거야. 금기를 어긴 반동으로 폭주하고, 널 섬기기 전까지 오랜 기간 방황했지.”

문헌에는 라그나로스가 대학살을 범하고 수많은 희생 끝에 봉인된 이야기만 기록되어 있다.

파괴의 화신이라 불리게 된 사건 이면에 이러한 사정이 숨겨져 있을 줄은 몰랐다.

라그나로스가 계약자를 죽이면서 아쿠아, 윈터, 어스의 계약도 끊겼고 아쿠아와 어스는 라그나로스를 막기 위해 계약자 없이 현세에 남았다가 금기 위반으로 정령계에서 추방당했다고 한다.

윈터는 계약자와 인간 말살을 획책했다는 죄가 인정되어 추방당한 것이고 말이다.

제각각 이유는 다르나 윈터 때문에 모든 고대 정령왕이 추방당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무튼 내가 데메그리 교를 싫어하는 것도 전부 옛날 일 때문이야.”

“음? 지금까지 얘기 중에서 데메그리 교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었던가?”

“말 안 했나? 내 예전 계약자가 데메그리 교를 창시한 놈이야. 카라스코 그놈이 데메그리 교를 만들지만 않았으면 골치 썩을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야.”

“잠깐, 다시 말해 봐. 지금 뭐라고?”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분명 천재 건축가의 이름을 들은 것 같은데 그를 수식하는 문구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랐다.

라그나로스는 좀 더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또박또박 그의 이름을 읊었다.

“카라스코라고 했어. 어드윈 카라스코. 데메그리 교를 만든 건 그놈이야.”

* * *

신성 제국 변두리에 위치한 어느 설원.

설원 깊숙한 곳엔 대규모 신전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환각 마법과 결계 마법을 이중 삼중으로 펼쳐 철저하게 모습을 감추고 있는 이곳은 다름 아닌 데메그리 교의 대신전이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와중에 말수레 한 대가 설원을 가로질러 대신전의 결계에 접근했다.

말수레에는 원래 무엇이었는지도 모를 시체가 그득하게 실려 있었다.

말수레를 모는 자는 실눈을 뜬 것처럼 가느다란 눈매를 지닌 젊은 사내였다.

사내는 코를 킁킁거리며 시체 썩은 내를 한껏 들이마시고선 키득키득 웃었다.

“낄낄. 살아서도 죽어서도 역겨운 게 인간이라지. 누구도 예외가 없어. 루크란 놈도, 신성 제국도, 데메그리 놈들도. 어느 하나 예외 없이 전부 역겹단 말이지.”

광인처럼 혼자 웃던 그는 데메그리 교 말단 사제의 증표를 목에 걸며 자연스럽게 결계를 통과했다.

* * *

데메그리 교 대신전 지하 안.

넓은 지하실 한복판에 녹색 점액으로 이루어진 알이 놓여 있었다.

알 주변에선 수많은 고위 사제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온갖 진귀한 마나 영약과 각종 재료를 점액에 쏟아부었다.

영약과 재료를 투입하길 어언 석 달째.

알 하나에 들어간 비용만 하더라도 도시 하나를 세우고도 남을 만한 금액에 준했다.

녹색 점액 속에는 한 여인의 실루엣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고위 사제들은 그녀가 새로운 존재로서 깨어나길 바라며 값비싼 마나 영약 원액을 통째로 들이부었다.

쏴아아아!

“이만큼 쏟아붓는 데도 일어날 기미가 안 보이는구만. 부화 예정일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났는데 말이야. 혹시…….”

“이봐, 말조심해. 여기에 얼마를 쏟아부었는지 알기나 해? 부정 탈 만한 말은 알아서 삼가라고.”

“답답하니까 하는 말 아냐. 나라고 속이 안 쓰린 줄 알아?”

“후우, 오늘 밤에 대주교님이 직접 보러 오시기로 했으니 그때까진 손 닿는 데까지 해 봐야지. 다시 영약 원액을 추출하러 가자고.”

부화 예정일을 한참 넘긴 터라 모두가 실패를 예감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대로 실패했다고 보고할 순 없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일같이 영약을 쏟아붓고 있는 실정이다.

고위 사제들이 물러나자 잠깐 알 주변이 한산해졌다.

그 순간, 알 속에 있던 여인의 눈꺼풀이 벌어지며 선홍빛 안광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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