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162화 각성 카운트 1
신성 제국 북동쪽 끝자락의 어느 화전촌.
10가구가 넘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화전촌엔 이제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한때 사람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살점과 옷 조각만이 파다할 뿐이다.
식인의 흔적 사이에 서 있는 자는 한 거인이었다.
거인이 막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옮기려던 찰나에 한 여인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흑발에 가녀린 육체, 무기 하나 없는 맨손과 독기를 품은 얼굴이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거인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화전촌 주민이라 판단하여 다시금 입맛을 다셨다.
“안 그래도 디저트가 필요했는데 제 발로 걸어 나와 주니 고맙기 짝이 없군. 젊은 여자의 피만큼 달콤한 식후주도 없지.”
거인의 온몸이 마기로 뒤덮이며 전신의 모습이 바뀌었다.
이윽고 마기가 걷혀 나가면서 뿔 3개 달린 악어 모습을 하고 있는 대형 마물로 변했다.
거인도 자신이 원래 거인이었던 자각은 있었다.
한데 어느 날 눈을 뜨니 마물이 된 채로 산속에 버려져 있었고,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있는 단서라곤 하나도 없었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거인이 의지할 곳이라곤 자신의 본능밖에 없었다.
인간의 살점과 내장을 먹고 싶다.
몸에 남아 있는 단 하나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여태껏 십수 개에 달하는 화전촌을 습격하며 배를 채워 왔다.
거인에게 있어 여인을 잡아먹는 일은 평범한 식후주를 마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입에 넣고 턱을 죄여 압력을 가하면 달콤하기 그지없는 핏물이 입안으로 흘러 들어올 것이다.
아가리를 벌려 그녀를 삼키려던 찰나.
거인, 아니 대형 마물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샌가 자신의 주둥이 끄트머리가 소멸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상황을 인지하고 나서 몇 초가 지난 후에야 통증이 밀려왔다.
“크르르르! 네년! 평범한 인간이 아니구나!”
방금까지 비루한 모습을 하고 있던 여인은 어느새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머리에는 왕관을 연상하게 하는 5개의 뿔이 돋아나 있었으며 등 뒤에는 검은색 날개가, 양쪽 손에는 기다란 손톱이 자라나 있었다.
엘리나는 전신에 마기 오오라를 피워 올리며 마물의 입속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푸욱!
엘리나의 마기 오오라에 닿은 대형 마물의 신체 부위가 삽시간에 증발하며 흔적도 없이 소멸되었다.
그녀가 5성급 마물이 되어 손에 넣은 능력은 ‘소멸의 기운’이었다. 닿는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 그 대상이 마나나 마기일 경우 기운에 닿은 에너지를 고스란히 흡수한다.
용인이 지닌 마나 이뮨이나 라그나로스의 마나번보다도 한 단계 더 위에 있는 기술인 셈이다.
그랜드마스터와 더불어 전설로만 존재하던 경지답게 압도적인 전력 차를 과시하며 대형 마물의 몸을 차츰차츰 소멸시켰다.
대형 마물은 마냥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양 꼬리를 강하게 휘둘렀다.
“뿔이 다섯 개라니… 크윽! 5성급이 어째서 날 사냥하는 것이냐? 같은 마물이잖느냐!”
콰콰콰콰!
거목의 기둥을 연상하게 하는 굵직하면서도 기다란 꼬리가 화전촌의 일부를 쓸어 담으며 엘리나에게 접근했다.
공격은 마물의 꼬리만이 아니다. 꼬리에 휩쓸린 빈집에서 파생된 각종 잔해가 엘리나를 위협했다.
하지만 정작 엘리나는 태연하기만 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건물 잔해의 물결은 말할 것도 없고, 대형 마물의 꼬리마저도 소멸의 기운에 닿을 때마다 가루가 되어 소멸했기 때문이다.
파사삭!
달구어진 철판 위에 물방울을 떨어뜨리면 금세 흔적도 없이 증발하는 것처럼 소멸의 기운에 닿은 모든 물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완벽한 공수 일체의 능력.
기운을 피워 올린 것만으로도 적의 방어를 모두 무력화시키며 가만히 있기만 해도 적의 공격을 모두 증발시킨다.
거기다 마나나 마기에 담긴 공격을 증발시키면 공격에 담긴 에너지를 고스란히 흡수하니 완벽한 능력이란 말 이외에는 달리 수식할 말이 없다.
더군다나 당하는 입장에선 조금씩 자신의 육체가 소멸되는 것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다.
죽는 것은 확정인 데다 부록으로 절망까지 따라붙는 셈이다.
대형 마물의 기다란 주둥이는 이미 소멸된 지 오래였고, 이젠 머리통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일만 남았다.
미간까지 다가온 엘리나를 두고 대형 마물은 두려움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마물 사이에 동족 포식이 웬 말이더냐! 마물이면 마물답게 인간 사냥이나 하는 게 옳은 행위이거늘!”
엘리나는 아무 감정도 담지 않은 차가운 눈빛을 띠며 발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소멸의 기운이 둘린 발로 대형 마물의 미간을 강하게 짓밟았다.
대형 마물의 머리가 차츰차츰 소멸되어 가는 와중에 엘리나가 무심한 투로 한마디 읊조리길.
“네깟 것을 동족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
파사삭!
머리 없이 몸뚱이만 남은 대형 마물의 육체는 힘을 잃고 제자리에 엎어졌다.
이걸로 볼일을 마쳤으니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대형 마물을 뒤로하며 몸을 돌린 순간, 엘리나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언제까지고 사냥개 노릇만 할 순 없어. 어서 놈의 주박에서 벗어나야 해.”
그녀라고 좋아서 마물 사냥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녀가 마물이 된 지 어언 한 달째.
현재 신성 제국 변방에선 대형 마물이 나타나 마을을 습격하고 있었다.
그에 오스카는 엘리나에게 대형 마물을 제거하러 다니라고 명하였다.
평소에는 변방의 신전 지하실에 갇혀 있다가 오스카가 명령을 내릴 때만 바깥으로 나와 대형 마물을 사냥하는 중이다.
사냥에 나설 때마다 신전 바깥으로 나올 수 있긴 하지만 오스카의 명령이 가지고 있는 구속력 때문에 주어진 명령 외에 행동은 할 수 없다.
오스카가 그녀에게 내린 명령은 두 가지였다.
-지정된 마물을 사냥하고, 사냥을 마치면 즉시 신전 지하실로 복귀할 것.
-목격자가 있을 경우 아슈타르 교 사제나 성기사면 사살하고, 일반 백성이면 무시할 것.
왜 아슈타르 교 대주교이면서 아슈타르 교 사제나 성기사는 죽여도 된다고 명령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겉으로는 그녀를 이용해 데메그리 교를 말살시킨다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거짓말인 것 같다.
무엇을 위한 거짓말이며 무엇을 위한 연기인 것일까?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오스카를 죽여야만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거다.
자유를 되찾으면 가장 먼저 자신의 근본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다.
현재 알고 있는 거라곤 자신의 이름은 엘리나이며 한 나라의 왕녀였었다는 사실밖에 없다.
이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엇을 바라고 있었는지, 사랑하는 자는 있었는지…….
현실이 답답한 만큼 자신의 근본에 대한 그녀의 기대도 커져만 갔다.
한 나라의 왕녀였다면 분명 찬란하면서도 권위 높은 삶을 살고 있었을 터.
주박만 풀리면 필시 원래 삶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원래의 삶이라는 희망 하나만 가지고 오늘도 증오를 억누르며 복귀 길에 오르는 엘리나였다.
* * *
“대주교님, 부디 신전 신축 계획을 철회해 주십시오. 자금 확보를 위해 펼친 정책들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탄원서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계획에 반대하던 주교들을 모두 내치고 나니 이번에는 성기사단의 기사 단장들이 오스카를 찾아와 간언을 올렸다.
걔 중에는 육지의 3대 신기를 소유하고 있는 ‘제국 3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신성 제국이 차츰차츰 망가져 가고 있다는 소식에 오스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슈타르 교 대주교로선 이보다 더 나쁜 소식도 없을 거다.
그러나 데메그리 교 대주교로선 이보다 더 기쁜 소식도 없다.
오스카는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는 것에 기뻐하며 계속 폭군 행세를 했다.
“시끄럽다! 모두 아슈타르 교의 위상을 세우기 위한 일이니 잔말 말고 계속 이행하거라! 빌로스 왕국이 저리 시건방지게 종교 자유화를 시행하는 것도 전부 우리가 우습게 보였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이대로 가다간 백성들이 교단의 교리에 의문을 품지 않을까 싶어 심히 염려되옵니다. 부디 굽어살펴 주십시오.”
“누가 감히 교단의 교리에 의문을 품는단 말이냐? 필시 데메그리 교의 끄나풀이 백성들을 선동하는 것일 테니 즉시 출처를 밝혀 근절해라!”
카랑카랑한 호통 앞에서 성기사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조금이라도 반항할 기미가 보이면 데메그리 교로 몰아세워 버린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솔직하게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데메그리 교에게 선동당한 게 틀림없다.
이 말 한마디면 누구든지 종교 재판소에 회부시켜 즉결 사형을 내릴 수 있다.
그야말로 반기를 드는 자를 즉시 제거할 수 있는 만능의 문구나 마찬가지였다.
오스카는 만능의 문구로 성기사들을 닥치게 만들고선 화제를 바꾸었다.
“최근 나타나고 있다던 대형 마물들은 잘 대처하고 있느냐?”
“아,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이상한 게 성기사단 말고도 마물 토벌을 하고 있는 자가 있는 모양입니다.”
“모양입니다? 정체를 모른다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죄, 죄송합니다. 대신이라긴 뭐하지만 다수의 목격 증언을 확보했습니다. 성별은 여자인 것 같고, 제국 북부 지방에선 예언 속 구세주라 불리고 있다 합니다.”
“예언이라면 그 시건방진 유언비어 말이더냐? 그년이 누구든지 간에 당장 사살해서 다시는 그따위 유언비어가 돌지 못하게 하거라.”
“네? 하지만 그녀가 한 일이라곤 마물을 처리한 것밖에 없습니다. 아무 죄목도 없이 사살하려 들면 백성들이 어떻게 볼지…….”
“못하겠다면 직접 나서겠다. 너희들도 그걸 바라고 있는 것 같구나.”
“아, 아닙니다! 저희 선에서 깔끔하게 마무리할 터이니 부디 고정하십시오.”
교단도 결국 조직 사회다.
상급자가 직접 나선다는 데 ‘예, 그러세요.’하고 뒷짐만 질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일거리를 떠맡는 건 아랫사람의 몫이었다.
그게 제아무리 꺼림칙한 일거리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하여 모처럼 대주교를 알현한 성기사들은 실망한 채로 물러나야만 했다.
성기사들이 물러난 후 오스카는 숨죽여 웃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광소했다.
“크하하하! 모든 게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구나. 이제 엘리나를 토벌하다가 역으로 당하는 일만 남았군.”
북부 지방의 대형 마물은 모두 일부러 풀어 둔 것이다.
그리고 엘리나에게 마물을 토벌하게 하여 그녀의 활약상을 조금씩 세간에 떠도는 예언과 일치하게 만들고 있다.
벌써 제국의 백성들 사이에선 엘리나를 영웅, 혹은 구세주로 여기는 자들이 많았다.
이 마당에 아슈타르 교에서 그녀를 토벌하려 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슈타르 교가 단순 정치 세력으로 전락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죄 없는 이를 공격한 것처럼 비칠 것이다.
아슈타르 교에 대한 여론이 극악으로 치달았을 때 오스카가 직접 출진하여 만인의 앞에서 엘리나에게 죽으면 영웅화 시나리오가 완성된다.
“예언 속 구세주인가. 내가 생각했지만 정말이지 교묘하기 짝이 없군. 마물이 마물을 처단해 왔다는 게 알려지면 마물 중에서도 옳은 부류가 있고, 그릇된 부류가 있다고 인식하게 될 테지. 강하고 아름다우며 옳다. 사람들이 스스로 엘리나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때부터 질서가 뒤바뀔 것이야.”
오스카는 수십 년 기다림의 정점을 찍을 순간을 기대하며 몸을 일으켰다.
한데 갑자기 등에서 불을 지진 듯한 통증이 발생했다.
통증은 점점 강렬해지더니 금세 앞가슴까지 번졌다.
“쿨럭!”
뒤늦게 가슴팍을 내려다보니 짙은 마기를 두른 손이 그의 가슴팍을 뚫고 튀어나와 있었다.
더불어 등 뒤에서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의상 수고했다고 말해 두지. 네 역할은 여기까지이니 그만 쉬거라.”
“쿨럭! 쿨럭! 누구냐… 누구길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오스카도 보통 실력자가 아니거늘 등 뒤에 누군가가 다가올 때까지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오스카는 정면에 있는 아슈타르 신 황금상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슴팍이 꿰뚫려 있는 자신의 모습 뒤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가느다란 실눈에 생글생글 웃고 있는 인상, 그리고 익숙한 모양새의 검은색 로브까지.
“우리 교단에… 잠복하고… 있었던 것이냐.”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만든 교단인데 잠복이고 뭐고 할 것 없잖아?”
“그럴 리가… 교단이 창시된 지 수백 년이 지났는데… 창시자가 살아 있을 리가… 쿠헉!”
데메그리 교는 크게 오해하고 있다.
교단 창시자는 인간을 멸망시키기 위해 교단을 창시한 것이다. 그러니 사제들은 전원 인간이 아닌 마물로 변하여 인간 말살에 충실했어야 한다.
하지만 끝까지 인간이고 싶었던 자들이 교리 일부분을 수정하여 마물을 도구 삼아 본능에 충실한 세상을 만들자는 식으로 교리를 변질시킨 것이다.
때문에 창시자는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
5성급 마물이 나타나기를. 더하여 5성급 마물이 인간 혐오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이 갖춰지기를.
사내는 오스카의 가슴팍에서 손을 빼내며 그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살아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던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내의 살가죽이 사라지며 앙상한 뼈만 남았다.
흑마법사가 스스로에게 언데드화 마법을 걸고서 죽으면 탄생한다는 언데드, 리치였다.
카라스코는 모든 장기짝이 갖추어진 것에 흡족해하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수백 년간 봐 왔지만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단 말이지. 정말이지 추한 종족이야. 아무리 봐도 존재할 가치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