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
164화 요정왕의 자격
“장벽을 허문다고 하셨습니까?”
장벽을 해체하고 싶다는 루크의 말에 그란데 공작이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루크는 설명이 부족했다 여기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했다.
“장벽이라고만 하면 헷갈릴 수도 있겠군. 정확히는 카라스코의 건축물을 전부 해체했으면 해.”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카라스코의 건축물이 가지고 있는 가치는 결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유지비만 하더라도 충격에도 끄떡없고, 세월의 풍파에도 마모되질 않으니 건물 유지에 들어가는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용도로도 카라스코의 건축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백이면 백, 열이면 열, 모두가 해체를 반대하는 게 당연하긴 하다. 그러나 다른 이도 아니고 루크의 판단이니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여겨 이유부터 듣고자 하는 것이다.
아무렴 루크가 아무 이유 없이 해체를 논했겠는가.
“어드윈 카라스코가 데메그리 교의 창시자였다는군.”
“…….”
장내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양 조용해졌다.
국정회의에 참여한 귀족 전원 입을 다물고 있건만 분위기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귀족들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추이를 살폈다. 하지만 놀란 게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것에서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회의가 난잡해질 것을 고려하여 대표격으로 그란데 공작이 질문 창구 역할을 도맡았다.
“카라스코라면 천재 건축가 카라스코를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불리기도 하지.”
“그러니까 건축가 카라스코가 데메그리 교를 창시한 장본인이란 말씀이시지요?”
“맞아.”
“하면 데메그리 교를 창시한 자가 온 대륙에 건축물을 세워 두었다는 겁니까?”
“그란데 공작, 아까부터 질문이 반복되고 있어.”
“죄송합니다, 너무 혼란스러워서 그만……. 그 정보는 어디서 얻으셨습니까?”
“라그나로스가 말해 주더군.”
혹시 몰라 아쿠아만 따로 소환하여 사실인지 물어보았었다.
그랬더니 아쿠아도 같은 답변을 내놓았었다.
두 고대의 정령왕에게 각각 따로 질문을 던졌는데도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으니 신빙성에 있어선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란데 공작은 가만 놔둘 안건이 아니라는 걸 알고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러니하군요. 지금까지 데메그리 교의 창시자가 지은 건축물에 보호받으며 살아왔다니 말입니다. 평화와 번영과는 가장 거리가 먼 종교잖습니까.”
“아이러니보단 앞뒤가 안 맞는다고 해야 맞겠지.”
“다른 꿍꿍이가 있어 건축물을 세워 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싶으신 겁니까?”
“이제부터 확인해 봐야지.”
현재의 데메그리 교와 다르게 창시 당시의 이념은 오로지 인간 말살이었다고 한다.
인간 말살을 목표로 했던 자가 세운 건축물이 인간을 지키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을 리가 없다.
고로 카라스코의 건축물이 지닌 경제적, 군사적 가치를 포기하더라도 진상을 파헤칠 필요가 있었다.
“그나마 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헥토 요새부터 해체해 보자고.”
빌로스 왕국 내에 있는 카라스코의 건축물 중 상대적으로 가장 덜 중요한 건축물을 택하라면 헥토 요새를 꼽을 수 있다.
전부터 계속 의문이긴 했다.
그랜드 마스터의 투영검에도 버티는 성벽은 과연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 걸까?
호기심 때문에 막대한 가치를 지닌 성벽을 해체할 순 없는 노릇이니 줄곧 미뤄 왔다만 이번 일로 해체할 명분이 생겼다.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궁금증을 해소할 때가 되었다.
그란데 공작을 비롯한 귀족들도 납득하는 눈치였다.
“요지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알아.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해체가 안 된다지?”
“네, 지금까지 카라스코의 건축물을 재현해 보려고 수도 없이 해체 작업을 실시했었는데 모두 실패했었지요.”
그랜드 마스터의 투영검으로도 끄떡 않던 건축물이다. 일반적인 도구로 해체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뾰족한 방법이 없어 다들 침묵을 고수하던 중.
탁자 중앙 좌석에 앉아 있던 게데스 자작이 문득 생각난 게 있다는 양 거수했다.
“안 그래도 북방 장벽으로부터 정기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거인족과의 전투 당시에 장벽이 잠깐 움직인 것을 목격한 병사가 있다더군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봐.”
“증언에 따르면 마치 성벽 자체가 살아 있는 생물체처럼 잠깐 꿈틀거렸다고 합니다. 워낙 찰나에 일어난 일이라 어쩌면 병사의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만…….”
“아니, 그런 사소한 낌새가 의외의 단서로 작용할 수도 있어. 어차피 지금으로선 아무런 단서가 없으니 가설을 세워서 하나씩 검증해 보자고.”
루크는 병사의 증언을 토대로 두 가지 가설을 세웠다.
1. 건축물 자체가 골렘 같은 마법 생명체다.
2. 무언가를 건축물으로 둔갑시켰다.
아무래도 후자 쪽에 무게가 실린다.
무생물의 생물화는 실제로 적용된 사례가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무기형 마물만 봐도 알 수 있다. 데메그리 교는 자의식이 없는 무기에 마물화 술식을 가미하여 자아를 가진 마물로 탄생시킨 전적이 있잖은가.
무기가 가능하다는 건 다른 물체에도 적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머릿속으로 가설을 뒷받침할 각종 정보를 조합해 본 결과 루크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어쩌면 건물형 마물일지도 모르겠군.”
루크의 짤막한 중얼거림과 함께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 데메그리 교의 창시자가 만든 것이니 그럴 수도 있겠군요.”
“왜 그 부분은 간과하고 있었지? 데메그리 교 하면 마물이건만.”
다들 감탄만 하고 있는 가운데 말석에 앉아 있던 레이아가 거수하며 이의를 제기했다.
“잠깐만요. 그래선 앞뒤가 맞지 않아요. 마물이라면 제가 감지했겠죠.”
날카로운 지적에 귀족들은 금세 감탄을 접고선 편두통을 호소했다.
“끄응, 듣고 보니 그렇군.”
“하긴, 마물이었다면 레이아가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지.”
가설이 무너지며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가는 듯했으나 루크가 자신의 가설에 한 가지 가능성을 덧붙였다.
“자신의 기척을 완전히 지울 수 있는 특수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의태 말인가요?”
“과거에도 분명 비슷한 능력을 지녔던 마물과 마주한 적이 있었지.”
“저도 기억나요. 프랑크 마탑에서 제가 전하를 구해 드리면서 해치운 마물이 의태 능력을 가지고 있었죠.”
“그래, 나한테 대놓고 망나니라고 욕하던 시절이었지.”
“아이참, 그 얘기는 안 하기로 약속하셨잖아요.”
“추억의 명곡은 몇 번을 듣든 질리지 않는 법이잖아?”
“후우, 이제 단물 빠질 때도 되지 않았어요?”
“전혀. 평생 놀림감 아니던가?”
“내가 정말 못 살아.”
못 살겠다고 말하는 것치곤 입가에 미소에 피어나 있는 레이아였다. 그녀를 바라보는 루크의 얼굴에도 행복한 기색이 물씬 배어 나오고 있었고 말이다.
아직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다뿐이지 둘의 관계가 진전되고 있다는 사실은 루크의 측근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갑자기 회의실 안에 감도는 달달한 분위기에 그란데 공작이 헛기침하였다.
“크흠! 크흠! 어쨌든 건물형 마물이 의태의 상위호환에 해당하는 특수 능력을 지녔다면 아귀가 들어맞긴 하군요. 하지만 검증할 방법이 없으면 그저 가설에 불과할 뿐입니다.”
“흐음, 골치 아프게 됐군. 카라스코가 의미 없이 건축물을 세웠을 린 없을 거고…….”
검증하지 못한다면 건물형 마물이니 의태 능력이니 하는 추측은 전부 무의미하다.
다들 머리에 과부하가 걸린 것인지 지반을 통째로 퍼내어 무너뜨리자고 말하거나 무너질 때까지 무작정 공격해 보자고 말하는 등 얼토당토않은 의견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왔다.
무의미한 의견이 난무하던 차에 루크는 문득 가슴팍이 뜨끈해지는 것을 감지했다.
“라그?”
웃옷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두 개의 정령석 중 하나가 뜨끈한 열을 발하고 있었다.
라그나로스가 자신을 소환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정령석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선 소량의 마나를 부여해 주었다.
화르륵!
탁자 위에 꼬마 라그나로스가 가슴을 한껏 부풀리며 으스댔다.
“거참 듣고 있자니 하나같이 갑갑하구만. 별것도 아니구만 뭘 그리 고민해?”
“꼭 건축물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크흐흐, 글쎄? 내 요구를 들어준다면 그까짓 거 못 말해 줄 것도 없지. 나 라그나로스는 앞으로 파이 녀석 돌보기 역할에서 해방해 줄 것을 요구한다!”
평소에 억눌린 게 많았는지 이때다 싶어 한껏 우쭐거리는 라그나로스였다.
루크는 한심하다는 눈빛을 띠며 라그나로스의 머리에 대고 검지를 튕겼다.
한껏 힘을 주어 튕긴 검지가 라그나로스의 머리를 직격했고, 라그나로스의 작달만 한 몸이 백덤블링을 하듯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았다.
“꾸엑!”
철퍼덕!
깔끔한 회전과 함께 탁자에 엎어진 라그나로스에게 루크가 나지막이 말하길.
“파이랑 같은 새장에 넣어 버리기 전에 말해.”
라그나로스는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며 이마를 문질렀다.
“아고고, 내 령생도 참 기구하구만. 어쩌다 이런 박한 주인을 만나 가지고…….”
“한 대로는 부족하다 이거군.”
“알았어! 알았다고! 으악! 손가락 치워! 말한다니까!”
한 대 더 때리려고 검지를 가져다 대자 기겁하며 손사래를 치는 라그나로스였다.
그러곤 우물쭈물거리며 눈치 보는가 싶더니 포기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카라스코 녀석이 세웠다던 건축물은 사실 어스가 만든 거야. 카라스코 녀석이 한 일이라곤 어스가 만든 건축물을 마물화시킨 게 전부지.”
“건물형 마물이라는 것까진 정답이었다는 거군.”
“대신 무슨 용도로 만들었는지까진 나도 몰라. 그 부분은 어스에게 묻는 게 빠를 거야. 건축물을 세운 장본인이니 무너뜨리는 것도 가능할 거고.”
어스의 봉인석이 어디에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엘프의 숲에 있는 요정왕 소리아.
그가 어스의 봉인석, 그리고 윈터의 봉인석까지 모두 가지고 있다.
즉, 어스를 손에 넣으려면 엘프의 숲으로 가야 한다는 거다.
루크는 다수의 시선이 쏟아지는 것을 감지하곤 고개를 들었다. 회의장 안에 있는 모든 귀족들이 루크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진 알고 있다. 그러나 어차피 루크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엘프의 숲에 다녀와야겠어.”
혹시나 하던 귀족들은 역시나 하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씀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번에도 비공식 방문으로 가실는지요?”
“이번에는 굳이 그럴 거 없이 공식적으로 방문해도 무방하겠지. 어차피 포로 교환 건 때문에 협상하려던 참이었으니까.”
“휴우, 그나마 안심이 되는군요. 공식 일정이라고 하셨으니 호위단을 붙이겠습니다.”
루크가 호위단 없이 동행 한두 명만 데리고 훌쩍 떠나 버릴 때마다 남아서 기다리는 자들은 항상 가슴 졸이며 지내야 했다.
세상에 루크 걱정만큼 쓸데없는 걱정도 없다지만 그래도 신하 된 입장에서 어찌 아니 걱정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이번엔 공식 일정이라 호위단을 대동하게 될 테니 그나마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루크는 지정된 호위단 외에 추가로 데려갈 사람을 지명했다.
“호위단에 레이아, 라샤, 아캄프를 추가해둬.”
“레이아와 아캄프…… 그 둘은 이해합니다만 라샤 경은 많이 껄끄러워 하지 않겠습니까?”
해저섬 사건 이후로 라샤가 요정왕 일족이란 사실이 일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렇기에 그녀를 엘프의 숲에 데리고 가는 게 괜한 부작용을 낳을까 싶어 걱정부터 앞세웠다.
그러나 명령이 번복되는 일은 없었다.
“왕명이라고 전해. 이번 여정에서 꼭 데려가야 할 전력이야.”
말을 마침과 동시에 루크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본 귀족들은 또 무언가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