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165화 요정왕의 자격(2)
덜컹!
“멀미! 멀미!”
덜컹!
“어지러워! 어지러워!”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마차 천장에 달아 둔 새장이 진자처럼 쉴 새 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새장 안에 있던 파이는 흡사 풍랑을 만난 선박 위의 승객처럼 멀미를 호소했다.
그에 레이아가 새장 문을 열어 파이를 꺼냈다. 그리고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곤 등을 쓸어 주었다.
“그래그래, 이제 안 어지럽지? 바람 쐴래?”
“레이아 좋아! 레이아 좋아!”
“후후, 귀여워라.”
맞은편 좌석에 앉아 있던 루크는 눈을 가늘게 좁히며 파이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거인국과의 일전에서 워낙에 많은 역할을 떠맡았던 탓인지 열심히 일한 반동으로 한껏 어리광을 피우는 파이였다.
레이아의 무릎 위에서 치마에 부리를 비비고 있는 파이를 두고 루크가 핀잔을 던졌다.
“새장이 싫으면 다시 안주머니로 들어가지 그래?”
“너무 그러지 마요. 저번에 고생 많이 했으니 이쯤은 봐줘야죠.”
“옳소! 옳소!”
“이리 와. 그렇게 쓰다듬는 게 좋으면 내가 쓰다듬어 주지.”
“끄악! 살려 줘요! 살려 줘요!”
루크의 손에 붙잡혀 강제로 루크의 무릎 위로 올려진 파이는 우악스러운 쓰다듬기에 비명을 질렀다.
거친 손길 아래에서 파이의 깃털이 한껏 헝클어졌다.
역방향으로 쓸리는 깃털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파이의 발버둥도 심해졌다.
하도 엄살을 피우는 탓에 바깥에서 호위 중이던 기사들이 마차 가까이 몰려왔다.
똑똑!
“전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라샤가 다가와 차창을 두드리며 안부를 물었다.
대답하기 위해 차창을 살짝 열자 루크의 손에 잡혀 있던 파이가 이때다 싶어 차창 틈으로 빠져나갔다.
“심술쟁이! 심술쟁이!”
파이의 갑작스러운 탈출에 차창 가까이 붙어 있던 라샤가 황급히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천공섬 출신 아니랄까 봐 쏜살같은 속도로 하늘로 날아오르는 파이였다.
라샤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죠?”
“놔둬. 저러다가 배고프면 돌아오겠지.”
“냇가 쪽으로 날아가고 있는데요?”
“또 물고기 비린내 묻혀서 돌아오겠군.”
별일 아니니 신경 쓸 거 없다고 말하자 라샤가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명령만 내리라고 대답하며 물러났다.
이래서 항상 원정을 떠날 땐 비공식 방문으로 가는 것이다. 공식 방문 땐 뭐만 하면 호위 기사들이 호들갑을 떨어 대니 갑갑하기 짝이 없다. 갑갑한 건 평소 왕궁 행사만으로도 충분하다.
차창을 닫고 고개를 돌리니 맞은편에서 레이아가 웃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웃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은 탓에 저도 모르게 의문이 튀어나왔다.
“왜?”
“무릎에 누우실래요?”
“됐어. 애도 아니고 무슨.”
“후후, 파이가 제 무릎에 앉은 게 부러워서 낚아채 가신 건 줄 알았죠.”
“누가 들으면 너한테 목매고 있는 줄 알겠군.”
“어머, 이건 뭘까요? 뭔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물건인 것 같은데요?”
레이아가 능청스럽게 모르는 척 연기를 하며 손을 들어 보였다.
그녀의 손가락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원정을 떠나기 직전에 루크가 준 약혼반지다.
마찬가지로 루크의 손에도 똑같은 모양새에 사이즈만 다른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틈만 나면 반지를 들어 보이며 장난을 치는데 그렇게나 좋을까 싶다.
루크는 턱을 괴며 괜히 심드렁한 투로 한마디 날렸다.
“귀여우니 망정이지.”
몽글몽글한 분위기가 감도는 마차 안과 달리 마차 바깥에선 냉랭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분명 계절은 여름이고 기록적인 폭염 속을 걷고 있건만 마차 주변만 유달리 온도가 낮았다.
아캄프는 저 멀리 날아가고 있는 파이를 보며 라샤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래?”
“평소랑 똑같아.”
“평소랑 똑같이 행복해 보인다는 거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너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저렇게 될 수 있다는 거지.”
아캄프의 손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고자 뻗어 왔다.
라샤는 그의 손을 매섭게 쳐 내며 강하게 쏘아붙였다.
짜악!
“알아. 하지만 그 상대가 적어도 넌 아닐 거야.”
평소대로라면 라샤와 아캄프도 마찬가지였다.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 온 냉전 관계는 아직까지도 유효했다.
늘 있던 일이라곤 해도 오늘따라 신경이 훨씬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평소보다 손에 더 힘이 들어가 있는 게 그 증거였다.
그녀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이유는 명백했다.
호위단에 포함되어 있는 한 사내 때문이었다.
호위단에는 라울이 마스크 헬름을 쓰고서 인간으로 위장한 채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아캄프에게 쏠려 있던 라샤의 시선이 라울에게로 옮겨 갔다.
“전하는 널 믿을지 몰라도 난 널 안 믿어.”
라울이 마스크 헬름을 바로 고쳐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다. 그땐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사과로 때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사과밖에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정말 미안하면 죽지 그래?”
“라파엘라와 마이를 구해 낸 후라면 얼마든지. 그 후엔 네 분이 풀릴 때까지 받아 줄 테니 지금은 이해해다오.”
마스크 헬름 안에서 우수에 찬 눈빛이 살짝 새어 나왔다.
비운의 주인공처럼 초연해하는 모습을 본 순간 라샤가 울컥하며 단검을 뽑아 들었다.
“이해? 지금 이해해 달라고 지껄인 거야? 인간의 피가 섞였다는 것만으로도 날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던 당신이 그따위 말을 지껄일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
동시에 굵직한 바스타드 소드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충동적으로 행동하려는 그녀를 제지하기 위해 아캄프가 서둘러 검을 뽑아 그녀를 가로막은 것이다.
아캄프는 사태의 심각성을 읽고선 장난기를 지우고 진지한 투로 말했다.
“난 네가 왕명을 어길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크윽.”
“라샤.”
묵직한 목소리에 다그치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
과거의 그녀라면 아캄프의 제지 따윈 대번에 뿌리치고서 단검을 던졌을 거다.
그러나 지금은 그 무엇보다 왕명을 우선시하고 있다. 그녀의 주군은 적진에 들어가기도 전에 내부에서 문제가 터지는 걸 원치 않을 것이다.
라샤도 그걸 알고 있기에 감정을 억누르며 단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조금이라도 허튼수작을 부리려는 낌새가 보이면 바로 죽여 버리겠어.”
진득한 살기를 풍기며 몰고 있는 말을 마차 쪽에 바짝 붙이는 라샤였다.
그녀가 내뿜는 살기가 안 그래도 냉랭했던 마차 주변의 온도를 한층 더 낮추었다.
찬바람이 한바탕 휘몰아친 후 아캄프는 마찬가지로 바스타드 소드를 거두며 라울 옆으로 말을 몰았다.
“같은 말을 해 본 경험자로서 알려드리는 건데,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줄곧 묻고 싶었네만, 자네와 라샤는 어떤 사이인가?”
“흠,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질문이군요.”
“민감한 사안이었다면 사과하지.”
“괜찮습니다. 흔한 사연이니까요. 출세에 미쳐 약혼자를 버린 못난 놈 이야기야 널리고 널린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한때 라샤에게 빠져 그녀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과거를 알고 나니 더 높은 곳에 올라갈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자신의 꿈도 이루고, 그녀의 꿈도 이루기 위해선 출세만이 정답이라 여겼다.
하지만 어느덧 뒤를 돌아보니 사랑보다 꿈이 더 커져 있더라.
결정적으로 자신의 실수로 문제가 발생한 적이 있었는데 출세에 목을 맨 나머지 라샤에게 그 책임을 떠맡긴 적이 있었다. 그게 화근이 되어 지금까지 냉전 관계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하아.”
무의식중에 아캄프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라울은 한 호흡에 불과한 한숨에 긴 사연이 함축되어 있음을 알아차리곤 질문을 삼갔다.
“내가 이런 말하면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저 아이를 포기하지 말아 주게.”
“그럴 생각입니다. 이래 봐도 소싯적엔 하니온의 찰거머리라 불렸었지요.”
“좀 더 멋진 별명으로 정정하지 그랬나.”
“수도사가 제 머리를 깎을 순 없잖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마차 안팎의 온도가 상이하게 다른 가운데 빌로스의 협상단 일행은 국경을 넘어 엘프의 숲에 들어섰다.
* * *
엘프의 숲은 정령의 신에게 축복받은 땅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정령의 축복을 한껏 머금은 땅에서 자란 나무는 다른 지역보다 2배 이상 높은 크기로 자라나며 냇가의 물은 항상 정령에 의해 정화되어 어딜 가든 청정수가 흘러넘친다.
루크를 태운 마차가 엘프의 숲에 들어서자 국경 수비를 맡고 있는 엘프들이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엘프들은 땅바닥에 착지함과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갖췄다.
“빌로스의 국왕이시여, 엘프의 숲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외람되오나 이 앞은 마차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없으니 저희가 준비한 말을 타고 이동하시지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이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종족답게 길을 뚫지 않고 생활하고 있었다.
마차가 지나갈 만한 길이 없으니 여기서부턴 말을 타고 이동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수풀 사이에서 또 다른 엘프 무리가 말을 끌고서 나타났다.
“히이잉!”
엘프들이 끌고 나온 말은 평범한 말과는 달랐다.
날개 달린 말.
깨끗한 물이 흐르는 곳에서만 서식한다는 페가수스였다.
왕국마다 비행 부대를 갖추고 있듯 엘프의 숲에선 페가수스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루크는 레이아와 함께 마차에서 내려 각자 페가수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엘프 수비 대장과 함께 엘프의 숲으로 들어가며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미리 밝혀 두지만 우린 그쪽을 우호적으로 대할 생각은 없어.”
공식적으로는 엘프의 숲이 ‘빌로스 왕국이 마음에 안 들어서 침공했다.’는 걸로 되어 있다.
그 이면에 라울을 죽이기 위해서란 이유가 숨겨져 있다고 한들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빌로스 왕국에 군사를 파견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엘프 수비 대장도 이해한다는 듯 스스로 고개를 낮췄다.
“전하께서 화를 내시는 건 당연합니다.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지요. 저도, 요정왕께서도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뻔뻔한 대답이군.”
“아, 다소 오해의 여지가 있는 대답이었군요. 해명하자면 이번 일은 라울의 독단이었습니다.”
“자결하기 전에 라울이 대답하기론 모두 요정왕이 시킨 일이라고 했다만.”
“하하하, 당연히 그렇게 말했겠지요. 그거 아십니까? 라울은 데메그리 교와 내통하고 있었습니다. 데메그리 교의 명령에 따라 빌로스와 엘프의 숲을 이간질하기 위해서 멋대로 병력을 이끌고 출전한 것이지요.”
루크는 호위단 끄트머리를 힐끗 보았다.
마스크 헬름을 쓰고서 따라오고 있는 라울이 건틀릿을 꽉 말아 쥐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엘프의 숲은 처음부터 침공에 대한 책임을 라울에게 덮어씌울 작정으로 변명까지 모두 준비해 둔 것이다.
어차피 자결한 자라 반박하지 못할 테니 거리낌 없이 라울에게 모든 잘못을 덮어씌우고 있었다.
루크의 시선을 느꼈는지 라울은 가볍게 손을 저으며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엘프 수비 대장은 라울이 있으리라곤 꿈에도 모른 채 계속 나불거렸다.
“저희도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해두었습니다. 대륙 조항에 따라 놈의 가족들에게 처벌을 내릴 예정이지요. 내부 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깊이 반성하고 있으니 노여움을 푸시고 국가 간 관계를 회복할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완전히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발언이었다.
가족을 위해 전부 저버릴 각오로 임하고 있는 자가 가족의 처벌 소식을 듣고 어찌 제정신을 유지하랴.
아니나 다를까, 등 뒤에서 대량의 마나가 휘몰아치고 있는 낌새가 전해져 왔다.
정확히 라울이 있는 방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