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166화 요정왕의 자격(3)
바로 등 뒤에서 몰아치는 마나의 기류를 못 알아차릴 자가 있을까.
루크를 비롯한 모두가 뒤를 돌아보며 마나 기류를 일으킨 장본인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라샤가 단검에 마나 블레이드를 부여했다.
“반성하는 것치곤 말투가 시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아?”
마나 블레이드의 강렬한 존재감에 라울의 기척이 완전히 지워졌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라울이 마나를 거두어 정령 소환을 멈추었다.
라울이 실책을 범한 것을 깨달은 라샤가 임기응변으로 마나 블레이드를 피워 그의 기척을 가려 준 것이다.
아캄프는 라샤의 행동이 연기임을 알아차리곤 장단을 맞춰 주었다. 흥분한 척하는 라샤에 맞춰 저 또한 바스타드 소드를 옆으로 뻗어 라샤를 가로막았다.
“국왕 전하의 앞이다. 중요한 일정에 찬물을 끼얹는 행동은 삼가지그래?”
“아캄프, 너도 빌로스의 기사라면 공감할 텐데? 저게 반성하는 자들의 태도라고 생각해?”
“판단은 전하께서 하시는 거지 우리 기사들의 몫이 아냐, 라샤.”
“쳇.”
정말 아캄프가 만류한 탓에 냉정을 되찾은 듯 혀 차는 소리를 낸 후에야 단검을 거두는 라샤였다.
아캄프의 적절한 맞장구 덕에 모든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라샤의 이름을 들은 엘프 수비대장은 라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곤 기억을 헤집어 십수 년 전에 엘프의 숲을 떠난 라샤란 존재를 떠올려냈다.
“라샤… 라샤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훗, 아무것도 아닙니다. 대차게 숲을 등지고 떠나시더니 제법 출세하셨군요, 라샤 양.”
“확실한 건 네깟 것보단 훨씬 높은 위치에 있다는 거지.”
“오해 마시길. 제 주제에 감히 빌로스의 위명 높은 마나마스터께 무례를 범하겠습니까.”
말 자체는 예의를 갖추는 것 같았지만 말투는 비꼬는 듯한 기색이 다분했다.
숲을 등지고 떠난 자가 타국의 기사로서 행세하는 게 우습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근본 없는 년’이라고 조롱하고 있는 것이었다.
엘프 수비대장의 비아냥을 들은 라샤가 한쪽 눈썹을 씰룩였다.
이번에는 연기가 아니라 진짜로 화가 난 것이었다. 그러나 루크의 얼굴을 한 번 보고선 금세 감정을 갈무리하며 안정을 되찾는 라샤였다.
라샤에게 있어선 주군의 체면이 곧 루틴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더 험악해지기 전에 루크가 직접 나섰다.
“라샤의 말에 틀린 점은 없다고 생각한다만? 내부 단속을 못한 건 그쪽 사정이야. 내부 단속을 못한 거니까 이해해 달라는 건 어순이 안 맞지 않나?”
“물론 그 부분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해 드릴 것입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요정왕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로 했으니 라이프 트리로 가시지요.”
한바탕 소란이 벌어질 뻔했으나 라샤의 임기응변으로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하마터면 큰 실수를 저지를 뻔한 라울은 조용히 라샤의 뒤에 바짝 붙으며 사과의 말을 전했다.
“미안하네. 빚을 졌군.”
라샤는 뒤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매몰차게 말했다.
“착각하지 마. 그쪽을 위해서 한 행동이 아냐.”
잠깐 호위단 내에서 불안정한 기류가 흘렀지만 라샤의 적절한 대처로 금세 안정감을 되찾으면서 무난하게 엘프의 숲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라이프 트리.
다른 말로는 ‘그랜드 우드’라고도 불리는 이 나무는 높이가 장장 100미터에 달하고, 둘레가 5킬로미터에 달하는 엘프의 숲의 상징이었다.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눈앞에서 보니 압도적인 존재감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거목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거대한 데다 나무 자체가 품고 있는 신성함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도 모르게 엄숙함을 갖추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이 나무가 자기 의지를 가지고 움직인다는 것이다.
나무 기둥 정중앙이 사람 얼굴과 같은 형상을 띠고 있었고, 유달리 기다란 나뭇가지 두 개가 팔 역할을 도맡고 있었다.
엘프 수비대장은 라이프 트리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으며 간곡히 청을 올렸다.
“위대하신 라이프 트리여. 저희를 요정왕의 거처로 올려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늘로 향해 있던 라이프 트리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나뭇결이 마치 주름과도 같아서 마치 인자한 인상의 할아버지를 보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라이프 트리는 엘프가 아닌 자들을 한 번 훑고선 푸근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곤 기다란 나뭇가지 팔을 아래로 늘어뜨려서 손바닥을 바닥에 대었다.
엘프 수비대장이 옆으로 물러나며 루크에게 손바닥에 올라갈 것을 권했다.
“여기서부턴 라이프 트리께서 옮겨다 주실 겁니다.”
루크 일행은 라이프 트리의 손바닥 위에 올라섰다. 인간에겐 워낙에 생소한 이동 수단이라 호위기사 몇몇은 긴장한 기색을 띠었다.
그에 엘프의 숲 출신인 라샤가 불안해하는 이들을 안심시켰다.
“라이프 트리 거주자는 웬만하면 라이프 트리의 손을 타고 위로 이동해요. 가끔씩 급하면 페가수스를 타고 날아가기도 하지만요.”
아캄프는 라샤의 설명을 듣고선 장난삼아 농담을 던졌다.
“트리가 재채기라도 하면 죄다 짜부러지겠군.”
“농담을 하려면 좀 재미있게 하지그래?”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아 있길래 그냥 해 본 말이야.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라이프 트리, 이 녀석 눌러 버려.”
지극히 사적인 부탁인지라 라이프 트리가 들어 줄지 의문이었는데, 놀랍게도 라이프 트리는 새끼손가락에 해당하는 가지를 구부리며 아캄프의 몸을 꾸욱 눌렀다.
졸지에 나무에 깔린 원숭이 꼴이 되어 버린 아캄프였다.
“아야야야! 트리 씨! 아니, 트리 님! 농담 한마디 한 거니까 이거 좀 치워 주십쇼!”
라샤의 명령은 칼 같이 듣더니 아캄프의 경우엔 간곡히 부탁하는데도 들은 척도 안 했다.
보는 눈도 있고 하니 라샤도 잠깐 혼쭐만 내준 후에 다시금 라이프 트리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만하면 됐겠지. 손가락 치워 줘. 그리고 슬슬 요정왕의 거처로 옮기도록 해.”
아캄프의 말을 무시하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라샤의 명령에는 금세 반응하는 라이프 트리였다.
루크 일행을 태운 손바닥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며 점점 고도가 높아졌다.
요정왕의 거처로 가는 동안 루크는 라이프 트리의 행동 방침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라이프 트리를 다루는 데 특별한 방침이라도 필요한가 보지?”
“아, 그거 말인가요? 특별한 방침이랄 건 없어요. 라이프 트리는 엘프들의 말밖에 안 듣거든요.”
“그런 것치곤 수비대장과 네 말투에 차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역시 날카로우시네요.”
엘프 수비대장은 라이프 트리에게 ‘부탁’을.
라샤는 라이프 트리에게 ‘명령’을.
라이프 트리가 움직이게 만든 것은 똑같으나 원하는 바를 전달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었다.
라샤는 옆으로 늘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꼬며 잠깐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라이프 트리는 생명을 해치는 일은 하지 않아요. 하지만 한 가지 예외가 있긴 하죠.”
“예외라면?”
“요정왕의 자격을 갖춘 이의 명령이 떨어지면 학살도 마다치 않죠.”
마지막 말은 루크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리였다.
라샤는 인간과 엘프의 혼혈이다.
그렇다고 해서 혼혈이 왕의 자격을 갖추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하면 어릴 때부터 언제든지 라이프 트리를 이용해 자신을 차별하던 이들을 벌할 수 있었다는 게 된다.
할 수 있었음에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터.
루크는 지금까지의 관찰 결과를 통해 라이프 트리의 특성을 대강 알아차렸다.
“명령에 우선순위가 정해져 있다는 거군.”
“네, 라이프 트리는 요정왕의 명령을 우선적으로 따르죠.”
“그런 거면 라이프 트리를 상대하게 될 경우도 계산에 넣어 둬야겠어.”
라이프 트리는 만만치 않은 상대이지만 루크에겐 불안해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반갑게 느껴질 따름이다.
라샤에게 요정왕의 자격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라이프 트리의 최상단은 풍성한 잎사귀로 덮여 있었다. 잎사귀의 크기가 어찌나 큰지 잎사귀 한 장이 어지간한 주택 외벽에 준하는 너비를 자랑했다.
라이프 트리의 손에서 내려 최상단의 나뭇가지 위에 올라서자 잎사귀에 가려져 있던 요정왕 일족의 궁전이 시야에 들어왔다.
라이프 트리 위에 있는 궁전답게 궁전의 소재는 전부 라이프 트리의 잎사귀였다.
잎사귀를 엮어서 만들었기 때문인지 건물 전체가 녹색이었고, 싱그러운 녹음이 짙게 서려 있어 마치 궁전이 아니라 건물 모양의 숲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루크는 널찍한 나뭇가지 위를 걸어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기둥이 길게 늘어진 넓은 공간 안에선 금빛 머리카락을 지닌 장발 중년 사내가 나무로 깎은 왕좌에 앉아 있었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네, 빌로스의 국왕이여. 내가 요정왕 소리아일세.”
루크의 시선에 비친 소리아의 첫인상은 ‘위선’이었다.
인상만 놓고 보면 사람이 좋아 보여도 너무 좋아 보인다.
오랫동안 다른 이들의 위에 군림하고 있는 자를 봐 왔는데, 착해 보이는 인상치고 정말로 착한 성격을 지닌 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아무리 좋은 인상을 가진 자라도 왕의 자리에 있다 보면 어느 정도 고약한 인상이 새어 나기 마련이다.
그 부분은 루크도 예외가 아니며 루크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백성이 100명이라면 가치관도 100개가 있다. 어떤 정책을 펼치든 불만의 목소리는 뒤따르기 마련이다. 불만까지 모두 떠안아야 하는 위치인 만큼 티끌 없이 순수한 인상을 가지기란 불가능하다.
한데도 소리아의 인상은 티끌 한 점 없이 순해 보였다.
어지간히 뻔뻔하지 않고선 가질 수 없는 인상이었다.
루크는 소리아의 속을 떠보기 위해 운을 띄웠다.
“피차 할 말은 정해져 있을 텐데 인사치레는 생략하도록 하지. 우리 빌로스의 요구조건을 말하겠어. 포로 한 명당 2억 루소. 거기에 배상금으로 1,000억 루소. 총 7,000억 루소를 청구하겠어.”
일부러 원래 시세의 2배를 불러 소리아의 반응을 살폈다.
총 7,000억 루소.
자급자족에 화폐 없이 물물교환을 기본 경제 수단으로 삼고 있는 엘프의 숲이다. 폐쇄적인 성향을 띠고 있어 수출입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엘프들에게 7,000억 루소를 지불할 능력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아니나 다를까, 소리아도 7,000억 루소까진 예상치 못했는지 표정이 다소 일그러졌다.
“여보게, 루크 국왕. 듣기론 정해진 시세가 있는 걸로 아네만.”
“정말로 반성하고 있다면 기꺼이 지불할 수 있을 텐데?”
“수비대장으로부터 미리 들었겠지만 이번 엘프군의 출전은 라울의 독단이었네. 그 부분을 감안해 주지 않겠나?”
“조건에 따라 포로 한 명당 1억 루소, 배상금은 없는 걸로 해 줄 수도 있어.”
“갑자기 후해지는 걸 보니 쉬이 들어 줄 수 있는 조건은 아닌가 보군. 일단 말해 보게.”
“어스와 윈터의 봉인석. 그 두 개를 넘겨주면 3,000억 루소로 만족하고 물러나도록 하지.”
처음부터 무리한 금액을 요구한 것은 봉인석을 언급하기 위한 초석에 불과했다.
루크는 조건을 내밂과 동시에 소리아의 안색을 살폈다.
소리아의 동공이 잠깐 흔들리는가 싶더니 금세 차분히 가라앉았다.
두 고대의 정령왕을 손에 넣고 싶어서 데메그리 교와 결탁한 자이다. 필시 봉인석을 지키기 위해 모르는 척 발뺌할 터. 그렇다면 현재의 무리한 요구를 계속 고집하며 소리아의 심기를 건드릴 생각이다.
소리아가 참지 못하고 데메그리 교 사제들에게 부탁하여 봉인을 풀면 루크의 승리.
협상기간 내내 인내심을 잃지 않고 합의점을 끌어내면 소리아의 승리.
상대방의 심기를 긁는 것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는 루크였기에 인내심 싸움에선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한데 소리아로부터 무척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부정할 줄 알았건만 예상외로 소리아는 시원스레 봉인석의 존재를 인정했다.
“어째서 무리한 요구를 하나 했더니 전부 봉인석 때문이었구먼. 뭐, 좋네. 둘 다 가져가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