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167화 요정의 무덤
라울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소리아는 봉인석의 존재를 철저히 감추고 있다고 했다.
왜냐하면 봉인석을 손에 넣었다는 게 알려지면 봉인석의 출처에 대한 의문을 품는 자가 늘어날 것이니까.
계속 숨기는 것에도 한계가 있는 법. 소리아 입장에선 사실을 계속 숨기는 것이 신상에 이롭다.
지금까지 잘 숨겨 왔으면서 왜 이제 와서 솔직하게 밝히는 걸까?
루크는 위화감을 느끼며 의문을 표했다.
“봉인석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건가?”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구먼. 내게서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겐가?”
“봉인석이 갑자기 솟아났을 린 없을 거고. 봉인석의 출처를 말해 보실까?”
“하하하, 뭔가 했더니 출처에 대한 걸 신경 쓰고 있었던 거군. 오해를 하고 있는가 본데, 난 한 번도 내가 봉인석을 가지고 있다곤 하지 않았네.”
“그럼 누가 가지고 있지?”
“라울이 데메그리 교와 내통 중이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가?”
일순 루크의 시선이 호위단 끄트머리로 향했다.
얼토당토않은 누명에 라울이 또 한 번 발끈하지 않을까 싶어 확인 차 훑어본 것이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정도로 둔하진 않은지 이번에는 얌전히 고개를 떨구고 있는 라울이었다.
루크는 라울로부터 시선을 거두며 소리아와의 대화를 이어 나갔다.
“내부 단속이 미흡했다는 얘기라면 이미 들었지.”
“데메그리 교가 라울에게 어스와 윈터의 봉인석을 건네줬던 모양일세. 아무래도 라울은 봉인석을 아내에게 맡겨 둔 것 같더군.”
“라울의 가족은 그쪽이 구속하고 있다고 들었다만?”
“라울의 아내라면 옥에 가둬 두었다네. 하지만 그녀도 봉인석을 가지고 있지 않더군.”
“빙빙 돌려서 말하는 거라면 질색이야. 그래서 봉인석은 누가 가지고 있다는 거지?”
독촉 속에서 소리아가 현 상황을 간략하게 요약하게 전달했다.
“라울의 아내가 딸에게 봉인석을 넘겨준 것 같네. 그의 딸은 요정의 무덤에 숨어 있다네.”
요정의 무덤이라는 말에 여태껏 잠자코 있던 라샤가 격한 반응을 보였다.
“요정의 무덤이라니! 그곳은 어린애가 들어갈 만한 곳이 아니에요!”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인 나머지 장내의 시선이 라샤에게 쏠렸다.
라샤의 존재를 보고서도 모른 척하고 있던 소리아였으나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잡종 녀석아, 누구 허락을 맡고 함부로 짖어 대느냐?”
“왕이면 왕답게 품위에 어울리는 말투를 쓰셔야지요. 난 더 이상 당신 조카가 아닐 텐데요?”
“남매가 똑같이 엘프의 숲에 폐만 끼치는구나. 네 의붓오빠는 한술 더 떠 데메그리 교에 혼을 팔았지. 둘 다 인간 어미의 밑에서 자라서 그런지 근본 없이 행동하는 건 똑같군.”
그간 라울과 라샤가 말을 삼가면서 흐지부지 넘어갔던, 둘 사이의 관계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의붓오빠라 칭한 걸로 보아 라울과 라샤는 이복남매였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엘프인 아버지가 같은 엘프를 첫 부인으로 맞이하여 낳은 아이가 라울, 그 후에 부인과 사별하고서 인간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여 낳은 아이가 라샤였던 것이다.
즉, 소리아가 라울의 숙부라 했으니 라샤에게 있어서도 숙부인 셈이었다.
어미를 모욕하는 말을 듣고 가만히 넘어갈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아까 전에 라울이 폭주할 뻔했던 것처럼, 라샤도 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나를 끌어 올리려 하였다.
동시에 루크가 단상 위로 올라가며 검지로 검갑을 강하게 튕겼다.
티잉!
“이봐, 우린 그쪽의 실수를 감안해서 포로 교환이며 협상이며 많이 양보해 주고 있어. 그런데 그딴 식으로 나오면 안 되지. 안 그래?”
검갑을 튕긴 것은 경고였다.
전투, 나아가 전쟁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라고 말한 셈이다.
소리아는 루크와 잠깐 눈을 마주치다가 능청스럽게 사과의 말을 입에 담았다.
“이거 실례했군. 이젠 내 조카가 아닌 네 기사였지. 네 기사를 모욕한 것에 대해 사과하마. 이걸로 됐나?”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였으나, 더 이상 관계없는 주제 때문에 시간 낭비하고 싶진 않았다.
루크는 왕좌에 앉아 있는 소리아를 내려다보며 고압적인 투로 말했다.
“며칠 말미를 주도록 하지. 무덤인지 뭔지 하는 곳에서 라울의 딸을 데리고 나오도록. 봉인석을 가져오면 배상금을 줄여 주겠어.”
“나도 그러고 싶네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세. 이미 수십 명의 엘프 정예군을 투입했는데도 소식이 없다네.”
“아까 어린애가 들어갈 만한 곳이 아니란 말이 들렸었지. 그것과 관련이 있나 보지?”
“요정의 무덤은 역대 요정왕들과 그분들이 부리던 정령들의 정령석을 안치해놓은 곳일세. 당연히 도굴을 시도하려고 하는 자들도 많았지. 그들을 막기 위해 선조들께서 요정의 무덤에선 마나가 동결되도록 수를 써두셨다네.”
마나를 쓰지 못한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훈련을 거친 자라면 마나를 쓰지 못한다 하더라도 무덤의 함정쯤은 피할 수 있을 터.
특히 엘프들은 무덤의 구조를 알고 있을 테니 어린애 한 명 잡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이다.
소리아의 설명이 부족했다는 것을 입증하듯 라샤가 날이 선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마나 동결만이 문제는 아닐 텐데요? 전하, 요정의 무덤은 말만 무덤이지 미궁이나 마찬가지예요. 길이 복잡한 데다 곳곳에 고대 대지의 정령왕이 만들어 준 거상들이 수호자로서 배치되어 있죠.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건…….”
라샤는 그 존재를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힘겨운지 심호흡을 한 후에야 말을 이었다.
“무덤 가장 안쪽에는 바실리스크가 있어요.”
태초에 신이 만든 3대 고대 병기가 있었으니.
고대인들은 3대 고대 병기를 두고 각각 타이탄, 레비아탄, 바실리스크라 불렀다.
돌로 이루어진 이 뱀은 몸길이가 장장 50미터에 달하며 눈을 마주치는 자를 돌로 만들어 버리는 마안을 지니고 있었다.
마나 없이 바실리스크를 상대하는 건 맨손으로 맹수를 때려잡으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는 거다.
때문에 요정왕의 시신을 안치할 땐 특별히 바실리스크와 친분이 두터운 현 대지의 정령왕이 일시적으로 현신하여 엘프들을 대신해 바실리스크에게 양해를 구해 준다고 한다.
무덤의 위험성을 막론하고 라샤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그 어린아이가 도주로로 요정의 무덤을 택했다는 게 이상하네요. 전투 능력이 일절 없는 아이라면 지하 1층조차도 통과하지 못해요.”
“하지만 실제로 그 아이는 거상들의 공격을 받지 않고 지하로 내려갔지. 우리가 할 일이 없어서 정예군을 희생해 가며 무덤을 수색하고 있는 줄 아나? 그 아이가 무덤 밑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희생을 감수해 가며 수색을 하고 있는 걸세.”
라울의 딸이 어스, 윈터의 봉인석을 가지고 요정의 무덤으로 갔다는 것까진 사실인 것 같다.
무덤의 수호자인 거상들은 어스가 만들었으니 어스의 봉인석을 지닌 라울의 딸을 공격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추측건대 라울의 부인이 소리아로부터 봉인석을 훔쳐냈고, 그 과정에서 발각되어 딸에게 봉인석을 맡기고서 먼저 도망가라고 한 게 아닐까 싶다.
소리아와 데메그리 교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어찌 됐든 루크로선 어스가 필요하다.
엘프들에게 맡겨선 평생 가도 못 꺼낼 테니 차라리 직접 가서 데려오는 게 빠를 것 같다.
루크는 일절 고민 없이 무덤행을 택했다.
“그런 거라면 우리도 수색에 참가하도록 하지.”
내심 루크를 이용하고 싶었던 것인지 소리아는 저도 모르게 본심을 내비쳤다.
“그렇게 해 주겠나? 그쪽에서 나서 준다면야 우리로선 바랄 게 없네만.”
“오늘은 쉬고 내일 출발하는 게 좋겠군. 손님 대접에서만큼은 반성의 기미가 보이길 바라지.”
소리아가 얼핏 본심을 내비치면서 급한 건 엘프 측이라는 게 밝혀졌다.
어쩌겠는가. 급한 쪽이 굽혀야지.
기분 좋게 웃고 있던 소리아였으나 루크 특유의 속을 살살 긁는 말로 대화가 마무리된 탓에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막타 치고 빠지는 것보다 약 오르는 것이 있을까.
소리아의 일그러진 얼굴을 뒤로하며 손님 대접을 받기 위해 단상 아래로 내려가는 루크였다.
* * *
루크 일행이 시중을 드는 엘프들의 안내를 받으며 숙소로 떠났고, 궁전 안에는 소리아만 남아 있었다.
소리아는 주변에 사람을 물리고선 턱을 괴고 앉은 채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잠깐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데 기둥 뒤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검은 로브를 두르고 있는 데메그리 교 사제였다.
“급전이다. 오스카 대주교께서 돌아가셨다.”
생각지도 못한 속보에 소리아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오스카가 죽어? 그럼 윈터와 어스의 봉인을 푼다는 계획은? 내게 두 고대의 정령왕을 주기로 했던 건 어떻게 되지?”
“데메그리 교 대신전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더군. 따로 지시가 없었으니 원래 계획대로 움직이면 되지 않겠나.”
“후우, 괜히 엘프 간 떨어지게 하는군.”
“듣자 하니 루크 국왕도 봉인석을 원하고 있는 것 같던데 말이지.”
“그래, 봉인석을 대가로 배상금을 깎아주겠다고 했었지. 설마 빌로스 왕국이 고대 정령왕의 봉인을 푸는 법을 알아낸 건가?”
“그건 아닐 걸세. 데메그리 교에서도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 사실이니 유출될 가능성은 전무하다네. 게다가 루크 국왕이라면 기술을 알아냈다 하더라도 실행하지 않을 걸세.”
봉인석을 풀기 위해선 각종 희귀재료와 산 제물이 필요하다. 여기서 산 제물이란 마나유저였다. 단언컨대 루크란 사내는 산 제물을 바쳐가며 봉인석을 풀 정도로 막가는 성격은 아니다.
소리아로선 루크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어스와 윈터의 봉인석을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제아무리 루크 국왕이라도 마나 없이 바실리스크를 상대하는 건 무리일 걸세. 어쩌면 바실리스크가 있는 층에 가기도 전에 죽을지도 모르지.”
“루크 국왕이 알아서 죽어 준다면 그보다 더 좋은 상황은 없을 테지. 하지만 루크 국왕이 정말로 어스와 윈터의 봉인석을 찾아오면 어쩔 거지? 눈 뜨고 봉인석을 넘겨주는 꼴이 될 텐데?”
“그때를 대비해서 손을 써두면 될 일일세. 그 부분은 내가 알아서 준비해놓도록 하지.”
“아무쪼록 좋은 결과를 들을 수 있길 기대하겠네.”
데메그리 교 고위 사제가 까마귀로 변하며 창문 바깥으로 날아갔다.
고위 사제가 떠난 직후 소리아는 저도 모르게 다리를 덜덜 떨었다.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줄곧 허세를 부리고 있었으나, 보는 눈이 없어지자마자 억누르고 있던 공포심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어찌나 다리가 강하게 요동치는지 손으로 강하게 누른 후에야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소리아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일개 인간 따위가 어떻게 그만한 존재감을……. 정말 알맹이가 인간이긴 한 건가?”
라샤와 언쟁을 벌일 때 잠깐 루크가 단상 위로 올라와 소리아에게 살의를 내비쳤었다.
지근거리에서 접한 루크의 위압감은 가히 공포 그 자체였다.
일순 환각으로 루크가 거인보다도 큰 존재로 보였을 정도다.
절대로 살려 둬선 안 된다.
그만한 존재가 진심으로 엘프의 숲을 노린다면 절대 막을 수 없으리라.
“요정의 무덤만이 희망이야. 놈은 거기서 죽어야 해. 그것 이외에는 놈을 막을 방법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