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171화 현명한 자는 싸우지 않는다 (2)
눈을 마주친 자를 돌로 만들어 버린다는 석화의 마안.
뱀 특유의 가느다란 동공에서 보랏빛 안광이 뿜어져 나와 루크와 라울의 몸 위에 쏟아졌다.
두 사람의 몸 주위에만 색을 입힌 라이트 마법을 쬔 듯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루크와 라울은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기 위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시선이 아래로 향해 있다 보니 바실리스크의 움직임을 세세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바실리스크의 육중한 위압감 앞에서 라울이 두 손을 위로 들며 싸울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무덤의 수호자여, 요정왕 일족의 라울일세. 피에 맹세코 선조들의 관짝을 뜯어내러 온 것이 아니니 마안을 거둬주게.”
“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가장 쉽게 판별하는 방법이 뭔 줄 아나?”
“판별할 방법을 가지고 있다면 꼭 좀 그리해 줬으면 좋겠군.”
“그냥 죽여 버리는 거란다. 그러면 골머리 싸매면서 진실 공방을 펼치지 않아도 되지.”
“방금 발언은 잊어 주게. 내가 큰 실언을 했군.”
실없는 대화가 오가는 동안 루크는 해왕검의 손잡이 위에 손을 올렸다.
바실리스크와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쉽지 않겠지만 아주 못 이길 것 같진 않다.
바실리스크가 무덤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는 이상 무덤을 떠받치는 기둥과 역대 요정왕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봉분을 파괴하진 않을 터.
이는 곧 바실리스크에게 있어 장애물로 작용할 것이고, 기동력의 차이를 얼마간 줄여 줄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싸우는 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다.
거상과 달리 말이 통하는 존재인 만큼 협상의 여지가 남아 있었다.
루크는 해왕검을 뽑아 아래로 늘어뜨리며 말을 꺼냈다.
“엘프 소녀가 이곳에 들어온 걸로 알고 있다. 여기 있는 라울이 그 아이의 아버지이니 아이를 데리고 나와서 확인시켜 주면 모든 게 명확해질 테지.”
“네 말대로 어스의 봉인석을 쥔 아이 한 명을 데리고 있긴 하지. 내 직접 물어보마.”
물어본다더니 동작을 멈추며 꿈쩍도 않고 가만히 있는 바실리스크였다.
대체 어떻게 질문을 한다는 건지 알 수 없는 가운데, 기능이 정지한 것처럼 가만히 있던 바실리스크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비의 이름이 라울. 그래, 본인 스스로 그렇게 밝혔다. 이봐, 라울. 네 딸은 자기 아빠가 죽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주겠나?”
“소리아의 눈을 속이기 위해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네. 못 믿겠다면 딸더러 내 모습을 직접 확인해 보라고 하게.”
“그쪽이 더 빠르겠군. 바깥으로 나오거라.”
겉보기엔 혼자 중얼거리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가 싶었는데 별안간 바실리스크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던 보랏빛 안광이 걷혔다. 사실 여부를 확인코는 침입자 대우에서 손님 대우로 전환한 것이다.
정작 아이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는데, 대체 어디에 대고 대화를 나눈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안이 일시적으로 기능을 중단함과 동시에 바실리스크가 아가리를 쩌억 벌렸다. 생물이 아니다 보니 입안이며 몸속까지 모두 돌로 이루어져 있어서 흡사 눈앞에 새로운 동굴 하나가 떡하니 탄생한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벌어진 바실리스크의 아가리 안에서 작달만 한 몸집의 소녀가 걸어 나왔다. 어디에 대고 이야기를 하나 싶었는데, 자신의 몸속에 감추어 두었던 소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소녀는 라울을 닮아 눈썹이 짙고 체격이 다부졌으며 활동적인 성향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엘프치곤 피부가 살짝 그을려 있었다.
라울은 소녀의 모습을 보자마자 두 팔을 벌렸다.
“버니! 오! 내 딸. 정말로 무사했구나!”
“아빠? 정말 아빠야?”
버니라 불린 소녀는 보고서도 믿기지가 않는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감정에 북받친 얼굴을 하였다. 자결했다고 들은 아비가 떡하니 자신을 구하러 온 것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에 라울이 그녀에게 다가가 포근히 안아 주었다.
두 사람이 부녀 상봉의 시간을 갖는 동안 루크는 바실리스크에게 말을 걸었다.
“어스의 봉인석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누구라도 지켜 주는 건가?”
‘무덤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무덤 안에 있는 존재가 단지 ‘어스의 봉인석을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의무에 예외를 둔 것이 신기했기에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바실리스크는 뻣뻣한 혀를 날름거리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거상들이나 봉인석에 영향을 받지 나완 상관없어.”
“그렇다면?”
“저 아이가 여기 처음 왔을 때 ‘잡아먹어도 상관없으니 봉인석도 함께 삼켜 달라.’고 하더군. 수호자로서 지키는 게 맞다고 판단했을 뿐이야.”
“고대 병기치곤 관대하군.”
“그쪽 일은 폐업한 지 오래니까.”
해후를 마친 라울은 버니를 데리고 루크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러곤 버니에게 루크를 소개시켜 주었다.
“버니, 인사드리렴. 빌로스의 국왕 전하이시란다.”
“그…….”
“굳이 인간식으로 할 거 없어. 엘프식으로도 충분해.”
“라울의 딸, 버니가 빌로스의 왕께 인사드립니다.”
인간이나 엘프나 왕을 대하는 예절에 있어 큰 차이는 없었다. 굳이 차이를 둔다면 인사를 하는 자세 정도일까. 공경의 의사만 담겨 있다면 자세가 무슨 대수랴.
루크는 가볍게 팔을 휘젓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며 용건을 꺼냈다.
“너와 네 아버지가 둘 다 무사히 빠져나가려면 지금부터가 중요해. 잘할 수 있겠어?”
“혼자서 여기까지 왔는걸요. 웬만한 건 힘든 축에도 못 끼죠.”
“당차서 좋군. 네 아버지보다 몇 배는 더 믿음직한걸?”
“우리 엄마도 최소한 아빠보다 나은 남자를 골라잡으라고 하셨어요.”
“현명한 어머니시군.”
죽이 척척 맞은 두 사람의 대화에 라울이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만 괴롭히고 개요 설명부터 해 주게나.”
“지금부터 둘이서 바깥으로 나가서 엘프 측에 봉인석을 전해 주도록 해.”
이미 작전 개요를 들은 라울은 담담했으나 버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봉인석을 전해 주라고요?”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소리아와 데메그리 교가 봉인석의 봉인을 풀지 못하게끔 죽을 위기를 넘겨 가며 여태껏 지켜 온 봉인석이다.
그걸 도로 넘겨주라고?
버니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라울을 쳐다보았다.
“봉인석을 넘겨주는 거 맞아요?”
“사정이 있어서 봉인을 풀게 한 다음에 토벌할 거란다.”
해저섬 사태 때 이미 밝혀진 바이다만, 데메그리 교는 고대 정령왕을 마물화시켜 부리는 데 성공했었다.
당연히 이번에도 마물화 작업을 거친 다음 봉인을 풀 것이다.
소리아에게 봉인석을 넘겼는데 마물화 작업을 거친 고대 정령왕이 풀려난다?
그야말로 소리아 스스로 ‘나 데메그리 교와 교류 중이오!’라고 자백하는 꼴이다.
고로 따로 증거를 잡지 않아도 소리아를 실각시킬 명분을 얻을 수 있다.
아마 소리아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봉인석의 봉인이 풀려도 두 고대 정령왕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는 소리아가 아니라 데메그리 교 고위 사제란 것을 말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쉽게 풀어서 설명하자 그제야 버니도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근데 루크 전하께서 있는데 저쪽에서 섣불리 봉인을 해제하는 우를 범할까요?”
“그러니까 난 여기서 죽은 걸로 해 둬야지. 석화의 마안에 죽은 걸로 해 둬. 내 수급을 들고 가면 저쪽도 이때다 싶어서 봉인을 해제하겠지.”
루크는 근처를 둘러보다가 사람 머리통만 한 크기의 돌덩이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품에서 작업용으로 챙겨 온 정과 망치를 양손에 쥐었다.
루크의 의도를 알아차린 버니가 손뼉을 치며 탄성을 발했다.
“아! 머리를 본뜬 조각을 만들어 수급 대신 삼으려는 거네요!”
“그래, 석화된 시체에서 목만 베어 왔다고 말하도록 해.”
자신의 얼굴을 본뜨기 위해 손거울까지 지참해 왔다. 버니에게 손거울을 들게 하고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천천히 정을 두드렸다.
정을 망치로 두드려 돌덩이 표면을 깎아 낼 때마다 돌덩이의 모습이 점차 사람의 얼굴 모양을 갖춰 가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작업 상황을 지켜보던 버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했다.
“코가 너무 높지 않나요?”
“전혀. 원래 이 정도 각도였어.”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진 댔어요. 석상이 대신 길어졌나 봐요.”
“흠, 가끔은 어린아이의 솔직한 의견도 들어 둘 필요가 있겠지.”
“어린아이까진 아녜요!”
“어른이라면 코를 좀 더 깎는 게 더 멋있을 거라고 돌려 말할걸?”
“듣고 보니 그렇게 말하는 게 좀 더 현명했겠네요. 아, 머릿결 좀 더 선명하게 긋는 게 좋겠어요. 멀리서 보면 대머리 같아요.”
금세 친해져선 보기 좋게 공동 작업을 펼치는 모습이 마치 삼촌과 조카를 보는 듯했다.
왕궁 안에서만 지내는 게 아닌, 세상 곳곳을 두 발로 직접 밟으며 돌아다녀 본 경험이 있는 국왕이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계급은 존재하나 귀천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압축시켜 한 폭에 담아낸 듯 무척 상징적인 광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어찌 보면 루크의 행적은 대륙의 국경선을 재정립함과 동시에 계급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몇 시간 후 루크는 작업 결과물을 라울에게 넘겼다.
“혹시라도 소리아가 봉인석만 날름 받고 너희 둘을 해치려 들면 플랜B로 넘어가도록 해. 레이아와 라샤가 떡하니 건재하니 대놓고 해코지하진 못하겠지만 말이야.”
만약을 대비해 플랜B와 플랜C를 준비해놓긴 했다. 하지만 플랜B까지 갈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루크가 죽은 마당에 라울이 안중에 들어오기나 하겠는가.
오히려 레이아와 라샤, 아캄프를 위험인물로 판단하고서 우선적으로 제거하려 들 것이다.
라울은 루크의 머리를 본뜬 조각상을 두 팔로 안으며 각오 어린 표정을 지었다.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네. 플랜A에서 끝나도록 전력을 다하겠네.”
“한 번 실수하고 달라지는 것도 집안 내력인 것 같군.”
“라샤 그 아이도 실수를 했었나?”
“해저섬에 갈 때 한 번 하긴 했지. 한 번 엉킨 실이지만 잘라 낼 게 아니라면 잘 풀어 봐. 아내와 딸만 가족인 게 아니잖아?”
“끄응, 안사람과 라샤가 친해지면 그건 그거대로 고통받으면서 살 것 같네만.”
“그 고통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으니 하는 말이야.”
진심이 묻어 나오는 조언에 라울도 눈치껏 분위기를 읽고선 말을 삼갔다.
그렇게 라울과 버니는 들어왔던 통로로 빠져나가 무덤 위쪽을 향해 올라갔다. 버니가 윈터와 어스의 봉인석을 가지고 있으니 돌아가는 내내 거상에게 습격당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두 엘프를 먼저 보낸 루크는 정과 망치를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선 목 스트레칭을 했다.
“익숙지 않은 작업을 했더니 목이 다 뻐근하군.”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릴 작정으로 기둥에 등을 대고서 앉던 중 똬리를 틀고 있던 바실리스크가 넌지시 루크에게 말을 붙였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되나?”
“그쪽도 내 질문에 대답해 줬으니 나도 대답해 주는 게 예의겠지.”
“만약에 내가 대화에 응하지 않고 수호자의 의무를 집행하려고 했으면, 나와 싸울 생각이었나?”
루크는 검지로 검갑을 경쾌하게 튕기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지금이라도 상관없어.”
생각이 바뀌었다면 언제든지 덤비라는 의사 표현이었다.
바실리스크는 루크로부터 시선을 거두며 무덤 한복판에 가지런히 똬리를 틀었다.
“관두지. 이기든 지든 무덤이 성치 못할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