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172화 분위기 좀 읽지그래? (1)
봉인석을 가지고 무덤 바깥으로 빠져나오던 라울은 무덤 입구 부근에서 새로운 시체 더미를 발견하였다.
미행으로 따라붙었던 엘프들이 거미 거상에게 쫓겨 도망치다가 황소 거상과 맞닥뜨려 일거에 쓸려 버린 듯하다. 그 증거로 어디선가 황소 숨소리가 웅웅 울리며 전해져 왔다.
그래도 라울과 버니에겐 어스의 봉인석이 있었기에 무사히 무덤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무덤에서 빠져나온 뒤에는 곧바로 라이프 트리의 손 위에 올라 궁전으로 갔다. 궁전에 도착한 후에는 소리아에게 두 개의 봉인석과 루크의 머리를 본뜬 조각상을 넘겨주었다.
조각상을 루크의 수급이랍시고 넘겨 줄 때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른다. 마치 몸 전체가 심장이라도 된 듯 박동 소리에 잠긴 채로 연기를 펼쳤는데, ‘실패하면 어쩌지?’ 하고 걱정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무난하게 넘어갔다.
조각상을 받은 소리아가 엄숙한 표정으로 엘프 수비대장에게 지시를 내리길.
“허~ 이렇게 또 큰 인물이 가는구나. 내 위험하다고 그리 말렸거늘. 숙소에 머무르는 빌로스 왕국의 협상단이 충격을 받지 않도록 신경 써서 전하도록 하거라.”
참 가식적이기 짝이 없는 반응이었다.
말투엔 안타까움이 잔뜩 배어 있는데 얼굴에선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소리아는 루크가 없다고 해서 빌로스 왕국에 직접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갈 만큼 대담한 성격은 아니다.
순전히 인간 왕국의 침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어서, 그리고 이걸로 배상금 문제가 흐지부지될 것이기에 좋아하는 것일 뿐이었다.
정말이지 그릇이 작다.
안쓰러울 정도로 말이다.
이후에 소리아는 산드라를 옥에서 해방하여 라울에게 돌려주었고, 일가족을 데리고서 조용히 엘프의 숲을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라울은 엘프 수비대의 엄중한 감시 속에서 엘프의 숲 바깥으로 해방을 빙자한 추방을 당하며 맡은 바 역할을 완수했다.
* * *
“드디어 내 손에 두 정령왕이 들어오겠구나. 윈터와 어스, 두 고대의 정령왕이 있다면 그 누구도 엘프의 숲을 함부로 넘보지 못할 게야.”
왕으로서 국방력의 강화를 꾀하는 건 어느 나라, 어느 왕이라도 추구하는 일이다.
그러나 소리아의 행동은 명백히 과잉 방어였다.
그 누구도 도둑을 막으려고 자기 집 담장 밑에 압정을 뿌려놓진 않는다.
물론 간혹가다 진짜로 압정을 뿌리는 자들이 있긴 하다. 세간 사람들은 그런 부류를 두고 ‘피해망상에 찌든 자’라고 부른다.
현재 소리아가 서 있는 위치는 엘프의 숲 북서쪽 구석이다. 숲 한편에 숨겨져 있는 폭포 뒤의 폭포 동굴 안에선 한창 봉인 해제 의식이 진행 중이었다.
이제나저제나 의식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엘프 수비대장이 찾아와 보고를 올렸다.
“협상단의 레이아 양에게 루크 국왕의 사망 소식을 전하고 왔습니다.”
“어떻게 반응하던?”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서럽게 울더군요. 질질 짜는 모습이 꽤 볼만했습니다. 인간만 아니었다면 술을 권했을 텐데 말입니다.”
“시도해 보지 그랬나? 우는 여자는 꼬드기라는 격언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네.”
“지금 전하께서 기분이 좋으신 것만큼은 알겠습니다. 평소 같으면 고약하다면서 면박을 주셨을 텐데 말이죠.”
“왜 아니겠나. 두 고대의 정령왕만 손에 넣으면 대대손손 엘프의 숲은 안전할 걸세. 그리고 난 엘프의 숲의 안녕을 이루어 낸 왕으로서 역사에 남을 테지.”
“축하드립니다, 전하.”
“축하 인사는 내 손에 정령석이 들어온 후에 받도록 하지. 어디 보자, 슬슬 끝났을 때가 됐는데…….”
전쟁 나간 남편의 편지를 기다리는 아낙네처럼 까치발을 들썩이며 폭포를 바라보는 소리아였다.
예정된 시간이 다 되었을 무렵 갑자기 폭포 안에서 무언가가 빠져나오며 폭포물이 강하게 튀었다.
첨벙!
거센 물살이 소리아와 엘프 수비대를 덮치며 물에 젖은 쥐 꼴로 만들었다.
더불어 물살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소리아의 주변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아악!”
“크악!”
소리아를 제외한 다른 엘프들의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며 몸속에 있는 것을 쏟아 냈다.
폭포 뒤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다름 아닌 바람의 칼날이었다.
똑같이 바람의 칼날에 피격당했는데도 엘프들은 몸이 두 동강 난 반면 소리아는 멀쩡했다.
날아든 공격이 정령에 의한 공격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요정왕 일족인 소리아는 혈족 귀속 능력 때문에 정령의 공격에는 면역을 띠니 멀쩡한 것이었다.
바람의 칼날이 날아든 것에서 추측건대 윈터의 공격인 것 같다. 윈터가 아무 의미 없이 공격을 날렸을 린 없을 테고,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공격을 한 것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명령을 내린 자?
데메그리 교 사제들밖에 더 있겠는가!
소리아는 물거품이 바글바글 피어오르고 있는 폭포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파카 네놈! 설마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느냐?”
대답 대신 강한 땅 울림이 돌아왔다.
쿠구구구궁!
폭포가 흐르고 있던 절벽에 균열이 생기더니 이내 곧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다.
소리아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절벽에서 떨어져 나온 돌을 피해 뒤로 몸을 날리는 것밖에 없었다.
낙석과 함께 절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사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거대한 바위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대 대지의 정령왕 어스였다.
이어서 사람의 형체를 띤 본체 주변에 강한 바람을 휘감은 거인이 나타났다.
고대 바람의 정령왕 윈터였다.
두 정령왕은 본래 모습과 다른 형태를 띠고 있었다.
어스의 경우 원래는 황토색 바위가 껍질처럼 몸 주위에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인데, 지금은 불에 그을린 양 검은색 바위가 붙어 있었다.
윈터의 경우 원래는 본체 주변에 녹색 바람을 휘감고 있으나 지금은 검은색 바람을 휘감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뻥 뚫린 동굴에서 검은 로브를 두른 사내들이 빠져나왔다.
무리의 선두에는 여태껏 소리아와 수차례 접촉한 바가 있는 파카란 자가 서 있었다.
파카는 꼴사납게 넘어져 있는 소리아를 보며 대놓고 비아냥을 날렸다.
“오우, 숲의 왕이 진흙탕을 구르다니 이거 참 진기한 광경이로군. 멧돼지 체험이라도 하고 싶어진 건가?”
“대답해라, 파카!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느냐!”
“굳이 내가 대답할 것도 없이, 이미 답은 나와 있는 것 같은데?”
“이러려고… 이러려고 내게 요정왕 일족의 보물을 요구한 것이냐!”
“어스의 성배와 윈터의 보옥 말인가? 보물을 흔쾌히 제공해 준 것에 대해선 감사를 표해야겠지. 덕분에 마물화 작업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으니 말이야.”
“크아아! 죽여 버리겠다!”
분이 차올라 물의 상급 정령을 소환하는 소리아였다.
그러나 늘 높은 곳에 머무르며 안전만을 추구하던 소리아가 저 홀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파카는 소리아의 정령을 같잖다는 눈길로 스윽 보고선 윈터에게 턱짓을 했다.
“없애 버려.”
윈터가 딱밤을 먹이듯 허공에서 검지를 살짝 튕겼다.
튕긴 자리에서 기다란 바람의 칼날이 생성되더니 상급 물의 정령 위에 떨어졌다.
퍼엉!
떨어진 것은 바람의 칼날인데 그 여파는 마치 투포환이 떨어진 듯 육중하기 그지없었다.
바람의 칼날에 적중당한 물의 상급 정령은 그 자리에서 갈가리 찢겨 나가며 한 덩이의 정령석으로 변하였다. 그마저도 바람의 칼날이 부딪치며 생성된 후폭풍에 눌려서 박살이 났다.
정령이 죽은 탓에 강제로 계약이 해제된 여파가 소리아를 덮쳤다.
소리아의 몸속에서 마나가 역류하면서 심각한 내상을 입게 되었다.
“쿠헉! 쿨럭쿨럭!”
각혈을 토해 내며 고통스러워하는 소리아의 몸 위로 사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느새 소리아의 지척까지 접근해 온 파카가 그를 내려다보며 입을 뗐다.
“교단 최대의 적이 그따위 죽음을 맞이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그런 의미에서 자네에겐 매우 감사하고 있어. 보답으로 목숨만큼은 살려 주지.”
“닥쳐라! 날 속이고도 무사히 살려 둘 성싶으냐! 절대로 용서치…….”
소리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기 블레이드가 맺힌 검이 소리아의 가슴을 꿰뚫었기에.
푸욱!
파카는 검을 한껏 비틀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고통을 가하고선 얄미운 투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럼 뒤지던가.”
그러고선 소리아의 시체를 발로 밀어내어 검을 뽑아냈다.
두 고대의 정령왕을 손에 넣었으나 아직 파카에게 주어진 임무는 끝나지 않았다.
지금은 대신전과 연락이 끊겼지만 연락이 끊기기 전에 파카에게 주어진 임무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두 고대의 정령왕을 마물화시켜 손에 넣을 것.
두 번째는 엘프의 숲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엘프의 시신들을 수거해 올 것.
두 번째 임무의 경우엔 파카의 재량에 따라 얼마든지 시행할지 말지 결정할 수 있었다.
파카의 부하들은 파카에게 두 번째 임무를 수행할 것인지 물어보았다.
“이걸로 첫 번째 임무는 성공했군요. 두 번째 임무는 어떻게 하실는지요?”
“여기까지 와서 첫 번째 임무만 달성하고 돌아가긴 아쉽지. 게다가 엘프 말고도 수거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자들이 있잖느냐.”
레이아와 라샤, 아캄프를 말하는 것이었다.
세 사람의 시신을 수거한다면 빌로스 왕국의 전력을 더욱 약화시킬 수 있는 데다 데메그리 교의 전력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특히 레이아에겐 바다의 3대 신기 중 하나인 메모리 스태프가 있으니 부수입치곤 차고 넘치는 편이었다.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다고 했던가.
이쯤 되니 파카의 입에서 배부른 소리가 튀어나왔다.
“루크 놈의 시신도 회수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건만.”
“하지만 무리겠지요. 석상이 되었다지 않습니까. 거기다 라울 녀석이 수급을 취한답시고 목까지 베어 왔으니 수거한다 하더라도 소생은 불가능할 겁니다.”
“내가 너무 배부른 소리를 했나?”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많이 배부른 소리이긴 합니다.”
“하하하, 이것도 전부 놈이 멍청하게 뒈져 준 덕분에 할 수 있는 소리지. 어스! 윈터! 엘프의 숲으로 진격해라! 시신은 최대한 멀쩡한 형태로 남겨 놓도록!”
* * *
한 여인이 젖은 빨래를 탁탁 털어서 펼치고선 빨랫줄에 걸었다.
오늘따라 바람 한 점 없어 이마에 땀 구슬이 송골송골 맺혔다.
소매로 이마를 훔치며 빨랫줄 가득 빨랫감을 널고 있는데, 나무 아래에서 그네를 타던 그녀의 아이가 갑자기 여인을 불렀다.
“엄마! 엄마!”
또 그네를 밀어 달라고 부르는 거겠거니 싶어 미리 안 된다고 못을 박아두었다.
“엄마 지금 빨래한다고 그네 못 밀어 준다고 했잖니.”
그러나 아이의 용건은 그게 아니었다.
“저기 봐 봐! 커다란 사슴이 오고 있어!”
“야채밭으로 가는지 잘 보고 있다가 순 뜯어먹으려고 하면 말리렴.”
“사슴 말고 다른 것도 있는데, 저건?”
아이의 질문에 빨랫줄만 바라고 있던 여인이 시선을 움직였다. 아이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니 저 멀리서 거대한 두 존재가 다가오는 게 포착되었다.
검은색 바위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거대한 사슴, 그리고 검은색 바람을 두른 거인.
일상감 제로의 광경과 맞닥뜨린 순간, 여인의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생각이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는 가운데, 상황은 시시각각 급변했다.
멀리서 검은 바람을 두른 거인이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가 내뿜었다. 흡사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려 드는 북풍과도 같은 모습이었으나 실상은 동화보다 훨씬 잔혹했다.
바람의 거인이 내뿜은 숨결이 큼직큼직하게 쪼개지며 수십 가닥의 바람의 칼날이 되었다.
바람의 칼날은 엘프의 숲 주거지역을 덮쳤고, 칼날 하나당 수십 그루의 나무를 베어 내며 주거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우지끈! 콰르르르!
숲 여기저기서 나무 꺾이는 소리가 천둥 번개 치듯 난잡하게 울려 퍼졌다.
난무하는 굉음 속에서 아이가 실제 천둥 번개에 놀란 것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앙!”
여인은 부랴부랴 아이를 번쩍 안아 들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자신도 공포에 질려 안색이 창백했지만, 애써 제정신을 붙들고선 아이를 우선시했다.
“어, 어. 괜찮아. 엄마 여기 있어.”
아이를 안고서 남편의 근무지로 가려던 찰나.
무수히 쏟아지던 바람의 칼날 중 하나가 그녀와 아이가 있는 곳으로 날아들었다.
검은색 오오라를 일렁이며 날아드는 바람의 칼날을 두고, 여인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위기의 순간 속에서 그녀가 본능적으로 취한 행동은 바로 자신의 몸으로 아이를 감싸는 것이었다.
아이를 꼬옥 끌어안고 속으로 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항상 엘프의 숲을 굽어살펴 주시는 정령의 신이시어. 당신이 정녕 저희를 굽어살펴 주시고 계신다면 제발 저 무자비한 바람이 아이를 덮치지 않게 해 주소서.
하나 간절하게 빌었음에도 정령의 신은 그녀를 지켜 주지 않았다.
대신 금색 단발의 엘프가 에메랄드빛 녹안을 번뜩이며 바람의 칼날과 모녀 사이에 끼어들었다.
엘프는 저 스스로 바람의 칼날에 몸을 부딪쳤고, 그녀의 혈족 귀속 능력이 효력을 발휘하며 바람의 칼날이 와해되었다.
와해된 바람이 한 줄기의 산들바람이 되면서 엘프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금색 단발의 엘프, 라샤는 옆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며 숲에서 가장 거대한 존재에게 명령을 내렸다.
“라이프 트리, 숲 속의 엘프들을 피신시켜.”
이번 원정에서 그녀의 역할은 격전지로부터 엘프 주민들을 멀리 피신시키는 것이었다.
윈터와 어스라면 문제없다.
루크가 올 때까지 놈들의 발을 붙잡아 둘 사람이 출격했으니까.
라샤의 머리 위로 창천 앵무, 그리고 백색 지팡이를 쥔 여인 한 명이 윈터와 어스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