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173화 분위기 좀 읽지그래? (2)
레이아는 회중시계를 열며 시간을 가늠했다.
“굉음이 발생한 지 20분째. 무덤 안까지 소리가 전해졌을 거고, 그때부터 바깥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치면… 음, 좀 많이 버텨야겠는걸.”
“오기 전에 쓰러뜨려! 오기 전에 쓰러뜨려!”
“그거 좋은 생각인데? 한번 해 볼까?”
“하자! 하자!”
레이아와 파이의 접근을 감지했는지 어스가 강하게 발을 굴렀다.
쿵!
어스가 발을 구른 자리에서 모래가 높게 치솟았고, 즉석에서 장대한 모래 해일이 발생했다.
해일의 높이가 장장 십수 미터에 달하는지라 멀리서 보면 흡사 농도 짙은 황사가 발생한 것으로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대지의 정령 기운이 가미된 해일은 낮은 고도로 날고 있는 파이를 집어삼키고자 다가왔다.
물론 얌전히 모래에 휩쓸려 줄 생각은 없다.
레이아는 파이의 깃털을 강하게 잡아당겨 급격히 고도를 높였다. 그렇게 모래 해일을 가볍게 뛰어넘고선 어스를 향해 메모리 스태프를 겨누었다.
“트리플 캐스팅! 싸이클론!”
상성상 대지 속성은 바람 속성에 약하다. 때문에 바람 속성의 상위 마법을 시전하여 어스에게 타격을 주고자 했다.
어스의 육신을 중심으로 12시 방향, 5시 방향, 7시 방향에 세 개의 싸이클론이 생성되었고, 레이아가 주먹을 쥐는 시늉을 하자 세 개의 싸이클론이 한꺼번에 어스를 죄어들었다.
한데 싸이클론이 본격적으로 어스에게 타격을 입히기도 전에 윈터가 래리어트를 하듯 팔을 휘둘러 싸이클론을 휘저었다.
후우우웅!
바람 속성과 바람 속성의 몸뚱이끼리 부딪치며 싸이클론이 상쇄되었다. 고대 바람의 정령왕인 만큼 윈터는 싸이클론을 몸으로 비벼 상쇄시켰음에도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듯했다.
한 차례 공격을 막아 낸 윈터가 레이아를 올려다보며 검지와 엄지를 오므렸다.
“아가야, 굼벵이 앞에서 주름 잡는 거 아니란다.”
바람의 정령왕 앞에서 바람 속성으로 까불지 말라는 듯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검지를 튕기는 윈터였다.
손가락을 튕긴 자리에서 무수히 많은 바람의 칼날이 뿜어져 나왔다.
어스의 ‘모래 너울’ 기술이 상대방을 덮쳐 압력으로 찍어 누르는 공격이라면 윈터의 ‘칼바람 세례’는 상대방의 육신을 무차별 난도질하는 공격이라 할 수 있었다.
공격 범위가 원체 넓은 탓에 피할 각이 보이지 않았다.
레이아는 마나를 넓게 두르며 실드를 시전했다.
“더블 캐스팅! 실드 앤 파이어 익스플로전!”
투두두두둑!
실드 위로 바람의 칼날이 쉴 새 없이 부딪치며 콩 튀기는 듯한 소리가 귓가를 마구 때렸다.
윈터의 광역기에 맞서 방어태세로 돌아서면서도 공격을 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바람 속성의 상극은 화염 속성.
때문에 불 속성 상위 마법인 파이어 익스플로전을 시전했다.
윈터의 머리 위에 붉은색 마법진이 생성되었고, 레이아가 영창을 마치자마자 붉은색 마법진에서 대량의 화염이 쏟아져 내렸다.
화르르륵!
쇠도 녹여 버릴 듯 강렬한 화염이 대량으로 쏟아졌고, 윈터의 본체를 두르고 있는 바람을 먹으며 한층 더 몸집을 불렸다.
이제 윈터의 본체를 녹여 버리기만 하면 되건만 이번에는 어스가 윈터를 엄호했다.
쿵!
어스의 발구름에 반응하듯 다시 한번 모래 너울이 일렁이며 윈터의 몸을 감쌌다.
모래 너울이 화염을 대신 받아 내며 시커멓게 그을렸고, 그 틈을 타 윈터가 파이어 익스플로전의 범위에서 빠져나왔다.
서로가 서로를 엄호하다 보니 상대하기 쉽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두 고대의 정령왕을 상대로 잠시나마 호각을 다투고 있는 레이아와 파이가 대단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승부욕 강한 아가씨는 호각지세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파이, 윈터의 공격은 전부 알아서 피해 줘. 그동안 큰 거 한 방 준비하겠어.”
“맡겨! 맡겨!”
윈터가 모래 너울을 두른 채로 칼바람 세례를 연이어 날렸다.
칼바람이 모래 너울을 통과하며 모래를 머금었고, 고운 모래 입자가 칼날 테두리를 따라 고속으로 회전하며 예리함을 한층 높였다.
솟구치는 칼바람 세례를 앞두고서 파이는 여유만만하게 고도를 더욱 높이며 한계치까지 속도를 끌어 올렸다.
쌔앵!
윈터가 파이를 포착하고 칼바람 세례를 날릴 때마다 파이가 남긴 잔상을 관통하여 지나치는 게 고작이었다.
파이는 몇 번이고 공격을 피하며 특유의 깐족거림을 발했다.
“그건 내 잔상! 그건 내 잔상!”
공격과 회피가 교차하는 상황 속에서 계속 마법을 준비하던 레이아가 드디어 마나 배열을 마치고선 각도 조절에 나섰다.
“준비됐어, 파이! 크게 선회해!”
“급선회! 안전주의! 안전주의!”
급커브를 돌 듯 급격하게 몸을 기울여 U 자 턴을 선보이는 파이었다.
윈터와 어스를 정면으로 볼 수 있는 위치가 되었을 때 레이아는 메모리 스태프를 겨누며 힘차게 주문을 영창했다.
“이니시 에로우!”
상성으로 제압하지 못한다면 힘으로 제압하겠다.
그런 일념으로 무속성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레이아의 몸 주위로 고농축 마나 화살 수백 개가 생성되며 윈터와 어스에게 떨어졌다.
수백 다발의 화살이 남긴 푸른 잔상은 푸른 빛기둥을 만들어 냈고, 윈터와 어스의 거대한 몸뚱이에 고루고루 적중하며 타격을 입혔다.
빗맞은 마나 화살이 지면에 부딪히며 자욱한 흙먼지를 일으켰고, 흙먼지가 발생하는 횟수가 누적될수록 흙먼지의 크기가 커지면서 어스와 윈터를 뒤덮었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흙먼지 안에서도 타격음을 계속 들려왔다.
퍼엉! 펑! 퍼어엉!
이윽고 이니시 에로우가 끝나며 쉴 새 없이 들려오던 타격음이 멎었다.
레이아는 숨을 몰아쉬며 흙먼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아, 하아. 해치웠나?”
죽은 적도 되살린다는 마법의 주문에 파이가 화들짝 놀라며 U 턴을 했다.
“그거 금기! 그거 금기!”
금기가 괜히 금기라 불리는 게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흙먼지 속에서 윈터의 팔이 쑤욱 뻗어 나오며 파이와 레이아를 한 손에 움켜잡았다.
윈터의 손아귀가 둘을 강하게 움켜쥐었고, 윈터의 몸 주변을 감싸고 있는 시커먼 바람이 파이의 깃털과 레이아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었다.
윈터의 경우 몸을 두르고 있는 바람의 성질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 평소에는 부드러운 바람에 불과하나 윈터의 의사에 따라 얼마든지 칼바람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
윈터는 자신의 몸을 두르고 있는 바람을 칼바람으로 바꿀 준비를 마쳤다.
“깐족거리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밑도 끝도 없이 깐족거리는구나. 다시는 부리를 조잘거리지 못하게 형체도 없이 다져 주마.”
이니시 에로우의 효과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닌 것 같다.
그 증거로 윈터와 어스의 몸 곳곳에 피해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하다못해 한 놈만 상대했다면 레이아와 파이 둘이서 2 대 1로 고대 정령왕을 몰아붙일 수 있었을 거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이건만 레이아는 위기감 하나 없는 얼굴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아아~ 발목만 붙잡으라고 했는데 이거 또 혼나겠네.”
그녀가 그러는 건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루크가 도착한 것이다.
루크가 플라이 마법으로 윈터의 겨드랑이 밑을 통과하며 해왕검을 휘둘렀다. 동시에 투영검이 생성되며 윈터의 손목에 떨어졌다.
투영검은 윈터의 본체를 두른 바람을 밀어내었고, 가차 없이 윈터의 손목을 베어 냈다.
서걱!
윈터의 오른손이 떨어지면서 살짝 벌어졌고, 손에 쥐여 있던 파이와 레이아가 아래로 떨어졌다.
루크는 해왕검을 옆으로 뉘여 물건을 떠받치는 시늉을 했다. 그에 따라 투영검이 옆으로 기울며 검면으로 두 사람을 받아 냈다.
그러곤 투영검의 검면 위에 착지한 레이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선 해왕검을 윈터에게 겨누었다.
“미안하게 됐어. 너무 발칙한 손이라 나도 모르게 베어 버렸군.”
윈터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려 나간 단면에 바람을 둘렀다. 바람 안에서 본체가 재생되며 새로운 손이 돋아났다.
“과연 세월이 흐르긴 흘렀나 보구나. 이 내가 검에 잘려 나가는 수모를 당하게 될 줄이야.”
“마음 같아선 더 베어 주고 싶지만 널 보고 싶어 하는 손님이 있어서 말이지.”
말을 마친 루크가 붉은색 정령석을 손에 쥐며 대량의 마나를 부여했다. 그러고선 엄지로 정령석을 튕기며 뒤로 물러났다.
티잉!
정령석이 루크의 손을 떠나 허공에 붕 떴고, 정령석 표면에서 불길이 일어나더니 삽시간에 전성기 수준의 라그나로스가 제 전신을 드러냈다.
라그나로스는 소환됨과 동시에 괴성을 발하며 주먹을 뻗었다.
“윈터어어어!”
불과 바람은 상성 중의 상성.
이미 상성에서 씹어 먹고 들어가고 있는지라 윈터로선 라그나로스를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윈터가 어거지로 팔을 들어 올리며 라그나로스의 주먹을 막았으나 라그나로스의 주먹은 윈터의 바람을 먹고 한층 거세게 일렁이며 윈터의 팔을 지졌다.
치이이이익!
윈터의 팔 표면이 조금씩 녹아내리면서 윈터의 표정이 강하게 일그러졌다.
“붙을 곳이 없어서 인간의 꽁무니에 붙어? 라그나로스, 못 보던 사이에 추해졌구나.”
“정령의 신도 딱히 여길 저능아 같은 놈! 봉인되어 있는 동안 기억 왜곡이라도 일어났나 보군. 내가 누구 때문에 폭주의 길을 택했는지 잊은 건 아닐 테지?”
“희극이 따로 없었지. 인간 박멸을 저지하려다가 폭주해서 제 스스로 인간을 쓸어버리고 다니다니 말이야.”
“네놈이 그렇게 만들었지. 이번에야말로 네놈의 존재를 말살해서 과거의 과오를 씻어 내겠다.”
“훗, 농담이 심하군. 파괴야말로 불의 본래 성질일 텐데? 네 본능을 이끌어 내 줬으니 감사의 인사를 들어도 모자랄 판이다만?”
“역시 네놈과는 말이 통하지 않아.”
“피차일반이야. 어째서 자신의 근본을 부정하고서 인간의 도구로 살아가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군.”
윈터가 팔을 강하게 휘둘러 라그나로스의 팔을 뿌리쳤다.
라그나로스의 팔이 위로 튕겨 나가기 무섭게 윈터의 주먹이 라그나로스의 얼굴을 후려쳤다.
투퍽!
윈터로선 상성에서 밀리니 육탄전으로 몰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내다운 싸움이라면 라그나로스도 밀리지 않는다.
“빌어먹을 바람돌이야! 주먹이란 건 말이야, 이렇게 쓰는 거란다.”
라그나로스의 주먹이 윈터의 턱을 강하게 올려쳤다.
착각일까.
주먹을 교환할 때마다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에서 애환의 감정이 묻어 나오는 듯했다.
가까운 사이였기에 감정적으로 임하게 되는 싸움도 있는 법이다.
라그나로스는 방어 한 번 하지 않고 윈터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 내며 저 또한 우직하게 공격만을 고집했다. 묵은 감정도,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던 건수도 전부 증발시켜 버리려는 것처럼 말이다.
두 정령왕이 주먹다짐이 격렬해지는 가운데 루크가 레이아에게 지시를 내렸다.
“숲에 불이 번지지 않게 전투가 끝날 때까지 화재를 진압하도록 해.”
“전하는요?”
“나머지 한쪽을 정리해야지.”
현재 어스는 윈터를 엄호하기 위해 라그나로스의 측면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투영검 위에 올라서 있던 레이아가 파이의 등을 타고 행동에서 나섰고, 루크 또한 플라이 마법으로 몸을 띄우며 투영검으로부터 떨어졌다.
루크는 어스의 미간을 향해 투영검을 날리며 나직이 말했다.
“차려진 밥상에 흙탕물을 끼얹으면 쓰나. 분위기 좀 읽지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