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174화 빙백검 (1)
쿵! 쿵! 쿵!
어스가 연달아 발을 세 번 구르며 모래 너울을 시전했다.
세 겹의 모래 해일이 드레스의 프릴처럼 층을 이루며 루크를 향해 쇄도하였다.
이미 투영검은 루크의 곁을 떠나 어스의 미간에 떨어지는 중이었다.
각자 서로를 향해 공격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중간지점에서 공격이 충돌했다.
투영검이 모래 해일 속으로 파고들었고, 세 겹의 층을 이루고 있는 모래 해일을 차례차례 관통하기 시작했다.
퍼석! 퍼석! 퍼석!
흡사 재단사가 겹쳐진 천에 대바늘을 끼워 넣듯 투영검은 모래 해일에 커다란 구멍을 남기며 어스의 미간에 내리꽂혔다.
투웅!
윈터의 몸은 손쉽게 잘려 나갔건만 어스의 몸에는 검 끝 하나 박아 넣지 못했다.
대신 어스의 몸을 덮고 있는 바윗덩이들이 크게 꿈틀거렸고, 투영검과 경합하며 발생한 충격을 흡수한 듯 바윗덩이 사이로 어스의 몸체에 검은 오오라가 기승을 부리는 것을 포착할 수 있었다.
이 밋밋한 느낌.
언젠가 한 번 느낀 적 있다.
투영검으로 카라스코의 성벽을 내리쳤을 때도 딱 이 느낌이었다.
일련의 단서가 퍼즐처럼 들어맞으며 오랫동안 품어왔던 의문 하나가 풀렸다.
“카라스코의 건축물은 어스의 바위로 만든 거였군.”
‘어떻게 바위가 투영검을 버텨!’가 평범한 사람의 사고방식이라면 ‘투영검을 버티는 바위이니 보통 바위가 아니겠군.’이 비범한 사람의 사고방식일 것이다.
루크는 후자에 속했다.
유지 및 보수가 필요 없는 바위가 평범한 바위일 리 없잖은가.
라그나로스의 증언에 의하면 카라스코의 건축물은 전부 어스가 제작했고, 카라스코가 한 일이라곤 사물의 마물화 작업밖에 없다고 했었다.
어스가 건축물을 제작할 때 자신의 몸에 붙은 바위를 이용했다면 아귀가 들어맞는다.
쏴아아아!
모래 해일은 투영검에 꿰뚫려 구멍이 뚫린 와중에도 추진력을 잃지 않고 루크에게로 다가왔다.
루크는 투영검이 지나가면서 뚫어 놓은 구멍을 통과하며 가볍게 모래 해일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났다.
플라이 마법을 이용해 막 모래 해일을 지나친 찰나, 별안간 어스가 4개의 다리를 굽혀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런가 싶더니 어스의 몸 주위를 두르고 있던 바위에서 검은 오오라가 한껏 치솟으며 강한 충격파가 방출되었다.
파아아앙!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바닥이 허공에 대고 강하게 손뼉을 친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충격파가 사방으로 발산되며 숲 속의 나무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콰르르르르!
루크는 반사적으로 전방에 실드를 둘러 충격파를 막아 냈다.
투영검에 적중당하고 그 직후에 발산한 충격파, 그리고 심상치 않은 위력까지.
충격파 발산 과정을 통해 어스가 어떤 기술을 구사한 것인지 추론해 낼 수 있었다.
“흡수한 투영검의 위력을 고스란히 충격파로 전환시킨 건가.”
충격을 입힐수록 어스에게 무기를 쥐여 주는 꼴이었다.
어스를 쓰러뜨릴 단서를 찾기 위해 바쁘게 시선을 움직이던 중 어스의 몸 곳곳에 그을린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앞서 레이아가 이니시 에로우를 시전하면서 어스에게 피해를 입힌 흔적이었다. 투영검에 적중당할 땐 흠집 하나 나지 않았건만 레이아의 이니시 에로우에는 타격을 입은 것이다.
투영검이든, 이니시 에로우든 둘 다 똑같은 무속성 공격이었다.
속성 문제는 아닌 것 같고…….
겉보기엔 모두 똑같은 바위 껍질 같아 보여도 충격 흡수 능력이 부여된 바위 껍질이 있고, 그렇지 않은 바위 껍질이 있는 듯하다.
“말 안 듣고 공격적으로 나선 게 오히려 득을 본 셈이군.”
발목만 붙잡으라고 했는데 괜히 두 고대의 정령왕을 쓰러뜨리려다가 윈터의 손아귀에 붙잡혔던 레이아다.
그걸 건수 삼아 나중에 바가지 면책권으로 활용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레이아의 판단이 옳았던 것 같다.
루크는 레이아가 남긴 흔적을 이정표 삼아 투영검을 떨어뜨렸다.
콰직! 콰지지직! 푸욱!
이니시 에로우의 흔적이 남은 지점에 투영검을 때려 박으니 투영검의 검날이 바위 껍질을 깨부수며 어스의 몸체에 틀어박혔다.
몸체를 찌른 정도로 만족할 리가 있겠는가.
루크의 동작을 따라 투영검이 한껏 비틀리며 어스의 몸 안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지대한 타격을 입은 어스는 처절한 단말마와 함께 네 다리를 쭈욱 뻗으며 힘없이 지면에 엎어졌다.
“쿠오오오오오!”
전투를 벌이던 윈터는 어스의 단말마를 듣고선 저도 모르게 어스가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어스가 쓰러진 채로 죽은 것을 목격한 순간, 눈을 부릅뜨며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
“인간의 몸으로 어스를 쓰러뜨려? 봉인되어 있던 사이에 인간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랜드 마스터가 없던 시절밖에 모르던 윈터에게 루크의 무력은 별세계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손을 가볍게 잘라 낸 것도 그렇고,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윈터의 반응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양 라그나로스가 윈터의 몸을 와락 붙잡았다.
“한눈팔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크으윽! 라그나로스!”
라그나로스의 몸을 두르고 있던 화염이 윈터의 본체를 녹였다.
본체를 두르고 있던 바람은 라그나로스의 화염을 키우는 풀무질로 전락한 지 오래였고, 완력 싸움에서도 밀린 터라 그를 뿌리칠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윈터는 몸이 서서히 녹아가는 것을 느끼며 외쳤다.
“허억허억! 어째서냐, 라그나로스. 너도 기억하고 있을 거다. 우리의 계약자였던 카라스코가 어떤 꼴을 겪었는지… 인간 놈들이 얼마나 추악한지!”
“알다마다. 뭘 해도 비난 일색에 모두가 카라스코의 힘을 두려워하며 죽이려 하거나 멀어졌지.”
“그걸 알면서! 알면서도 어째서!”
“어째서냐고? 지금 내 주인도 카라스코와 별반 다르지 않게 살았는데도 카라스코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지. 카라스코는 도망쳤을 뿐이야. 넌 거기에 동정심을 느껴 공조한 것이고.”
“동정심? 그런 이유가 아니라…….”
“변명의 길이와 추함의 정도는 비례한다지? 됐고, 한 번 재가 되었다가 다시 돌아오시지. 지금의 네놈은 미지근해서 봐주기 힘들군.”
라그나로스가 루크에게 부여받은 마나를 남김없이 소모하며 열기를 높였다. 어차피 근처에서 레이아가 조치를 취해 주고 있기에 사양 않고 온도를 높였다.
이글거리는 열기 속에서, 윈터는 더 이상 아무런 대꾸조차 내뱉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이윽고 부둥켜안은 자세를 취하고 있던 라그나로스의 품속에는 뜨거운 아지랑이만 맴돌고 있었다.
라그나로스는 녹아내린 흔적 속에 파묻혀 있는 녹색 정령석을 힐끗 보곤 열기 섞인 긴 숨을 내쉬었다.
“젠장, 손 많이 가는 새끼 같으니.”
* * *
파카는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음을 직감했다.
소리아가 말하길 루크는 요정의 무덤 안에서 죽었다고 했었다.
말뿐만 아니라 실제로 루크의 수급까지 가져와서 자랑스럽게 보여 줬잖은가!
아니, 감시까지 붙여가며 철저하게 움직였다면서 일 처리가 왜 이 모양 이 꼴인지 알 수가 없다.
“요정의 무덤에서도 살아나와, 두 고대의 정령왕도 동시에 제압해. 저 미친놈은 대체 어떻게 해야 뒈지는 거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두 고대의 정령왕을 손에 넣었을 때 바로 퇴각할 걸 그랬다. 그랬다면 적어도 정령왕이란 수확을 얻은 채로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후회한들 뭐하리.
이미 어스와 윈터는 쓰러져 버린 것을.
“파카 사제! 어스와 윈터 쪽은 이미 늦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최소한의 수확이라도 얻어가야 해. 빈손으로 돌아갈 순 없어. 여기에 쏟아부은 시간이 얼만데… 빈손만큼은 절대 안 돼.”
꿩 대신 닭이라고 윈터의 1차 공격에 죽은 엘프들의 시신이라도 회수해 가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용이하지 않았다.
사전에 라샤가 라이프 트리를 시켜 은밀히 주민들을 피신시켰고, 라이프 트리의 손이 닿지 않은 곳에 있는 주민들은 직접 바람의 칼날을 몸으로 받아 내면서까지 지켜 내며 피신시켰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을 수 없으며 아무것도 할 게 없다.
루크와 실제로 마주친 적이 한 번도 없는데도 마치 그의 손바닥 위에 있는 양 숨이 막힌다.
파카는 숨 막히는 압박감에 시달리며 욕지거리를 입에 담았다.
“제길, 여기까지 손을 써 뒀을 줄이야.”
“파카 사제.”
“아 좀! 나도 알고 있다고! 제길! 이대로 퇴각한다!”
이번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 몇 년 동안 엘프의 숲을 들락거렸다.
계획의 담당자로서 겪은 고생과 지금껏 투자한 시간을 생각하니 아까워 미칠 것 같다.
이러려고 고생했나 자괴감이 온몸을 적신다.
하나 퇴각하는 것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늘어선 나무 사이로 라샤가 걸어 나오며 그들의 퇴로를 막았기에.
“습관이란 참 무서워.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반복하게 되잖아? 너희들처럼 말이야.”
그늘에 숨어 남을 이용하려고만 하는 습성을 비꼬는 것이었다.
더불어 루크가 가장 좋아하는 성향이기도 했다. 그 사람은 상대방이 배배 꼬여 있을수록 가차 없이 베어 버리니까.
파카는 저 멀리 상공에 떠 있는 루크를 힐끗 보고선 이를 뿌득 갈았다.
“큭, 천한 잡종 년 주제에 제 왕을 믿고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는구나.”
“끼리끼리 모인다더니 말하는 꼬라지가 소리아와 판박인걸?”
“당장에 네년을 찢어 죽이고 싶지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 주마. 트랜스 크로우!”
파카의 몸이 까마귀로 변하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까마귀 변신 마법은 데메그리 교 고위 사제쯤은 되어야 쓸 수 있는 마법이었고, 파카를 따르던 부하들은 사용하지 못하는 기술이었다.
그 말인즉슨 파카가 저 혼자 살자고 부하들을 버리고 떠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데메그리 교 사제들은 홀로 날아가 버리는 파카를 허망하게 바라보며 나직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와, 양심 없는 새끼인 건 알았지만 이건 좀…….”
“저딴 새끼를 상관이랍시고 대우해 줬다니.”
사제들의 허망해 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것처럼 두 자루의 단검이 허공에 푸른 잔상을 남기며 쇄도했다.
라샤의 단검은 십수 명가량 모여 있던 사제들 중 두 명을 골라 그들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더불어 단검에 부여되어 있던 마나 블레이드가 사제들의 몸 안에서 날뛰며 내부를 갈가리 찢어 놓았다.
“으아아아악!”
“이, 이봐! 우린 말단에 불과해! 항복할 테니 포로 대우를…….”
당장 눈앞에 있는 라샤가 문제가 아니었다.
저 멀리서 루크가 날아오고 있잖은가!
버림받은 처지에 인간계 정점이라 불리는 괴물을 상대할 정도로 의기가 넘치진 않는다.
그러나 항복 의사를 완전히 입에 담기도 전에 이번에는 사제들의 후방에서 태풍과도 같은 일격이 날아들었다.
“양심을 염가 판매로 넘겼나 보구만. 필요할 때만 포로 대우를 요구하는 건 너무 경우가 없잖아?”
후우우웅!
마나 블레이드를 흠뻑 머금은 바스타드 소드 한 자루가 후폭풍을 몰며 날아들었고, 모여 있던 사제들의 몸을 일거에 양단하였다.
콰직! 콰지지직! 우드득!
날이 어찌나 두터운지 검으로 베어 내는 게 아니라 둔기로 후려친 듯 둔탁한 파쇄음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사제들의 후방에서 아캄프가 걸어 나오며 바스타드 소드에 부여한 마나를 거두었다. 그러곤 눈두덩이 위에 손으로 그늘을 만들며 벌써 저만치 도망친 까마귀 한 마리를 응시했다.
“휘유~ 고놈 도망 하나는 일류급이구만.”
“쓸데없는 소리 할 시간에 페가수스나 끌고 와. 전하께선 남김없이 전멸시키라고 하셨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화살 한 대가 높이 날아올랐다.
화살촉이 영롱하게 반짝이는 것에서 하우스 산호의 조각으로 만든 화살촉이 달린 화살임을 알 수 있었다.
화살은 정확히 까마귀에 적중했고, 화살에 관통당한 까마귀가 아래로 추락하며 파카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아캄프는 은근슬쩍 라샤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라울의 존재를 언급했다.
“마무리는 형님이 가져가셨군.”
찰싹!
라샤는 아캄프의 손등을 매섭게 후려치며 콧방귀를 뀌었다.
“흥! 너도 라울도 용서하려면 아직 멀었어.”
라샤의 분위기가 예전보다 훨씬 누그러진 것을 느낀 아캄프가 넉살 좋게 어깨를 으쓱였다.
“언젠가는 해 준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지?”
아캄프의 능글맞은 말투는 잠깐 누그러졌던 라샤의 표정을 다시 험악하게 만들었다.
빠각!
“아야야야! 이 여편네야! 전투화로 걷어차는 게 어디 있냐!”
단단한 신발 앞코가 아캄프의 정강이를 가격했고, 아캄프가 정강이를 부여잡고 낑낑대는 동안 라샤는 눈을 흘기며 핀잔을 주었다.
“하여간 매를 벌어요, 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