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역대급 재능으로 환생-175화 (175/200)

# 175

175화 빙백검 (2)

전투가 끝나면서 소란이 일단락되었다.

고대의 정령왕끼리 전투를 벌인 것치곤 물리적 피해는 거의 전무했다. 숲 일부가 불에 타거나 대량의 나무가 꺾여 나갔거나 주거지역 일부가 파괴된 것이 전부(?)였다.

내막을 모르는 엘프 주민들은 혼란에 휩싸였다.

소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하더라 평화롭게 일상을 보내던 숲속 주민들이다.

근데 갑자기 요정왕이 죽었네?

거기다 데메그리 교와 결탁한 게 라울이 아니라 요정왕이라고 하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의 귀에는 모든 진실이 다른 세상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엘프의 숲 전역이 혼란의 도가니에 빠진 가운데 루크는 짐을 꾸리며 라샤에게 뒷일을 맡겼다.

“호위단과 함께 남아서 엘프의 숲 복구에 힘쓰도록 해.”

“엘프의 숲은 엘프들의 땅인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 줄 필요가 있을까요?”

“라이프 트리를 다룰 수 있는 건 너뿐이잖아?”

“라울도 있어요.”

“나로선 그자보다 네가 왕이 되는 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도 훨씬 더 편해질 것 같거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여태까지 중요한 역할이라면서 시키셨던 일들 말인데요, 그거 전부 절 요정왕으로 만들기 위한 포석이었던 건가요?”

“잘 알고 있군.”

“하, 참…….”

소리아가 데메그리 교와 결탁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순간부터 생각해 놓았던 바이다.

일이 잘 풀리면 요정왕의 자리가 공석이 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하면 루크 입장에선 한 가지 고민거리가 생긴다.

-누가 요정왕의 자리에 앉아야 나한테 가장 이득이 될까?

요정왕 후보는 요정왕 일족이어야 하고, 루크에게 절대적인 경의를 표하고 있는 자여야만 한다.

조건에 부합하는 자는 두 명뿐이다.

라샤 혹은 라울.

루크는 라울보다 라샤가 더 적합한 인재라고 판단했다.

“혹시 하프 엘프인 걸 신경 쓰고 있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신경 쓰이죠. 게다가 엘프의 숲에서 지낸 것보다 엘프의 숲 바깥에서 지낸 시간이 더 많아요. 계속 엘프의 숲을 떠나 있던 하프 엘프가 갑자기 요정왕이 되는 건 이상하잖아요.”

“그렇게 따지면 일개 남작이었던 자가 여러 개의 나라를 통합해서 국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게 더 이상하게 느껴진다만?”

“전하, 전…….”

“강요하진 않겠어. 하지만 이것만큼은 말해 두지. 난 네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고, 내 판단을 받아들일지, 부정할지 결정하는 건 너야.”

엘프의 숲은 다스리는데 엄청난 능력이 필요한 건 아니다.

숲의 넓이에 비해 인구 밀도가 매우 낮은 데다 오랫동안 내려온 각종 관습이 규율처럼 작용하고 있기에 별다른 정책 제정이 필요 없다.

즉, 요정왕 일족이라는 조건과 지극히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만 해도 무난하게 다스릴 수 있는 땅이라 할 수 있었다.

특히 이번 소동에서 라샤가 직접 발로 뛰며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공격을 막아 내는 모습까지 보여 주었잖은가. 여론을 휘어잡을 초석을 깔아 주었으니 이후부터는 라샤 하기 나름이다.

라샤는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한숨을 푹푹 쉬다가 결국 체념하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부정하면 저만 불충스런 기사가 되는 거네요. 어쩔 수 없죠. 일단 해 볼게요.”

“지원군격으로 아캄프를 붙여 주도록 하지.”

“최대한 험하게 부려 먹고 반납해 드릴게요.”

“영구 소장해도 상관없어.”

그렇게 루크는 라샤와 아캄프, 호위단을 남겨 둔 채로 숲을 떠났다.

혼란한 와중에 루크가 남아 있으면 주민들의 이목이 루크에게 쏠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쯤에서 빠져 주어 라샤에게 숲 복구 작업의 주도권을 넘겨주는 게 여러모로 모양새가 좋았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뒤처리 작업에 관여하기 귀찮은 것도 일부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왜, 밥 먹을 때까진 즐거워도 설거지할 생각을 하면 귀찮아지지 않은가.

루크는 모든 뒤처리를 라샤에게 떠맡긴 채 레이아와 함께 빌로스 왕국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 * *

엘프의 숲 전역에 아직 소란의 여파가 남아 있는 와중에 요정의 무덤 안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요정의 무덤 깊숙한 곳에선 바실리크스가 여전히 똬리를 틀고서 잠들어 있었다.

침입자가 들어오는 게 아니면 항상 동면을 취하고 있는 게 그의 일상이었다.

당분간 아무도 찾아들지 않겠거니 하고 자던 중.

바실리크스는 불청객의 방문을 감지하고선 눈을 떴다. 그러곤 불청객의 정체를 확인하며 아는 체를 하였다.

“누군가 했는데 자네였군.”

찾아온 이는 검은 로브를 두른 해골이었다.

그가 리치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방문한 리치, 카라스코는 턱뼈를 달그락거리며 목소리에 불편한 심기를 담아냈다.

“내 봉인석은 어디 있는지부터 묻고 싶은데 말이야.”

“봉인석을 가지고 온 꼬맹이라면 바깥으로 내보냈지.”

“어이, 바실리스크. 난 분명히 내가 올 때까지 봉인석을 잘 보관하라고 했었지. 꼬맹이 하나 죽이는 게 그리 어려웠나 보지?”

“오랜 친구여, 자네가 부탁한 건 봉인석을 보관하라는 거였네. 그래서 꼬맹이를 데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지.”

“꼬맹이의 생사 따윈 아무래도 좋아. 중요한 건 여기 있어야 할 봉인석이 없다는 거지. 넌 날 실망시켰어.”

산드라로 하여금 봉인석을 훔치게 부추기고 버니를 무덤으로 보내라고 권한 범인은 다름 아닌 카라스코였다.

그때는 아직 데메그리 교에 이용 가치가 있었기에 간접적으로 봉인석을 빼내려 했었다.

하지만 갑자기 변수가 생겼다.

갑자기 5성급 마물이 탄생한 것이다.

그로 인해 계획을 전폭적으로 수정해야 했다.

카라스코 입장에선 엘리나가 오스카에게 이용당하기 전에 오스카를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봉인석을 회수하는 시간이 늦어지고 말았다.

갑자기 계획을 수정하는 바람에 생겨난 공백기 동안 카라스코의 손에 들어왔어야 할 봉인석이 루크에게 넘어가고 만 것이다.

바실리스크는 봉인석을 넘겨준 게 불가항력이었음을 어필했다.

“루크라고 했었나? 딱 봐도 괴물이더군. 녀석과 싸우느니 봉인석을 넘기는 게 신상에 이로울 거라 판단했지.”

“몸뚱이가 돌이라서 머리까지 돌이 되어 버렸나 보지? 여기가 마나 동결 환경이라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

“그거까지 감안해도 5 대 5였네. 모처럼 찾은 안락한 보금자리를 파괴하면서까지 싸우고 싶진 않더군.”

“이 곰팡내 나는 곳에서 지내는 생활을 고집하겠다?”

“날 여기서 꺼내 주겠다는 제안은 확실히 매력적이긴 했지. 하지만 고대 병기 쪽 일은 폐업한 지 오래라서 말일세. 어쨌든 난 해 줄 수 있는 데까지 해 주었으니, 더 이상 내 보금자리에서 잡음 일으키지 말고 꺼지게나.”

둘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지인의 선상에 놓여 있었다. 굳이 종착하자면 바실리스크는 인간이 아니니 지인이라기보단 아는 친구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지만 말이다.

부탁은 들어줄 수 있어도 명령을 받아 들어야 할 관계는 아니다.

때문에 바실리스크는 거칠게 축객령을 내리고선 다시금 똬리를 틀었다.

그때 카라스코가 바실리스크를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병기로 쓰이던 놈을 불쌍해서 쉴 자리를 만들어 줬더니, 안락함에 찌들어 정신까지 녹이 슬었나 보구나.”

잠들려던 바실리스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한 판 붙어 보자는 거라면 썩 권하고 싶진 않군. 마나 동결 환경은 네게도 적용될 텐데?”

마나 동결 환경은 곧 같은 성질을 띠고 있는 마기 또한 동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기가 없으면 평범한 스켈레톤에 불과한 리치가 바실리스크에게 대항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카라스코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기를 구사했다. 카라스코의 손에 마기가 배열되는가 싶더니 그의 턱뼈가 달그락거렸다.

“아둔한 녀석, 이 무덤을 만든 게 누구인지 잊었나 보구나.”

이곳에 마나 동결 마법진을 설치한 장본인은 카라스코였다.

마법진을 설치한 장본인이니 해제하는 것도 가능하다.

어느새 카라스코의 손에는 푸른 비늘로 이루어진 검에 쥐어져 있었다.

푸른 검의 정체를 알아본 바실리스크가 경악을 자아냈다.

“빙백검! 설마 벌써 마법진을!”

검이 있는 장소의 주변 일대를 마나 동결 상태로 빠트린다는 천공의 3대 신기, 빙백검이었다.

오래전, 카라스코는 빙백검을 촉매 삼아 요정의 무덤 전체를 마나 동결 환경으로 만들 마법진을 설치했었다. 마법진의 효력을 유지해 주던 빙백검을 회수했기에 이미 마나 동결 환경은 해제된 지 오래였다.

바실리스크는 눈을 부릅뜨며 카라스코를 노려보았다.

“카라스코!”

돌로 된 눈꺼풀이 한껏 벌어지며 보랏빛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코앞에 서 있던 카라스코의 신형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없었다.

사라졌던 카라스코는 바실리스크의 머리 위에서 나타났다.

“그렇게 무덤이 좋다면 아예 묻혀 지내거라.”

리치가 마법만 쓸 줄 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라그나로스가 괜히 그를 ‘루크와 같은 처지’였다고 칭한 게 아니다.

카라스코는 능숙한 몸놀림으로 빙백검을 역수로 쥐며 바실리스크의 몸에 찔러 넣었다.

쩌적! 쩌저적!

빙백검이 가진 또 다른 효과, ‘찌른 대상을 얼린다’는 빙결 효과가 발동하며 검을 찔러 넣은 부위를 중심으로 바실리스크의 몸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잠시 후 바실리스크의 몸 전체가 꽁꽁 얼어붙었다.

얼음덩이에 갇힌 바실리스크 위에 서 있던 카라스코가 빙백검을 쑤욱 뽑아냈다. 그러고 나선 지면으로 뛰어내리며 손가락뼈를 튕겼다.

따각!

캐스터네츠 두드리듯 경쾌한 소리가 무덤 안을 메웠고, 그와 함께 검은빛으로 이루어진 마기 덩어리가 상공에서 떨어지며 바실리스크의 얼어붙은 몸에 강한 충격을 가했다.

퍼엉!

얼어붙었던 바실리스크의 몸이 박살 나며 얼어붙은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파편 표면에 발광 이끼의 광채가 반사되면서 불꽃놀이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빛 조각의 향연이 펼쳐졌다.

카라스코는 반짝이는 얼음 파편을 등지며 로브 앞섬을 입 위로 끌어올렸다.

“새 병기가 활동해 주고 있는데 녹슨 병기에 집착하는 것도 우습긴 하지.”

이미 들을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린 바실리스크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남기고선 유유히 무덤을 떠나는 카라스코였다.

* * *

같은 시각, 복귀 길에 오른 마차 안에선 파이가 기대에 찬 눈빛을 띠고 있었다.

“소환해! 소환해!”

아까부터 어스와 윈터를 소환하라고 난리다.

새로운 고대 정령왕의 합류는 곧 꼬꼬마 정령 부대의 멤버가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파이의 재촉 속에서 루크는 미리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소환할 건데 한 가지만 약속해. 절대로 날뛰지 않기로.”

“무리! 무리!”

“꼬리털 뽑아 버린다.”

“봐 줘! 봐 줘! 요즘 탈모! 요즘 탈모!”

“털갈이를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제랄드가 들으면 극대노를 금치 못하겠군.”

요즘 제랄드가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부분이기에 괜히 한 번 떠올려 봤다.

파이의 반응은 둘째치고 고대 정령왕끼리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정령의 성격은 계약자의 성향에 영향을 받는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했던 라그나로스도 루크와 계약하고 나서 안정을 되찾았다.

어스와 윈터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확인해 볼 겸 소환해 보기로 했다.

루크는 식판을 놓기 위해 설치된 받침대를 잡아 빼내었다. 받침대 위에 붉은색, 푸른색, 초록색, 노란색 총 4개의 정령석을 올려놓고선 소량의 마나를 부여했다.

흘러나온 마나가 정령석에 알알이 스며들면서 꼬마 정령 넷이 한 자리에 소환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