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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재능으로 환생-176화 (176/200)

# 176

176화 신성제국으로 가는 선발대 (1)

직사각형 모양의 길쭉한 받침대 위에 네 마리의 정령이 옹기종기 소환되었다.

본체가 화염으로 둘러싸인 형태의 라그나로스.

물로 이루어져 있는 작은 소녀 모습의 아쿠아.

본체가 바람으로 둘러싸인 형태의 윈터.

바위 껍질을 두르고 있는 사슴 모습의 어스.

가장 먼저 아쿠아가 윈터와 어스를 보고선 무척 기뻐하였다.

“어머나! 반가워라. 윈터, 어스, 오랜만이에요. 후후, 둘 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오랜만에 옛 동료들을 만나 기뻐하던 아쿠아였으나 옆에서 라그나로스가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고선 어깨를 움츠렸다.

“그… 일단 어스만 반가워요.”

윈터와 라그나로스의 사이가 나쁘다는 거야 이미 알고 있는 부분이다. 라그나로스의 눈치를 본답시고 떠올린 방법이 어스에게만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거 가지고 되겠는가. 좀 더 요령 좋은 방법도 많건만.

한데 의외로 라그나로스에겐 잘 먹혀들었다.

아쿠아의 인사 대상에서 윈터가 제외되자마자 라그나로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저 정도로 기분이 풀어지다니, 정말 단순하기 짝이 없다.

“나한테만 인사를 하지 않는다니 너무 매정한 거 아냐, 아쿠아? 우리 사이잖아?”

윈터가 능청스럽게 아쿠아의 옆에 달라붙으며 느끼한 말투를 구사했다.

윈터의 팔이 아쿠아의 어깨에 둘려지려던 찰나, 라그나로스가 불쑥 끼어들며 윈터의 팔을 뿌리쳤다.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도저히 못 봐주겠군.”

“사과해라, 뭐 그런 건가?”

“네가 한 짓을 생각하면 백번 사과해도 모자랄 텐데?”

“흥, 웃기는군.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지. 네가 인간의 좋은 점에 대해 백번 설파한다 하더라도 인간이 추한 존재라는 게 바뀌진 않아.”

루크가 새로운 주인이 되었어도 윈터의 성향은 여전했다.

반면에 어스는 완전히 순한 성격으로 바뀐 듯하다. 라그나로스와 윈터의 대화 따윈 관심 없다는 듯 진짜 초식 동물이라도 된 양 받침대 테두리 부분을 야금야금 뜯어먹고 있었다.

아무래도 윈터의 인간 혐오는 주인의 성향과 무관한, 윈터 본연의 성격인 것 같았다.

윈터는 고개를 홱 돌려 루크를 올려다보더니 서슴없이 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내뱉었다.

“일단 주종 관계가 되었으니 명령을 들어 주긴 하겠어. 어차피 너도 병기로서 우릴 활용하고 싶은 거겠지? 말 안 해도 다 알아. 인간은 항상 그래 왔으니까.”

배배 꼬이고, 편협하고, 공격적이다. 한데 윈터 본인은 마치 ‘나는 할 말 다하고 사는, 기가 세고 자유로운 성격이야.’라고 생각하는 듯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고 있었다.

이런 타입이라면 수도 없이 봐 왔다.

‘자유’를 잘못 해석하고 있는 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이들이 자주 내뱉는 말 중에 ‘내가 원래 아닌 건 잘 못 참아.’, ‘나 좀 욱하는 성향이 좀 있어서.’ 등의 대사를 꼽을 수 있다.

그들의 뇌리에서 자유와 이기주의는 일식 때 해와 달이 겹친 것처럼 똑같은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는 해와 달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떨어져 있는 것임에도 말이다.

책임지지도 못할 발언을 제멋대로 지껄여 놓고 그 부분에 대해 지적하면 마치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당한 것처럼 발작을 일으킨다.

윈터가 딱 그런 타입이었다.

“…….”

루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하여 늘 입가에 맺혀 있던 웃음기를 지웠다.

씨익 웃는 게 아닌, 무표정을 짓는 것에서 마차 안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먼저 분위기를 읽은 아쿠아가 윈터를 말렸다.

“윈터, 빨리 사과하세요. 얼른요!”

“내가 왜? 틀린 말한 것도 아니잖아?”

윈터에게 화를 내던 라그나로스조차도 바들바들 떨며 충고의 말을 날렸다.

“야, 야야야, 빨리 무릎이라도 꿇어. 너 그러다가 진짜 골로 간다. 빨리!”

“흥, 도구로서 살다 보니 생각까지 도구로 전락했나 보구만. 골로 가긴 뭘 골로 가? 기껏 손에 넣은 병기를 망가뜨리기라도 할까 봐?”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윈터의 태도에 아쿠아와 라그나로스가 냉큼 루크에게 양해의 말을 구했다.

“주인님, 윈터가 아직 봉인에서 풀려난 여파가 덜 풀렸나 봐요. 차분하게 얘기하면 들을 아이니까 노여움을 푸세요.”

“주인아. 쟤가 원래 좀 이상한 애거든? 그러니까 일단 좀 웃자. 스마일~ 그 왜, 너 평소에 늘 하는 것처럼 씨익 웃자. 응?”

루크는 손등으로 아쿠아와 라그나로스를 옆으로 밀어내었다. 그러곤 고자세를 유지하는 중인 윈터를 덥석 잡았다.

아직도 윈터는 뭐가 문제인지 모른 채 루크의 행동을 탄압으로 몰아갔다.

“왜? 고통이라도 주려고? 맞는 말하면 폭력으로 대답하는 거 보니까 옛날이랑 다를 것도 없구만.”

“윈터와 계약한 자로서 선언하노니, 주인과 정령의 관계를 해지하고자…….”

“자, 잠깐! 뭐, 뭘 하려는 거야?”

“뭘 하긴. 계약 해지하려는 거지.”

“날 풀어 주겠다고?”

“누가 풀어 준다고 했지? 계약된 상태에서 소멸시키면 마나가 역류하니까 계약부터 해지하려는 것뿐이야.”

기껏해야 버릇 고치려고 고통을 주는 게 한계겠거니 하며 제멋대로 체벌을 상상했던 윈터다.

그런데 소멸시켜 버린단다.

소멸을 시켜? 무려 고대의 정령왕인데?

남들은 얻지 못해 안달인 대규모 학살 병기를 이렇게 쉽게 버린다고?

윈터는 이해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은 상황 속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 이봐!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나야! 나라고! 고대 정령왕인 날 버리겠다고?”

“처음부터 다시 해야겠군. 윈터와 계약한 자로서 선언하노니, 주인과 정령의 관계를 해지하고자 한다. 계약자로서 이행해야 할 모든 의무, 계약자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아, 알겠다! 그, 그거지? 해, 해약하는 척하면서 내게 압박감을 주려는 거지?”

“…포기할 것을 맹세한다.”

“안 돼!”

해약의 맹세가 끝난 후에야 모든 게 연기가 아닌 진심인 것을 깨닫고 절규하는 윈터였다.

계약이 해지되면서 윈터에게 부여되어 있던 마나가 루크에게로 되돌아왔다. 더불어 윈터는 초록색 정령석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며 자유 계약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정령석을 부수고자 예비용 단검에 마나 오오라를 부여하여 들이대려던 찰나.

라그나로스가 끼어들며 단검을 가로막았다.

“주인아,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줘.”

“의외군. 오래전부터 윈터를 싫어하고 있던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지.”

“맞아, 윈터 녀석은 누가 봐도 빌어먹을 자식이지. 하지만 갱생의 여지가 없는 건 아냐.”

“그래서 살려 주라고 요청하고 있는 건가?”

“그래.”

“요령이 없군. 모름지기 목숨을 구할 땐 목숨을 쥔 자를 납득시키거나 그에 준하는 이득을 안겨 주거나 둘 중 하나는 충족시켜야 하지. 그 어느 쪽도 충족되지 않은 것 같다만?”

라그나로스는 현재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 온도로 열기를 끌어 올리며 씨익 웃었다.

“나도 슬슬 아랫놈을 가지고 싶거든.”

루크와 라그나로스의 시선이 맞닥뜨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루크와 눈을 마주치고 있긴 하다만 본체를 덮고 있는 화염은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 불안정하게 일렁였다.

루크는 라그나로스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단검을 거두었다.

“두 번은 없어.”

“똑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그땐 내 손으로 직접 없애 버리겠어.”

“무슨 소릴. 보증을 섰으면 같이 가는 게 맞지.”

“엥? 나까지 죽어야 되는 거야?”

“아랫놈이 잘못하면 윗놈도 같이 책임져야지?”

“끄응! 에라, 모르겠다! 그깟 보증 선다, 서! 다시 계약해!”

라그나로스의 정성을 봐서 이번에는 특별히 봐주기로 했다. 손을 뻗어 초록색 정령석에 다시금 마나를 부여하는 동안 루크의 입이 달싹였다.

“가만 보면 너도 참 정이 많은 놈이야.”

덧붙여 저 혼자 딴 세상에 있는 것처럼 혼자 받침대를 우적우적 뜯어먹던 어스가 눈치 없는 일침을 날렸다.

“라그는 멍청해.”

“야! 어스! 받침대 그만 뜯어먹고 주인한테 인사 좀 해라!”

“아, 깜빡했다.”

“어후, 한 놈은 개념이 없고, 한 놈은 눈치가 없고. 중간에서 나만 뭔 고생이냐.”

제 친구들 챙기느라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라그나로스였다.

그리하여 루크는 다시금 윈터와 재계약을 맺게 되었다.

죽다 살아난 윈터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다가, 받침대 끄트머리까지 스스로를 몰아넣고선 쭈뼛거리며 말을 꺼냈다.

“저…….”

“어이.”

“아! 네! 말씀하십시오, 주인님.”

“아직도 이 구역의 미친놈 행세를 하고 싶나?”

“저, 절대로 아닙니다!”

“약하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안 그래?”

“야, 약하다니… 그래도 명색이 고대 정령왕인데…….”

“뭐?”

“아닙니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앞으로 한동안 지켜보겠어. 라그, 단단히 교육시켜 둬.”

라그나로스는 이때다 싶어 윈터를 받침대 구석으로 데려가서 조목조목 주의 사항을 알려 주었다.

루크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는 것부터, 앞으로 자기 대신 파이를 상대하라는 말과 아쿠아에게 찝쩍거리지 말 것을 단단히 일러두었다.

윈터와의 대화가 일단락된 후 루크는 어스를 덥석 잡아다가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어스, 카라스코의 건축물은 네가 만들었다고 들었어.”

“으엉~ 내가 만들었지.”

“어떤 목적으로 만든 건지 알고 싶은데 말이야.”

“건물형 마물은 충격을 흡수해서 저장해 둬. 그리고 카라스코가 명령을 내리면 한꺼번에 방출해. 많이 축적되면 주요 도시들을 한 방에 파괴할 수 있어.”

원래 태평한 성격인 건지, 말하는 속도가 느릿느릿하여 주의 깊게 들어야지만 맥락을 파악할 수 있었다.

요컨대 건물형 마물은 대규모 학살 병기로서 제작된 물체라는 거다.

무너지지 않는 성벽이 존재한다면 누구든 성벽을 토대로 수도를 건설할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성벽에 도시 하나를 파괴할 만큼의 충격이 저장되고, 높은 인구 밀도를 자랑하는 도시가 완성되면 수백만 인구를 한꺼번에 몰살시킬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는 셈이었다.

그야말로 인간 혐오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함정이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당장 제거해야겠군. 건축물을 철거할 수 있겠어?”

“으엉~ 내가 만든 거니까 내가 제거할 수 있어.”

“좀 더 욕심을 보태자면 건물은 철거하지 않고 마물화만 풀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좋겠다만.”

“그건 카라스코의 권한. 난 못해.”

“그럼 한 번 철거하고 다시 건설하는 건?”

“할 수 있어. 근데 오래 걸려. 성벽 하나당 50년 걸렸어.”

헥토 요새나 헤테룬의 성벽을 만드는 데 각각 50년이 걸렸다고 한다. 북방 장벽의 경우엔 150년이 걸렸다고 하니 왕위에 앉아 있는 동안 하나 재건하면 많이 재건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철거밖에 답이 없었다.

작업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말이다.

루크는 마부석과 이어진 작은 창문을 열고선 마부에게 많이 돌아가는 루트로 갈 것을 명했다.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북방 장벽부터 형무소, 헥토 요새까지 쭉 훑으면서 헤테룬으로 가자고.”

지시를 내린 루크는 좌석 팔 받침대에 팔꿈치를 대며 턱을 괴었다.

어스의 말에 포함된 건물형 마물의 능력 발동 조건이 마음에 걸린다.

‘카라스코가 명령을 내리면 충격파를 발산한다라. 그렇다면 카라스코는…….’

머릿속에서 갖가지 생각이 교차하는 동안 루크 일행을 태운 마차는 급격히 방향을 틀며 멀리 돌아가는 루트로 선회하였다.

* * *

같은 시각, 빌로스 왕국의 수도 헤테룬에 급전이 날아들었다.

루크의 귀환 일정이 늦춰졌다는 것을 모르는 그란데 공작은 안절부절못하며 집무실 안을 왔다 갔다 했다.

“허, 이 일을 어쩐다. 우리끼리 멋대로 정할 사안이 아니긴 한데, 그렇다고 이대로 차일피일 미룰 순 없고…….”

책상 위에는 방금 신성제국의 사자가 전해 준 서신이 들려 있었다.

서신의 첫 장에는 심상치 않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빌로스 왕국의 국왕 루크 전하께 오스카 대주교님이 돌아가셨음을 알립니다. 뿐만 아니라 제국 서쪽에서 마물과 언데드 군단의 침공이 시작되었습니다.]

더불어 열어 둔 창문에서 바람 한 줄기가 새어 들어오더니 서신의 첫 장을 살짝 젖혔다.

그로 인해 서신 두 번째 장 끄트머리의 문구가 겉으로 드러났다.

[군단을 이끌고 있는 우두머리는 5성급 마물입니다. 정찰조를 파견한 결과, 5성급 마물이 실종된 엘리나 왕녀의 모습을 띠고 있었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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