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178화 그딴 건 옛날 옛적에 넘었어 (1)
빌로스 북동쪽 국경에 병력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제랄드가 이끌고 온 중앙 정예군에 각 영지에서 차출된 병사들이 합쳐지면서 1만에 가까운 병력이 한자리에 모였다.
빌로스 왕국의 국력을 감안하면 그 이상의 병력을 모으는 것도 가능하긴 하다. 하나 신성제국의 운명이 1분 1초를 달리고 있는 마당인지라 단기간에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병력을 먼저 파견하기로 하였다.
더불어 추가 병력 파견 여부는 온전히 루크의 판단에 맡기는 걸로 결정을 내렸고 말이다.
대부분 병력이 도착하고, 마지막으로 남다른 체력을 자랑하는 빌로스 제2의 정예군이 도착했다.
“어이~ 대단한 부하 나리~ 오랜만이구만.”
아레나 공국과의 내전 시절에 붙었던 제랄드의 별명을 아직까지도 사용하는 러스트였다.
그 왜 제랄드가 아레나 공국의 제2 관문을 공략할 때 제2 관문 안으로 잠입하면서 포로들의 말에 장단을 맞춰 주느라 자기 스스로를 ‘대단한 부하’라 칭한 적이 있지 않은가.
제랄드는 간만에 옛 추억이 떠올라 피식 웃고 말았다.
“오랜만입니다, 러스트 자작님.”
“쩝, 자작 호칭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자네한테 들으니 이상하게도 닭살이 돋는군.”
“과분하지만 기사의 신분으로 총사령관의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과분하다니 겸손이 심하군. 2만의 병력으로 아레나 공국을 점령한 사람이 사령관을 맡지 않으면 누가 맡겠는가. 그리고 자네도 마음만 먹으면 귀족 작위를 받을 수 있는 걸로 아네만.”
루크가 제랄드에게 귀족 작위를 하사하려 했으나 제랄드가 극구 거부하여 무산됐었다.
대안으로 제랄드에게 언제든 귀족 작위를 요청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으니 제랄드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귀족 작위를 받을 수 있었다.
제랄드는 습관적으로 자신의 오른팔을 주무르며 인위적인 미소를 띠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검을 놓고 영주로서 살아갈까 합니다.”
러스트는 제랄드의 표정에서 결연함이 묻어 나오는 것을 감지하곤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무언가 사정이 있다는 게 빤히 보였지만 구태여 물어보는 촌스러운 짓은 하지 않았다.
“자네의 결정이니 전하께서도 존중해 주실 테지. 그나저나 언제 출발할 건가?”
“오크 군은 멀리서 오셨으니 체력을 감안해서 하룻밤 쉬었다 갈까 싶습니다.”
“우리 때문에 일정을 늦추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네. 우리 오크군이 어떤 군대인지 잊은 건 아니겠지?”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사양 않고 출발하겠습니다.”
나름대로 배려한답시고 휴식 시간을 배정한 것인데, 아무래도 쓸데없는 배려였던 듯하다.
그렇게 오크 군까지 합류하면서 1만 대군이 갖춰졌고, 제랄드를 필두로 신성제국을 지원하기 위한 빌로스 군이 북쪽을 향해 출정했다.
빌로스 왕국에서 신성제국으로 가는 루트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구 거인국’을 가로질러 들어가는 길, 또 하나는 ‘엘프의 숲-크레인 왕국’을 차례대로 지나서 들어가는 길이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구 거인국을 가로질러 들어가는 게 빠르다.
구 거인국으로 진입하기 위해 빌로스 북서쪽 국경으로 갔는데, 생소한 풍경이 제랄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존에 존재하던 북방 장벽이 전부 사라진 채 휑한 벌판이 펼쳐져 있는 게 아닌가.
기존의 북방 장벽이 사라진 자리에선 도널드 후작이 새로운 장벽을 건설하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하룻밤 묵었다 갈 텐가? 자리는 적당히 알아서 잡게나. 장벽을 철거한 후라서 남아도는 게 공터일세.”
환영해 주는 건 고마운데 자꾸만 도널드 후작의 얼굴에 붙어 있는 다수의 상처에 눈길이 갔다.
흡사 맹수와 맨손으로 싸운 듯 여기저기 할퀸 자국이 남아 있었다.
제랄드는 자꾸만 상처에 시선이 가려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러 시선을 허공에 두며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철거하신 겁니까?”
“며칠 전에 들렀다가 가셨다네. 정말 대단했지. 어스가 발을 몇 번 구르니까 거짓말처럼 장벽이 모래가 되어 가라앉더군. 아 참, 전하께서 자네가 도착하면 전해 주라고 한 메모가 있다네.”
도널드 후작이 품에서 고이 접은 종이를 건넸다.
종이를 받아 들어 펼쳐 보니 루크의 필적임이 확실한 글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서신에는 카라스코의 건축물이 충격을 저장하는 능력 및 마물의 기운을 감추는 능력을 갖춘 4성급 마물이며 카라스코의 명령이 떨어지면 저장했던 충격을 한꺼번에 방출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니 신성제국에 도착할 시 제국군이 카라스코의 성벽을 방벽 삼아 진을 치고 있으면 곧바로 철수 조치를 취하도록 권하라는 주의 사항이 적혀 있었다.
다 읽은 서신을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고 있는데 도널드 후작이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얘기는 들었네. 엘리나 왕녀… 전 왕녀님이라 해야 하나? 그분이 5성급 마물이 되셨다지?”
“네, 제국군에서 몇 번이고 거듭 확인했다고 하더군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전하껜 가혹한 싸움이 되겠군.”
마물이 되면 인간이었을 적의 기억은 사라진다.
그 말은 즉 지금의 엘리나는 엘리나의 모습으로 둔갑할 수 있는 일개 마물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렇다곤 해도 그녀를 두 번 죽이는 일이 될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특히 루크에겐 더할 나위 없이 가혹한 일이 될 터.
제랄드는 루크에게 가해질 부담을 떠올리며 미간을 살짝 좁혔다.
“최상의 시나리오는 전하께서 제국에 도착하시기 전에 끝을 내는 거겠지요.”
“하지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는 알겠습니다. 상대는 5성급 마물. 원래라면 저따윈 상대도 안 되는 게 당연합니다. 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쪼록 무리는 하지 말게. 자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전하는 자네도 중히 여기고 계신다네.”
“노력해 보겠습니다.”
대화가 마무리되어 가는 분위기로 흘러가는 가운데, 제랄드는 도저히 신경 쓰여 못 참겠다는 듯 질문을 날렸다.
“실례지만 얼굴의 상처는 어쩌다가 입게 된 것입니까?”
그에 도널드 후작이 멋쩍게 코를 긁으며 나직이 읊조렸다.
“그냥 은퇴가 연장되었다는 것만 알아 두게. 일이 생겨 당분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어서 말일세.”
내막을 모르는 제랄드로선 영문을 알 수가 없어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 * *
이후에 제랄드가 이끄는 빌로스 군은 구 거인국의 영토를 종단했다.
거인족이 네튤 제도로 이주하면서 구 거인국의 영토는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가 되었다.
난쟁이 마을의 무법자들도 자멸한 지 오래라서 남아 있는 자들이라곤 자이언트 루돌프의 시체로 겨우 연명하고 있는 소수의 부랑자들이 전부였다.
한 달에 달하는 긴 원정길을 이동한 결과 빌로스 군은 신성제국 남쪽 국경에 도착했다.
국경 도시의 외곽에는 미리 연락을 받은 제국군이 마중 나와 있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빌로스의 여러분. 신성제국의 성기사 레이더라고 합니다. 과거에 수많은 마찰이 있었음에도 지원의 손을 내밀어 준 빌로스 왕국에 뭐라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레이더.
기사들 사이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자가 있을까.
제국 3성의 일각이자 육지의 3대 신기인 ‘백금 갑옷’의 소유자인 4성급 성기사였다.
여기서 성기사의 등급을 의미하는 ‘N성급’은 마물의 등급표와 완전히 동일하다. 4성급 마물과 4성급 성기사의 무력은 동일하다고 보면 된다.
신성력이라고 해서 정말로 신의 힘을 빌려 쓰는 게 아니다.
데메그리 교가 마족의 힘을 빌려오는 것처럼 아슈타르 교는 천족의 힘을 빌려오는 것에 불과하다.
아슈타르 교가 대세 종교이기 때문에 신성력이 고귀한 힘으로 취급받는 것이지, 신성력 자체가 가진 메커니즘은 마기와 다를 바 없었다.
제랄드는 레이더가 내미는 손을 마주 잡으며 악수를 나누었다.
“빌로스 지원군 사령관 제랄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직 악수를 나누는 도중이건만 레이더는 다른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실례지만 루크 국왕 전하께선 오시지 않았습니까?”
“전하께선 다른 중요한 용무를 처리하느라 나중에 합류하실 예정입니다.”
“하아, 나중에… 말입니까.”
루크가 없다고 하자마자 레이더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감돌았다.
레이더가, 아니 제국군 전체가 루크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레이더의 표정을 통해 엘리나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루크밖에 없다는 생각이 간접적으로 전해져 왔다.
제랄드는 싸우기도 전에 사기가 급격히 저하되고 있음을 감지했다.
“전하의 출정이 약간 늦춰진 것이지 안 오시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전하께서 오시기 전에 최대한 전황을 호전시켜 두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아, 일단 늦게라도 오시는 걸 위안 삼을 수밖에 없겠군요.”
“말이 나온 김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려 주십시오. 현황을 알아야 대책을 짤 수 있으니 말입니다.”
“벌써 제국 서부 지방과 대신전은 초토화됐고, 지금은 남부 요새에 남은 병력을 집결시켜서 항전할 준비를…….”
빠른 말투로 현황을 읊던 레이더가 별안간 말꼬리를 흐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제랄드에게 꽂혀 있던 시선이 어느덧 제랄드의 어깨 너머로 옮겨 가 있었다.
제랄드의 뒤에 있는 누군가를 보고서 말꼬리를 흐린 것이다.
현재 제랄드의 뒤에는 스텔라가 서 있다.
스텔라를 보는 레이더의 시선에 적의가 깃들어 있었다.
분명한 건 두 사람이 초면이라는 것이다.
스텔라는 영문을 알 수가 없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저한테 뭐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레이더는 숨길 생각도 없다는 양 적의를 풍기며 검 손잡이 위에 손을 올렸다.
“제랄드 경, 어째서 이 자리에 다크엘프가 있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영문을 알 수 없는 건 제랄드도 마찬가지였다.
“드래프트 영지 시절 때부터 복무해 온 제 부관입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
“드래프트 영지 시절 때부터라고 하면 모릅니다. 믿을 만한 신원을 가진 자인지 확실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정확히 8년째 복무 중인 친구입니다. 딱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검에서 손을 떼고, 어째서 제 부관의 신원을 묻는지 제대로 대답해 주십시오.”
제랄드 또한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설명도 없이 공격태세부터 취한 것을 매우 불쾌하게 여기고 있다는 의사표시였다.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레이더가 검 손잡이로부터 손을 떼었다. 자세를 풀긴 했으나 스텔라를 보는 시선엔 여전히 적대적인 분위기가 담겨 있었다.
“지금 데메그리 교에 어떤 종족이 가담했는지 알고 계십니까?”
“샤크족이 가담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샤크족만 가담한 게 아닙니다. 최근에 또 다른 종족이 추가로 엘리나의 군단에 가담했지요.”
이내 곧 레이더의 입에서 스텔라를 적대시한 이유가 흘러나왔다.
“다크엘프 일족 전원이 엘리나의 휘하에 들어갔습니다. 거기 있는 다크엘프 기사가 동족을 몰살시킬 각오가 되어 있는 게 아니라면, 언제 배신해도 이상할 게 없는 존재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