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
179화 그딴 건 옛날 옛적에 넘었어 (2)
다크엘프.
엘프의 숲에서 쫓겨난 엘프 일족이자 더 이상 일족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뿔뿔이 흩어져 부랑민 생활을 하고 있는 걸로 유명하다.
그들 대부분이 용병 생활을 하고 있고, 대륙 전역에 흩어져서 대부분이 교류 없이 지내 왔기에 그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니, 다크엘프 일족이 한 자리에 뭉친 것까지는 그렇다 치자.
문제는 그들이 엘리나의 휘하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해당 소식을 듣고 가장 놀란 자는 다름 아닌 스텔라 본인이었다.
“그, 그게 정말인가요? 정말로 다크엘프 일족이 한군데에 모였나요?”
전 대륙에 흩어져 있던 다크엘프들이 어떤 방법으로, 어떤 루트로 한자리에 모였단 말인가!
게다가 다른 이들은 전부 한자리에 모였는데 왜 자신에게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단 말인가!
스텔라는 놀란 감정 끄트머리에 소외감이 살짝 섞여드는 것을 느끼며 사실 여부를 되물었다.
그에 레이더가 심호흡으로 감정을 한 차례 가다듬고선 입을 열었다.
“사로잡은 다크엘프 포로를 문책해 보니 엘리나와 다크엘프 사이에 협상이 오갔다더군요. 인간 말살에 협조하는 대신 새 시대가 도래했을 때 다크엘프 일족을 중용해 주기로 했다고 합니다.”
스텔라의 가슴속에서 여러 가지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이미 다크엘프 일족이 뭉쳤다면 ‘대륙 어딘가에 마을을 재건하여 다크엘프들을 불러 모은다.’는 그녀의 계획 자체가 벌써 이루어진 셈이었다.
이젠 더 이상 빌로스 군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조용히 몸을 빼내어 다크엘프 일족이 머무르고 있다는 곳으로 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토록 바랐던 이야기를 들은 직후인데도 기쁘다기보단 착잡함이 밀려왔다. 이걸 바랐던 거 아니었나?
오래전에 뿔뿔이 찢어졌던 가족들, 친척들, 이웃들이 한자리에 모여 상봉하는 것. 그 하나만을 위해 온갖 오명을 다 뒤집어쓸 작정이었다.
그런데 일이 손도 안 대고 해결되었으니 기쁜 감정이 솟구쳐야 마땅한데, 자꾸만 가슴 한편이 바늘로 찌르는 듯 쿡쿡 쑤셔왔다.
스텔라는 무의식중에 제랄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곧 시선을 거두었다.
“사로잡았다던 다크엘프 포로를 만나 볼 수 있을까요?”
제랄드도 한마디 거들었다.
“제 부관도 금시초문이라 혼란스러울 테니 잠시만 안정을 되찾을 시간을 주지 않겠습니까?”
스텔라 본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현재 그녀의 표정은 보랏빛 피부가 연보랏빛으로 느껴질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레이더도 스텔라가 난감해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선 적의를 가라앉혔다.
“후우, 알겠습니다. 불쾌했다면 사과드리지요. 아시다시피 상황이 워낙에 처참해서 다들 날이 곤두서 있습니다.”
“네, 이해합니다. 말이 나온 김에 본제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전황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요새로 이동하면서 대화를 나누도록 하지요. 따라오십시오.”.
제랄드는 레이더와 함께 요새로 이동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레이더를 통해 직접 얘기를 들어 보니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은 제국군은 2만 명인 반면에 엘리나 군단의 머릿수는 10만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늘어나겠지요.”
제국군의 군세는 10만 대군도 쉬이 소집할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걸로 알고 있다.
한데 지금에 이르러선 엘리나 군단이 10만이 넘어가고, 제국군은 겨우 2만이 남아 있는 실정이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처음에는 제국군이 건재했고, 엘리나의 군단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니 초반에 제국군이 전력으로 그녀를 저지했다면 그나마 실낱같은 승산이라도 있었을 거다.
하나 그러지 못한 것엔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론, 오스카의 무리한 신전 재건축 사업과 면죄부 사업으로 나라 전체가 피폐해진 상황이었다는 점.
두 번째론, 오스카가 정체불명의 암살자에게 죽은 탓에 모든 성기사단의 신경이 범인 수색에 쏠려 있었다는 점.
세 번째론, 엘리나가 예언을 빙자하여 근거 없이 떠돌던 소문의 주인공과 똑같은 외견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
그로 인해 대부분 백성이 그녀에게 홀려 재빠른 신고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가미된 탓에 손쓸 틈도 없이 군세가 역전되고 만 것이다.
제랄드는 긴긴 설명을 잠자코 듣고만 있다가 레이더의 말이 끝나자마자 질문을 던졌다.
“질적인 부분은 어떻습니까?”
“다행히 절 포함한 육지의 3대 신기 보유자들은 전부 건재합니다. 문제는 4성급 실력자의 머릿수 차이지요. 저쪽은 4성급 마물만 50마리가 넘습니다. 이쪽이 보유한 4성급 성기사는 고작해야 3명이지요.”
제국 3성들은 모두 4성급 성기사이다.
제국 3성이 건재하고 4성급 성기사가 3명이라는 게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제국 3성 이외의 4성급 성기사는 전부 생포되거나 죽어서 적의 전력으로 흡수된 것이다.
머릿수 차이는 약 5배.
마스터 수준의 실력자 차이는 약 17배.
심지어 지금까지의 계산 중에 5성급 마물인 엘리나는 넣지도 않았다.
전황을 듣고 나니 레이더가 루크의 부재에 실망한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
전략으로 어떻게 뒤집어 볼 상황이 아니다. 뭘 어떻게든 해 보려면 최소한 엘리나라도 어떻게든 저지할 수 있는 억제기 역할을 할 사람이 절실했다.
제랄드로선 절망적이라 한들 물러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주군… 루크에게 엘리나를 상대하도록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써서라도 엘리나를 저지할 것이다. 설사 소모품 목록에 자신의 목숨이 포함된다 할지라도 말이다.
요새로 가던 중 별안간 제랄드가 타고 있던 말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히이잉!”
이어서 동요가 전염되기라도 하듯 주변에 있는 말들이 하나둘씩 주춤거렸다.
이유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 멀리 지평선 부근에 머물러 있는 요새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새 주변에는 심상치 않은 풍모의 괴물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레이더는 고삐를 강하게 잡아당기며 얼굴을 강하게 구겼다.
“큭! 저것들이 언제 요새 공격을…….”
언뜻 보기에 군단의 숫자는 2만 마리쯤 되어 보였다.
적의 숫자를 통해 엘리나 군단의 본대가 도착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군단의 본대는 각 도시와 마을을 휩쓸면서 차츰차츰 세력을 불리며 천천히 남하 중이고, 선발대만 따로 편성하여 요새 공략에 임하도록 지시한 것 같았다.
격렬한 감정 기복을 보이는 레이더와 달리 제랄드는 차분하게 적군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마물과 언데드들치곤 굉장히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군요. 데메그리 교 사제들이 저 틈에 섞여서 지시를 내리고 있는 겁니까?”
“그런 것보다 어서 지원을 해야 합니다!”
“질문에 대답부터 해 주십시오.”
“한시가 급한 상황이잖…….”
“대답하라지 않습니까!”
제랄드의 강한 일갈이 쩌렁쩌렁 울리면서 주변의 공기를 강하게 눌러 담았다.
당황하던 레이더는 한 대 얻어맞은 양 꺼벙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그러곤 뒤늦게 말을 더듬으며 제랄드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 그게…… 여태까지 전투 중에서 사제들은 본 적이 없고, 항상 리치들이 마물과 언데드들을 지휘해 왔습니다.”
“데메그리 교 사제들은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단 말입니까?”
“네, 그래서 리치를 죽이면 해당 리치가 조종하고 있는 언데드들이 본능에 따라 제멋대로 움직이면서 진영이 흐트러지지요.”
“음, 일단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병력을 좌군, 중앙군, 우군 세 덩이로 나누겠습니다. 좌군은 러스트 자작님이, 우군은 레이더 경이 맡아 주십시오. 두 분이 먼저 적의 측면을 공략하면 제가 중앙으로 파고들겠습니다.”
빌로스 군 1만에 레이더가 이끌고 있는 2천의 제국군까지 합쳐 총 1만2천의 병력을 세 덩이로 나누었다.
정확히 4천 명씩 3덩이로 나눈 후에는 러스트의 좌군, 레이더의 우군부터 군단을 향해 돌격했다.
제랄드는 제자리를 지키며 요새를 향해 떠나고 있는 좌군과 우군의 움직임을 살폈다.
‘모든 리치들이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있을 리는 없겠지. 분명 리치들 사이에서도 계급이 존재할 테니, 관건은 리치 중에 누가 선발대의 우두머리냐는 건데…….’
군단은 빌로스 군이 당도했음을 알아차리곤 공성전을 벌이던 병력 중 후방 부대에 해당하는 병력으로 수비진을 형성했다.
전방에선 공성전을 펼치고, 후방에선 수비진을 형성했기에 마물 군단의 진형이 흡사 챙이 늘어진 모자처럼 비정상적인 형태가 되었다.
좌우로 수비진을 만드느라 순간적으로 중앙 밀집지대의 밀도가 낮아졌다.
동시에 다른 리치들은 분주하게 자신이 맡은 언데드 부대를 이끌고서 움직이는데, 오직 리치 한 마리만이 유일하게 움직이지 않고 중앙 밀집지대의 한복판에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우두머리를 발견한 순간, 제랄드가 소리 높여 명령을 내렸다.
“중앙군, 돌격!”
두두두두!
말이 지면을 박차는 소리가 먼저 울렸고, 그 뒤에 화음을 넣듯 보병의 발소리가 섞여 들었다.
주변 풍경이 빠르게 양옆으로 스쳐 지나가며 급격히 격전지가 가깝게 다가왔다.
먼 길을 달려오느라 지친 말의 투레질 소리가 귓가에 파고드는가 싶더니, 이내 곧 심장 박동 소리에 잠겨 사라졌다.
잠시 후 제랄드가 이끄는 병력이 스켈레톤과 구울이 모여 있는 장소로 파고들었다.
스켈레톤들이 일사불란하게 뼈 방패를 나란히 배치하며 방벽을 세웠다.
제랄드는 개량형 마검에 마나를 부여하며 일시적으로 출력을 높였다.
“흐랴아아앗!”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 내며 검을 휘둘렀고, 개량형 마검의 궤적을 따라 뼈 방패가 갈라졌다.
그와 함께 제랄드가 타고 있던 말이 숙달된 조교처럼 익숙한 동작으로 갈라진 틈을 말발굽으로 찍어 내렸다.
콰지직! 콰직!
철로 만든 편자가 스켈레톤의 갈비뼈를 박살 내며 길을 열었다.
제랄드의 뒤를 따라 부하 기사들이 마나 오오라가 가미된 검을 휘둘렀다.
그들이 쥐고 있는 검, 그리고 방패는 모두 오션마린으로 만든 특제품이다. 기마대는 오션마린에 담긴 마나를 빌려 평소보다 훨씬 많은 양의 마나를 발하며 스켈레톤 부대를 찍어 눌렀다.
한순간 본래 능력을 뛰어넘는 출력을 낸 탓에 제랄드는 오른팔 안쪽에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껴야만 했다. 흡사 오른팔 안에 수없이 많은 유리 조각이 마구 굴러다니는 듯하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난 오크들과 같은 강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난 것도 아니다.
난 다른 마나마스터들처럼 뛰어난 마나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난 제국 3성 같은 뛰어난 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 무엇이 있는가?
근성.
그래, 근성 하나만 가지고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설사 내 수명을 연료 삼아야만 작동하는 장점이라 할지라도, 가진 게 그것밖에 없기에.
제랄드는 멈추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서걱!
앞을 가로막는 스켈레톤을 베어 내고, 구울을 베어 내고, 마물을 베어 내고…….
이윽고 우두머리로 추정되는 리치의 지척까지 당도했을 때.
요새의 성벽만을 바라보던 리치가 제랄드의 접근을 감지하고선 고개를 돌렸다.
놈은 빌로스 군이 자신이 있는 곳까지 도달할 줄은 몰랐는지 잠시 주춤거렸다. 그러나 제랄드의 팔을 보더니 턱뼈를 달그락거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크크크, 여기까지 도달한 것에 대해선 칭찬해 주마. 그런데 이걸 어쩌지? 네놈의 팔은 벌써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구나.”
건틀릿과 갑옷의 틈새로 드러난 제랄드의 팔은 피멍이라도 든 것처럼 시퍼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비단 자주 쓰는 오른팔만 변색된 게 아니다. 지금껏 계속 양팔을 번갈아 가며 사용했기에 왼쪽 팔도 변색되어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분에 넘치는 힘을 쓰는 제랄드를 조롱하듯 리치는 연신 비웃음을 흘리며 마기를 끌어 올렸다.
“죽은 자와 산 자의 싸움에 어중간한 것이 끼는 게 아니다. 차라리 한 번 죽고 아군으로 다시 돌아오거라.”
리치의 손에서 흑마법이 시전되었고, 검은색 기운이 연기처럼 뭉게뭉게 뻗어 나오며 제랄드를 덮치려 하였다.
제랄드는 일체 회피하려 들지 않고 곧장 연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연기에서 심상치 않은 냄새가 풍기는 것이 독 계열의 마법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마시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후웅!
최대치까지 출력을 끌어올려 검을 휘두르자 마나 블레이드가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가며 거친 후폭풍을 일으켰다.
후폭풍이 검은 연기를 밀어내며 길을 열었고, 제랄드가 연기 사이에 생긴 균열을 단숨에 주파하며 리치의 머리에 검을 내리찍었다.
푸우욱! 콰직!
개량형 마검이 두개골 정중앙을 꿰뚫으며 리치의 몸을 양단했다. 뿐만 아니라 리치의 갈비뼈 안쪽까지 파고든 마나 블레이드가 요동치며 남은 뼈마저도 뼛가루로 갈아버렸다.
고운 입자가 된 뼛가루가 더운 공기에 휘말려 흩날리는 가운데, 제랄드는 오시하듯 리치가 서 있던 자리를 내려다보며 입을 달싹였다.
“한계에 다다랐다니 착각이 심하군. 그딴 건 옛날 옛적에 넘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