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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재능으로 환생-180화 (180/200)

# 180

180화 사내로서 이름 석 자 남기고 떠나겠다 (1)

적의 선봉을 맡고 있는 우두머리 리치가 죽자 군단의 진영 큼직한 조각들로 나뉘었다.

상위 지휘관을 잃은 리치들이 저마다 독립적으로 판단을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2만 마리로 이루어진 한 덩이의 병력이었던 것이 우두머리 리치가 죽으면서 2천 마리로 이루어진 여러 덩이의 병력으로 나뉘었다.

제랄드의 움직임에서 힌트를 얻은 러스트나 레이더 역시 마찬가지로 리치 위주로 공략하며 쪼개진 덩어리를 더욱 잘게 쪼개었다.

마물과 언데드들이 통제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날뛰면서 더 이상 진영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대열이 흐트러졌다.

마물, 언데드, 인간이 한 데 섞여 아수라장이 된 전장 한복판에선 제랄드가 당당히 검을 치켜들며 호걸의 풍모를 발하였다.

“적의 지휘 체계는 무너졌다! 단숨에 몰아붙여 한 놈도 남겨두지 마라!”

범인이 한 시대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범인이라 할지라도 모든 걸 내던질 정도로 내달린다면, 한 시대까지는 아니라도 한 장소의 흐름 정도는 바꿀 수 있다.

제랄드가 바로 그를 증명하는 산증인이었다.

분위기가 바뀌면서 요새 안에 있던 제국군도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순식간에 앞뒤로 에워싸이게 된 마물군은 그물에 갇힌 참치 떼처럼 팔딱거리다가 전멸을 면치 못하였다.

* * *

신성제국에게 있어선 처음으로 승전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전투였다.

그 때문인지 제국민들은 요새 안으로 들어서는 빌로스 군을 격하게 환영하였다.

제국 남부 요새로 도망쳐 오는 동안에도 보급품만큼은 풍족하게 챙겨 왔는지 창고에 그득하게 쌓여 있는 고기와 술을 풀어 기념할 만한 첫 승리를 자축했다.

그 날 저녁 요새 안은 고기 굽는 냄새로 가득 찼고, 이가 빠진 스프 그릇은 술잔으로 변모하여 마를 새 없이 오갔다.

요새 안이 축제 분위기인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름 아닌 스텔라였다.

그녀는 막 요새 안에 있는 임시 포로 수용소에 들렀다가 나온 참이었다.

면회한 다크엘프 포로의 이름은 샴.

스텔라와는 초면이었으나 그 또한 동족인 스텔라를 매우 반갑게 여겼다.

그러나 샴의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이 늙은 다크엘프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합병증을 앓고 있었고, 전시에 잡혀 있는 포로들이 으레 그렇듯 적합한 조치를 받지 못하여 제대로 걷지조차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스텔라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반면 샴은 스텔라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주었다.

-데메그리 교는 이미 무너졌네. 엘리나가 그들을 쓸어버렸지. 그래도 오해는 말게. 우리가 엘리나에게 붙은 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적이 누구인지 알아냈기 때문일세. 자세한 이야기는 주둔지에 가서 족장에게 듣게나. 내 다크엘프 부대의 주둔지를 알려 주겠네.

데메그리 교가 괴멸되었다는 말에 스텔라는 허탈한 기분마저 들었다.

지난 몇 년간 사명감과 사랑 사이에서 그녀가 얼마나 고민을 했었던가.

다크엘프는 이미 한데 뭉쳤고, 데메그리 교와의 밀약은 백지화된 지 오래였다니. 뿐만 아니라 다크엘프 일족은 딱히 인간 박멸 사상에 동의하고 있는 것도 아니란다.

스텔라가 허탈감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모든 고민이 해결된 대신 새로운 고민을 떠안게 되었다.

샴이 언급한 ‘진정한 적’이 누구인지, 그리고 다크엘프 일족은 무엇을 위해 엘리나를 따르고 있는 건지 갖가지 의문이 솟아났다.

‘그이한테 이 문제를 상담하는 게 좋을까?’

마음 놓고 사랑해도 된다는 걸 알자마자 ‘그이’라는 돈독한 호칭을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품는 스텔라였다.

원칙상으론 제랄드에게 상담하는 게 맞긴 하다.

하지만 지금 제랄드는 자고 있다.

전투 후에 그의 팔이 얼마만큼 악화되었는지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기에 더더욱 깨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때문에 스텔라는 홀로 남부 요새를 떠나 다크엘프 주둔지에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주둔지는 남부 요새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얼마 안 되는 거리에 있는 곳이니 금방 다녀올 수 있을 터.

그녀는 금방 갔다 오면 된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남부 요새를 떠났다.

* * *

말을 타고 달린 지 몇 시간 되지 않아 스텔라는 어느 이름 모를 산에 자리 잡고 있는 다크엘프 주둔지에 당도했다.

정말로 다크엘프 일족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전 대륙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던 자들이 전부 말이다!

개중에는 소식이 끊겨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스텔라의 가족이나 친인척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잠깐 해후의 시간을 가진 스텔라는 족장과 대화를 나누었다.

듣자 하니 샴이 포로로 붙잡힌 것은 스텔라에게 연락을 취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한다.

“포로 역할은 샴이 자청한 일일세. 빌로스 군의 삼엄한 경비를 뚫을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택한 방법이었지. 자네라면 포로 면회를 신청할 거라 여겼다네.”

“제가 빌로스 왕국에 남아 있을 때 연락을 주시지 그랬어요.”

“그랬다면 자네는 무조건 전쟁에 참가했을 테지. 아직 자네가 전쟁에 참가할지 안 할지 모르는 마당에 억지로 전쟁에 참가할 명분을 만들어 주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네.”

“그러면 샴은…….”

“병 때문에 삶이 얼마 남지 않았던 친구일세. 남은 목숨을 의미 있게 쓰고 싶다는 요청을 어찌 거절할 수 있겠나. 정말로 샴이 걱정된다면 쓸데없는 생각은 말게.”

혹여나 스텔라가 측은지심에 샴을 탈출시켜 주려다가 제국군에 걸려 일을 그르칠까 싶어 미리 신신당부하는 것이었다.

스텔라는 고개를 연거푸 흔들었다.

“명심할게요. 그런데 샴이 ‘진정한 적’이라는 단어를 거듭 사용하던데 대체 무슨 의미죠?”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다크엘프 일족은 온 대륙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용병이나 보물 사냥으로 연명해 왔지. 1년 전, 유적 탐사 의뢰를 받고서 어느 외딴 섬에 있는 유적에 들어갔다네. 거기서 한 남자의 일지를 발견했네.”

족장이 발견한 일지는 무려 ‘카라스코의 일지’였다.

카라스코의 일지에 따르면 그는 아직까지 건재하며 여전히 인간 박멸을 궁극적인 목표 삼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고 한다.

족장이 건넨 빛바랜 가죽 수첩이 그 증거였다.

수첩에 적힌 깃펜 글씨를 찬찬히 불빛에 비쳐 보던 스텔라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엘리나도 이 사실을 알고 있나요?”

“물론일세. 그분께서 데메그리 교의 대신전을 막 무너뜨린 시점에 찾아가 이 수첩을 보여 드렸었지. 실제로 대신전 지하실에서 카라스코를 한 번 죽인 적도 있다고 하시더군.”

“카라스코가 죽었다면 모든 게 해결된 거 아닌가요?”

“내가 왜 ‘한 번’이라는, 셈을 세는 표현을 썼겠는가? 일지에 따르면 카라스코는 천공의 3대 신기를 모두 가지고 있네. 그중에는 9개의 목숨을 보장해 준다는 ‘하늘 고양이의 보주’도 포함되어 있지.”

9개의 구슬이 꿰어져 있는 목걸이인 하늘 고양이의 보주.

엘리나가 1번 죽였다 한들 아직 카라스코에겐 8개의 목숨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엘리나와 다크엘프 일족의 조우가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데메그리 교 대신전 지하실에서 카라스코를 완전히 말살시킬 수 있었을 거다.

즉, 다크엘프는 카라스코의 위험성을 깨닫고 그를 제거할 자가 엘리나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그녀에게 협력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크엘프와 엘리나가 손을 잡게 된 경위까진 이해가 간다.

그러나 스텔라로선 아무리 좋게 봐줘도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 한 가지 있었다.

“엘리나가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게다가 기억까지 되찾았다면 어째서 대학살을 벌인 거죠? 데메그리 교 대신전까지만 무너뜨리고 왕국에 복귀했으면 모든 게 해결됐을 거예요.”

엘리나가 제아무리 마물이라 할지라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루크라면 데메그리 교 대신전을 무너뜨리고 복귀한 자를 박대하지 않았을 터.

엘리나를 인간으로 되돌리기 위한 방법을 찾아보려고 사방팔방으로 손을 썼을 거다.

하나 그녀는 대학살을 자행했고, 신성제국뿐만 아니라 온 대륙을 위협하고 있다.

다크엘프 족장은 스텔라가 이해할 수 있도록 천천히 단을 나누어 설명했다.

“자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당연한 수순일세.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테지. 하지만 엘리나 님께는 달리 선택지가 없었네. 지금 카라스코가 어디 있는지 아나?”

“아뇨.”

“당연히 모르지. 우리도 모른다네. 카라스코가 살아 있는 이상, 우린 항상 잠재적인 위험을 떠안고 살아야 하네. 당장 엘리나 님이 루크 국왕 전하께 돌아간다고 칩세. 둘이 함께 있는 동안엔 카라스코도 함부로 나서지 못하겠지.”

“네.”

“하지만 시간이 흘러서 엘리나 님이 돌아가신다면? 루크 국왕 전하께서 돌아가신다면? 그때 가서 카라스코가 나타나면 누가 막을 건가?”

족장의 말을 통해 스텔라는 엘리나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대학살을 자행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제국을 쑥대밭으로 만든 건 카라스코를 끌어내기 위해서란 건가요?”

“그렇지. 남부 요새에 제국 3성이 모두 모여 있을 걸세. 카라스코는 천공의 3대 신기 외에도 육지의 3대 신기를 모두 손에 넣길 바라고 있지. 놈이라면 제국 3성이 자신의 건축물 안에 모여 있는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을 걸세.”

“그런 거라면 더더욱 루크 국왕 전하께…….”

“말했다면? 말했다면 어떻게 됐을 것 같나? 엘리나 님 대신 루크 국왕 전하가 대신 대학살을 자행했겠지. 이 방법 외엔 카라스코를 속일 방법이 없으니까. 엘리나 님이 그걸 허락할 것 같은가? 루크 국왕 전하께 그 역할을 떠맡길 바엔 자신이 역사상 최악의 악녀로 불리길 각오하셨다네. 그분은 그런 분일세.”

스텔라는 여전히 납득이 안 되어 다시금 의문을 표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족장의 말이 그녀의 모든 의문을 잠식시켰다.

“그 증거로 데메그리 교 대신전을 무너뜨린 이후부터 인간의 살점을 단 한 번도 입에 대지 않으셨네.”

마물이 느끼는 공복감은 인간의 수십 배에 달한다고 한다.

대학살을 펼친 후에 쌓인 시체 더미는 인간의 시점으로 보면 산해진미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도 한입도 대지 않은 것에서 그녀가 루크를 위해 희생하려고 얼마나 거듭 각오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마물이 되어서도, 한순간 절망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그녀로서 남아 있었다.

이 몇 분 안 되는 대화를 통해 루크의 사각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밝혀졌다.

잠깐 침묵을 유지하던 스텔라는 문득 자신이 매우 중대한 사실을 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 잠깐만요!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엘리나 님이 단 한 번도…….”

“아뇨! 그 전에요!”

“카라스코에게 들키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제국 3성을 카라스코의 건축물 안에 몰아넣었다고 했네. 여기는 안전지대이니 염려 놓게나.”

“저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그 사람이… 그이가 아직 남아 있다고요!”

스텔라는 제랄드를 떠올리며 다급히 말에 올라탔다.

어서 이 사실을 제랄드에게 알려야 한다.

이대로 있다간 제랄드까지 작전에 휘말려 명을 달리하게 되잖은가!

말을 몰고 남부 요새로 돌아가려던 찰나.

다크엘프 주둔지 주변에서 다수의 인기척이 감돌았다.

인기척을 형상화시킨 듯 사방의 수풀이 들썩이는가 싶더니 검게 칠한 갑옷을 입은 제국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더 경의 판단이 옳았어. 피부가 짙은 것들은 믿을 만한 게 못 되는군.”

레이더가 끝까지 스텔라를 의심하여, 부하 기사를 시켜 미행하게 지시한 모양이었다.

배신자를 보듯 경멸하는 시선이 꽂힌다.

아무래도 스텔라와 족장 사이에 오간 얘기를 듣지 못한 듯하다. 미행하다가 스텔라를 놓쳐서 방금 도착했거나 주둔지와 매복 장소 간의 거리가 멀어 목소리가 닿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이리라.

구구절절 설명할 시간은 없다.

포로 형태라도 좋으니 남부 요새로 복귀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스텔라는 두 손을 위로 들며 싸울 의사 없음을 밝혔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에요! 전 결코 배신하지 않았고, 여기 있는 다크엘프들도 적이 아녜요! 급히 제랄드 경에게 알려야 할 사실이 있으니 같이 복귀를…….”

피잉! 투퍽!

수풀 사이로 화살 한 대가 날아와 스텔라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동시에 스텔라의 몸이 크게 휘청거리며 낙마했다.

성기사들은 스텔라의 이야기따윈 들을 가치도 없다는 양 귓등으로 흘려 넘겼고, 무자비하게 공격을 강행했다.

“피부가 짙은 것들을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놈들이 우리 백성들에게 했던 그대로 돌려 주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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