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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재능으로 환생-181화 (181/200)

# 181

181화 사내로서 이름 석 자 남기고 떠나겠다 (2)

제랄드는 문득 눈을 번쩍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은 아직 어두웠다. 끄트머리만 남은 양초의 불빛이 어렴풋하게 괘종시계의 시침과 분침을 가리키는 게 보였다. 두 개의 침은 정확하게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자정인가.

자리끼를 한 모금 마시고 나니 정신이 말끔해졌다.

이상하게도 침대 옆자리가 허전하게 느껴졌다.

전시에는 기강을 잡기 위해 타의 모범을 보이고자 스텔라와 각방을 쓰고 있었다. 그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허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대개 제랄드의 감은 맞는 편보다 틀린 적이 더 많았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흘려 넘기기 어려웠다.

제랄드는 군의관이 주고 간 진통제를 한 움큼 입에 넣고선 다시 한번 주전자에 담긴 자리끼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 후에 복도로 나가 옆방에서 자고 있을 예정인 스텔라를 찾아갔다.

똑똑똑.

“스텔라, 나야.”

불렀는데도 대답이 없다.

자고 있나?

방 안에 들어가고자 문고리를 덥석 쥔 순간, 복도 모퉁이 너머에서 일련의 무리가 나타났다.

무리의 선두에는 레이더가 서 있었으며, 레이더의 뒤에서 완전무장을 한 성기사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그를 뒤따르고 있었다.

레이더는 제랄드의 코앞까지 다가와선 대뜸 용건부터 꺼냈다.

“댁의 부관, 스텔라가 밀정이라는 게 밝혀졌습니다. 그러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의외로 제랄드의 반응은 담담했다.

“그녀와 얘기를 나눠 봐야겠습니다. 어디 있습니까?”

“그 반응은 이미 알고 있으셨던 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확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가 밀정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스텔라가 드래프트 영지의 기사가 되고 싶다며 찾아온 시기나 그녀의 과거가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처럼 너무 깨끗했다는 것, 그리고 충성 일변도에 남편으로선 0점짜리인 자신을 사랑해 줬다는 것까지.

하지만 여태껏 한 번도 밀정다운 행동을 하지 않았기에 기회를 주고자 했다.

적어도 그녀가 제랄드에게 먼저 고백할 당시 그녀가 보였던 감정은 진심이었으니까.

충분히 바뀔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기에 잠자코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제랄드는 스텔라를 만나 진위를 판명하고 싶었다. 그런 까닭에 아까보다 감정이 실린 목소리로 한 번 더 그녀의 위치를 물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제 부하가 다크엘프 부대와 접촉 중이던 스텔라를 발견했습니다. 그 즉시 공격명령을 이행했다는군요. 지금쯤이면 땅 밑에 묻혀 있겠지요.”

“레이더 경, 말에 가시가 박혀 있는 것 같습니다만.”

“가시? 당연하다마다요. 요새에 오기 전에 뭐라고 했습니까? 제가 스텔라가 밀정일 가능성을 제시했잖습니까. 근데 제랄드 경은 아니라고 잡아떼셨지요. 밀정 하나 때문에 남아 있는 제국군이 전멸한 후에야 사과할 겁니까? 네? 전부 죽은 후에 사과할 거냔 말입니다!”

이번에는 레이더가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격양된 목소리로 제랄드를 다그쳤다.

그의 심정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제국군도 그만큼 절박한 심정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감정 싸움으로 넘어가선 죽도 밥도 안 된다.

이럴 때일수록 차분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배웠다.

다른 누구도 아닌 존경하는 주군이 그리 말했었잖은가.

제랄드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난 후에야 가까스로 냉정을 되찾았다.

“알겠습니다. 빌로스 군은 공식적으로 스텔라를 밀정으로 인정하고 그녀를 처벌토록 하지요. 당장 미행에 나선 부대에 공격중지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처벌을 빌미로 두둔할 속셈이십니까?”

“빌로스의 기사이니 빌로스의 법으로 처리하겠다고 말한 겁니다.”

공식적으로 스텔라가 밀정임을 선언했으니 여기서 빌로스의 법대로 처벌하지 않으면 빌로스 왕가의 위신에 흠집이 난다. 그건 곧 루크의 명성에 흠집을 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제랄드의 충심이라면 온 대륙에 소문이 나 있으니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레이더는 눈매를 가늘게 좁히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미행 부대에 공격중지 명령을 내려 두도록 하지요. 대신 지휘권은 저희 쪽에 일임해 주셔야겠습니다. 밀정을 곁에 두고도 모른 척하는 지휘관의 명령에 따르고 싶진 않으니까요.”

제랄드는 마음대로 하라는 말을 남기며 막사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그러곤 말에 올라 소수의 병력만 이끌고서 요새 바깥으로 나왔다.

막 요새의 관문을 통과하여 빠져나왔는데, 뒤에서 러스트가 급하게 따라 나와 제랄드의 옆에 따라붙었다.

“소식 들었네. 스텔라가 밀정인 것이 확정됐다는 게 사실인가?”

“아직 모릅니다. 정말 밀정이라면 여태까지 신들린 연기를 펼쳤다는 게 되겠지요. 그랬던 사람이 이제 와서 쉽게 들킬만한 행동을 하는 건 앞뒤가 안 맞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유를 알 수 없으니 속단을 삼가자는 거군. 바람직한 판단일세.”

“전 현장으로 가 볼 테니 러스트 자작님께선 병사들을 통제해 주십시오.”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이리 급하게 달려 나온 거라네. 자네 혹시 남부 요새가 카라스코의…….”

투퍼어어어엉!

남부 요새에서 얼마간 떨어졌을 무렵, 별안간 제랄드와 러스트의 등 뒤에서 강한 충격음이 발생했다.

적의 공격?

그렇다고 하기엔 육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요새에서 충격파가 뿜어져 나와 주변 일대를 강타한 것 같다.

충격파의 여파는 요새에서 한참 떨어져 있던 제랄드와 러스트에게도 들이닥쳤다.

제랄드와 러스트는 흡사 보이지 않는 망치에 얻어맞은 양 강한 충격을 입었다.

“커헉!”

“큭!”

말 위에 올라타 있던 몸이 허공에 붕 뜨며 바닥에 떨어졌다. 안 그래도 충격파 때문에 상당한 데미지를 입었는데, 낙마에 의한 충격까지 더해지며 숨이 턱하고 막혔다.

그나마 급하게 나오느라 목갑 보호대만 걸치고 나왔기에 망정이지, 풀 플레이트 아머라도 걸치고 나왔다면 재기 불능 상태에 빠졌을 거다.

제랄드와 러스트, 그리고 부하 기사들은 평소에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분인지 크게 다치진 않았다.

문제는 기마였다. 충격파에 휩쓸려 강제로 한 바퀴 구른 탓에 말들이 다리를 크게 다치고 말았다.

러스트는 옆으로 누운 채로 끙끙 앓고 있는 기마를 한 마리씩 살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을 타고 이동하는 건 무리일 것 같네. 거기다 속에서 마신 술이 바깥으로 내보내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군.”

“별로 농담할 기분 아닙니다.”

“우웨에에엑! 농담이라면 말을 꺼내지도… 우웩!”

뱃멀미라도 한바탕 겪은 것처럼 속에 있는 것을 게워 내는 러스트였다.

제랄드도 러스트의 등을 두드리며 게워 내는 것을 도왔다.

위치상 제랄드는 러스트의 앞에 있었다. 러스트의 듬직한 덩치 덕에 뒤에서 날아든 충격파로부터 최소한의 피해만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오크의 터프함이 제랄드를 살린 격이었다.

러스트의 호흡이 진정될 즈음 제랄드는 아까 러스트가 하려던 말의 뒷말을 추측하고선 입에 담았다.

“남부 요새가 카라스코의 건축물이라고 말하려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설마 지금 작동시킬 줄은 몰랐지만 말일세.”

“이상하군요. 제국군 측에서 제공한 정보에는 그런 말이 없었잖습니까?”

“이번 전쟁으로 갑자기 허용량을 넘는 병력이 요새 안에 머무르게 됐잖은가. 막사를 증축하는 과정에서 서류의 상당수가 소실되었다는군. 제국 3성도 모르고 있었던 듯하네.”

“오늘 전투로 카라스코의 건축물이라는 게 밝혀졌나 보군요.”

“조급함이 부른 실수라 할 수 있을 테지. 그나저나 타이밍 한 번 최악이군. 이럴 때 건물형 마물이 능력을 발휘할 줄이야.”

둘 다 충격 때문에 혼란스러운 나머지 대화를 통해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했다.

쏟아진 퍼즐을 주워 담듯 하나하나 정보를 되짚던 중 제랄드와 러스트가 동시에 눈을 부릅떴다.

“러스트 자작님, 카라스코의 건축물은 카라스코의 명령에만 반응합니다.”

“나도 방금 떠올랐네. 그렇다는 건 설마!”

“카라스코가 이 근처에 있습니다!”

제랄드와 러스트는 얼른 바닥에 떨어뜨린 무기를 쥐었다.

제국군과 제국 3성, 그리고 제랄드가 데리고 빌로스 군의 생사는 따로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열려 있는 관문을 통해 대량의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었기에.

건물형 마물의 위험성은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다만, 실제로 목격하니 전신에 소름이 돋는다.

혹시라도 대도시가 자리 잡고 있는 지역에서 능력이 발동한다면 지금 목격한 광경보다 수십 배는 더한 참사가 발생했을 거다.

카라스코로 추정되는 자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중 검은 로브를 두른 누군가가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옅은 달빛에 로브 안쪽이 얼핏 비쳤는데, 로브 안쪽에는 뼈만 앙상히 남아 있었다.

제랄드는 지금 목격한 리치가 카라스코임을 직감하며 러스트에게 말을 남겼다.

“지금부터 세 갈래로 나뉘도록 하죠. 전 요새로 가 보겠습니다. 러스트 자작님은 일부 병력만 데리고 스텔라가 있는 곳으로 가 보십시오. 그리고 나머지 병력은 즉시 빌로스 왕국으로 가서 이 사실을 알리도록.”

“기다리게. 그런 거라면 자네가 스텔라에게 가는 게 이치에 맞지 않겠나? 왜냐하면 스텔라는 자네의…….”

러스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 전에 제랄드가 숙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기에.

카라스코의 위험성을 감안하면 지금 있는 인원 전원을 데리고 가야 함이 옳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로 간의 연계를 기대할 수 있을 때나 해당되는 일이다.

“자네 설마 마검의 제어 장치를 제거할 생각인가?”

개량형 마검에 부착되어 있는 제어 장치를 제거하면 원래 마검의 효과를 온전히 발동시킬 수 있다.

그 말은 즉, 버서커가 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가진 능력을 몇 배나 증폭시키는 대신 이성도 자아도 없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전사 버서커.

제랄드는 대답 대신 지면을 박차며 요새를 향해 뛰었다.

말릴 틈도 없이 떠나는 제랄드를 두고, 부하 기사들은 다급하게 러스트를 쳐다보았다.

“말려야 합니다! 분명…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러스트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눈을 깊게 감았다.

여기서 카라스코를 놓치면 다시는 놈과 조우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더불어 스텔라 또한 지키고 싶은 게 그의 심정일 터. 충의와 사랑을 모두 충족하려면 결국 희생은 불가피하다.

제랄드는 양쪽 모두 지킬 수 있는 희생양으로서 자기 자신을 택했다.

가장 가슴이 찢어지는 건 제랄드 본인일 거다.

그의 심정을 어찌 외면하랴.

러스트는 도끼를 불끈 쥐고선 제랄드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지휘관의 지시대로 이행한다. 일부는 날 따라오고, 일부는 본국으로 가거라!”

* * *

요새 안에 도착한 제랄드는 무의식중에 눈살을 찌푸렸다.

숱한 전장을 겪어 봤지만 이토록 진한 혈향을 맡는 것은 처음이다.

흡사 핏물을 한껏 머금은 천 조각으로 코를 틀어막은 듯한 느낌이었다.

수만 명의 시체 더미가 요새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 위에선 웬 리치 한 마리가 시체 사이를 뒤지고 있었다.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하다.

남부 요새의 시체 더미 속에서 찾을 만한 물건이라곤 한정되어 있다.

‘육지의 3대 신기! 그걸 노리고서 건물형 마물의 능력을 발동시킨 건가!’

제랄드는 결의를 다지고선 리치를 향해 개량형 마검을 겨누었다.

“확인차 물어보마. 네놈이 카라스코인가?”

우회 없는 직설적인 질문에 리치가 로브 후드를 젖히며 제랄드를 오시했다.

“이미 확신하고서 던진 질문에 굳이 대답이 필요할까?”

“인정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어디 보자. 그렇군, 누군가 했더니 인맥으로 빌로스의 고위직에 오른 마나유저 중급의 기사로구나.”

“그따위로 해석하는 소인배들이 더러 있긴 했지.”

“애송아, 겨우 부지한 목숨을 기어코 버려야 직성이 풀리겠느냐. 하긴, 어차피 인간은 모두 쓸어버릴 작정이었으니 지금 죽든 나중에 죽던 순서 차이이긴 하군.”

카라스코의 손뼈가 로브 안쪽으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푸른 비늘로 이루어진 검을 뽑아냈다.

리치가 검을 사용한다?

놈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둘 중 하나이리라.

제랄드를 우습게 보고 있거나, 마법만큼 검의 경지 또한 뛰어나거나.

어느 쪽이든 달갑진 않다.

카라스코의 행동에 맞서 제랄드 또한 검 손잡이 윗부분에 손가락을 대었다. 검 손잡이 윗부분에 박힌 제어석을 제거하면 개량형 마검이 마검 본연의 성능을 십분 발휘하게 된다.

버서커가 되면 카라스코에게 이기든 지든 사망하게 될 터.

어차피 엘리나와 조우하면 쓰려던 방법이다.

대상만 달라졌을 뿐 결과는 매한가지다.

아쉬운 게 있다면 루크에게 인사를 남기지 못한 것, 그리고 스텔라와 좀 더 터놓고 대화를 나누지 못한 것이 자꾸만 가슴속에 맴돈다.

죄송합니다, 주군.

그리고 감사합니다.

주군이 아니었다면 전 그저 소리 없이 켜졌다가, 소리 없이 꺼지는 평범한 촛불에 불과한 삶을 살았을 테지요.

주군 덕에 당당히 사내로서 가슴 펴고 살아올 수 있었으니 갈 때도 사내답게 이름 석 자 남기고 떠나겠습니다.

딸깍!

다짐을 마친 제랄드가 엄지로 제어석을 밀어젖혔다.

개량형 마검이 폭주하며 제랄드를 숙주 삼아 회로의 융합을 이루어졌다.

제랄드의 몸은 금세 검게 물들었으며, 연이은 혹사로인해 망가졌던 몸은 일시적으로 강화되며 싸울 수 있는 근간을 갖추었다.

이윽고 버서커화를 마친 제랄드가 자아를 잃고서 포효나 다름없는 기합을 토해 냈다.

“우오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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