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182화 사내로서 이름 석 자 남기고 떠나겠다 (3)
제랄드의 마나 회로가 마기 회로에 잠식당하며 모든 마나가 마기로 오염되었다.
그의 이성은 수면 아래로 침식된 지 오래이며, 오로지 근처에 있는 모든 것을 베어 낸다는 본능만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우오오오!”
제랄드의 몸이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이며 산처럼 쌓인 시체 더미 위를 향해 쇄도했다.
시체를 디딤대 삼아 뛰어오를 때마다 각반 안쪽에 자리 잡은 허벅지 근육이 비명을 질러 댔다.
두둑! 두두둑!
한계를 뛰어넘는 신체 능력을 발하는 대가로 육체가 조금씩 붕괴되고 있었다.
시체 더미 위에 있던 카라스코는 같잖다는 듯 웃었다.
“훗, 생명을 담보로 적의 목숨을 취한다라. 범인이 생각할 법한 발상이군.”
카라스코의 손에서 마기가 뽑혀 나오며 허공에 배열되었다.
배열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배열의 시작과 완료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마기 배열을 마치자마자 카라스코의 입이 달싹였다.
“커즌 레이지.”
흑마법 고위 마법인 커즌 레이지가 발동하면서 제랄드의 주변에 검은 구체 10개가 생성되었다.
구체에선 검은색의 쇠사슬이 뻗어 나왔고, 10개의 쇠사슬이 사방팔방에서 제랄드의 몸을 옥죄었다.
커즌 레이지로 소환된 쇠사슬의 경우 각 쇠사슬이 각기 다른 저주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이 의욕 상실, 부정적 감정 생성, 방향 감각 상실 등등 감정이나 감각에 영향을 미치는 효과이기에 버서커에겐 그다지 유효한 마법이라 보긴 힘들었다.
다만 맹독 주입이나 마나 제한 저주 등의 소수 효과는 유효하게 먹히는 데다 쇠사슬 자체가 거인도 꼼짝 못할 만큼 강한 구속력을 가지고 있기에 어지간해선 벗어나기 힘들다.
제랄드는 쇠사슬에 묶인 채로 발광하며 강하게 몸부림쳤다.
“크아아아! 크아아아!”
지금의 제랄드를 두고 누가 인간이라고 생각할까.
몸부림치는 모양새가 흡사 사슬에 묶인 맹수를 연상케 했다.
생명을 갉아먹으며 발하는 힘은 단순 근력만으로 5서클급 구속마법을 서서히 비틀었다.
끼기긱! 끼기기긱! 와드드득!
급기야 쇠사슬이 끊어지며 제랄드가 재차 카라스코를 향해 쇄도했다.
산산조각나며 흩날리는 쇳조각들을 두고 처음으로 카라스코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지워졌다.
카라스코가 잠깐 당황한 그 찰나의 순간, 지면에 닿을 듯 낮은 자세로 달리던 제랄드가 검을 뻗었다.
채앵!
마기 블레이드가 일렁이는 검이 카라스코의 코앞에서 멈춰 섰다.
간발의 차로 실드가 펼쳐지며 검을 막아 낸 것이다.
실드 안에서 카라스코가 코앞에서 일렁이고 있는 마기 블레이드를 바라보았다. 겉보기엔 덤덤한 것처럼 보이나 그의 발걸음이 처음 위치보다 반 발자국 뒤로 옮겨져 있었다.
저도 모르게 기세에 눌려 뒤로 물러난 것이다.
카라스코는 범인이라 평가받는 일개 평범한 기사에게 주눅 든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내가 뒷걸음질을 쳐? 그것도 별 볼 일 없는 기사를 상대로? 내가? 이 내가?
인간 박멸이라는 숭고한 사명을 지닌 자신이 인간이길 포기한 자에게 주눅 든 것이 수치스러웠다. 그로 인해 자연스레 그의 마기가 거칠게 일렁였다.
“오냐, 네놈의 성의를 봐서 손수 갈기갈기 찢어 주마.”
카라스코가 로브 안쪽에서 대낫을 꺼냈다. 대낫의 크기는 카라스코의 몸집보다도 컸기에 로드 안쪽에 보관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였다.
이는 모두 카라스코가 두르고 있는 천공의 3대 신기 중 하나 ‘달의 커튼’의 효과 덕분이었다.
로브 안쪽이 아공간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제 몸집보다 큰 물건도 보관할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그가 쥐고 있는 낫 또한 천공의 3대 신기였다. ‘천공 섬멸자’라 불리는 대낫은 해왕검과 동일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카라스코는 대낫을 한껏 당기며 휘두를 자세를 취하였다.
이윽고 대낫이 휘둘러지며 제랄드의 목을 베어 내려던 찰나.
갑자기 대낫과 제랄드 사이에 제삼자가 끼어들었다.
파사삭!
제삼자는 검은 오오라를 두르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오오라에 닿은 대낫이 달군 팬에 닿은 물방울처럼 삽시간에 증발했다.
소멸된 대낫의 가루가 흩날리는 가운데, 검은색 깃털 다수가 팔랑거리며 전장에 내려앉았다.
카라스코는 갑자기 끼어든 여인을 강하게 노려보았다.
“엘리나.”
“저번에는 신세를 졌어요, 카라스코. 기억을 되찾게 해 줬는데도 감사 인사를 못 드려서 말이죠.”
나타난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엘리나였다.
한때 카라스코의 부추김에 휘말려 인간박멸 계획을 대신 이행할 뻔했다. 그러나 다크엘프 일족의 관여, 그리고 여전히 그녀에게 남아 있는 루크란 존재가 가까스로 그녀의 폭주를 막았다.
“우오오오!”
인사 아닌 인사가 오가던 중 제랄드가 피아식별을 하지 못하고 엘리나를 향해 검끝을 돌렸다.
검게 물든 마나 블레이드가 엘리나를 베어 내려다가 소멸의 기운에 닿는 족족 증발했다.
엘리나는 왼쪽 발만 소멸의 기운을 거두고선 뇌쇄적인 미소를 띠었다.
“제랄드, 오랜만이에요. 반가운 건 알겠는데 잠시 물러나 주겠어요?”
투퍽!
엘리나의 발이 제랄드의 가슴팍을 걷어찼고, 일순 제랄드의 몸이 허공에 붕 뜨면서 시체 더미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제랄드를 전장에서 이탈시킨 엘리나가 다시 카라스코를 쳐다보았다.
“어디까지 얘기했었죠? 아~ 보답으로 다시 머리를 날려 버려주겠다고 말하려다 말았었죠.”
“이제야 맥락이 보이는군. 전부 날 여기로 끌어들이기 위한 포석이었던 거였어. 언제부터 내 계획을 알아차렸지?”
“보라색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죠.”
“쳇, 다크엘프인가.”
“사양 말고 보답하게 해 주시지 그래요?”
엘리나의 손이 카라스코의 실드에 닿았다. 손에 둘러진 소멸의 기운이 실드를 증발시켰고, 거침없이 카라스코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이전에는 위장책을 펼치느라 일부러 당해 주었으나 모든 내막이 드러난 이상 더는 하늘 고양이의 보주를 낭비할 순 없었다.
카라스코는 상체를 뒤로 젖히며 이동마법을 시전했다.
“블링크.”
카라스코의 몸이 연기처럼 사라지더니 약간 떨어진 곳에서 나타났다.
더불어 이번에는 카라스코 측에서 공격에 나섰다.
“카오스 하운드.”
7써클 흑마법인 카오스 하운드가 시전되면서 엘리나가 서 있는 장소의 밑바닥에 검은 원이 생성되었다.
검은 원 안에서 그림자로 이루어진 거대한 입이 솟구치더니, 흡사 고래가 물고기 떼를 삼키듯 엘리나를 집어삼켰다.
카오스 하운드에 삼켜진 자는 순식간에 용해되어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이번 경우 사라지는 쪽은 카오스 하운드였다.
카오스 하운드의 안쪽에서 검은 오오라가 구멍 뚫린 물풍선의 물줄기처럼 줄기줄기 새어 나오더니, 이내 곧 흔적도 없이 소멸되었다.
소멸의 기운 앞에선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으며 그 어떤 방어도 통하지 않는다.
세상을 멸하고자 획책했던 마물 계획이 오히려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는 셈이다.
카라스코로선 심사가 뒤틀릴 수밖에 없었다.
“큭, 발밑을 노린 공격이었건만.”
엘리나의 유일한 약점은 발밑이었다.
그녀가 지면을 딛기 위해선 발밑만큼은 소멸의 기운을 두르지 않아야 한다. 발밑까지도 소멸의 기운을 둘러 버리면 소멸의 기운이 지면을 소멸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들이 아는 사실을 그녀 본인이라고 모르겠는가.
이미 그녀의 발밑에는 소멸의 기운이 둘러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지면에 서지 못하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날개를 퍼덕이며 공중에 머물렀다.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카라스코는 재빨리 주변을 경계했다. 엘리나가 여기 있다는 건 그녀가 이끄는 마물 군단이 매복해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복의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카라스코는 매복이 없는 것에서 엘리나의 근황을 단숨에 간파했다.
“이번 작전은 쟈칼이나 마물 군단에는 비밀로 해 온 모양이군.”
쟈칼이나 마물 군단은 아직도 엘리나가 인간 박멸을 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를 따르고 있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만약에 엘리나가 뜻을 거두고 루크를 내조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면 지휘 체계가 순식간에 붕괴될 게 틀림없었다.
엘리나도 그 점을 염려하여 모든 내막을 알고 있는 다크엘프만 이번 작전에 가담시킨 것이다.
그런 까닭에 카라스코도 함정인 줄 모르고 직접 현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엘리나는 1도 신경 안 쓴다는 듯 공격을 강행했다.
“남의 사정보다 자기 목숨부터 걱정하는 게 좋을 텐데요?”
카라스코에겐 엘리나가 소멸의 기운을 두른 채로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큰 위협이 되었다.
아무리 실드로 막아서도, 블링크로 피해도, 반격을 가해도… 창천 앵무에 버금가는 속도를 낼 수 있는 엘리나 앞에선 모든 게 무용지물이었다.
실드와 공격은 소멸되기 일쑤였고, 블링크로 몸을 뒤로 빼내도 어느새 그녀는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공방이 이루어질 때마다 카라스코의 머리가 소멸되었다.
머리가 소멸되고 재생되길 반복하면서 하늘 고양이의 보주가 하나씩 깨지기 시작했다.
째앵!
처음에는 8개에서 7개로, 그다음엔 7개에서 6개로, 그리고 6개에서 5개로…….
이윽고 마지막 하나의 보주만이 남았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면서 요새 안의 시체 더미 또한 소각과 소멸을 반복하며 과반수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간간이 제랄드가 폭주하며 전투에 끼어들기도 했다.
“우오오오!”
“한 번 더 실례할게요.”
투퍽!
끼어들 때마다 엘리나에게 걷어차였지만 말이다.
남은 보주의 수는 1개.
그리고 카라스코의 원래 목숨 1개까지 더하면, 앞으로 두 번만 더 소멸시키면 그의 목숨도 끝난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와중에도 카라스코에게선 일체 도망가려는 기색이 안 보였다.
반드시 육지의 3대 신기를 손에 넣어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듯 쉴 새 없이 응전했다.
펑! 퍼벙! 퍼버벙!
끝이 보이지 않는 마기에서 비롯된 흑마법이 간격을 두지 않고 엘리나에게 엄습했다.
시커먼 불꽃이 치솟기도 하고, 별안간 벼락이 떨어지기도 하고, 효과를 전혀 가늠할 수 있는 검은 장막이 그녀를 뒤덮기도 했다.
그러나 소멸의 기운 앞에선 모든 게 무의미했다.
쏟아지는 공격을 소멸시키며 상공에서 지상으로 급하강을 이루며 카라스코에게 돌진하는 엘리나였다.
그녀의 신형이 물고기를 노리는 물총새처럼 일직선으로 하강을 이루던 중, 갑자기 엘리나의 몸 주위를 두르고 있던 소멸의 기운이 일제히 사라졌다.
카라스코의 실드를 소멸시키기 위해 뻗었던 손이 실드 위에 부딪혔다.
투퍽!
마물이 되며 육체가 강화되었기에 손이 부러지는 일은 없었지만 의도대로 실드를 소멸시키는 데엔 실패했다.
동시에 희비가 교차했다.
엘리나의 얼굴은 살짝 구겨진 반면, 카라스코의 얼굴엔 잃었던 웃음기가 돌아왔다.
카라스코는 금세 엘리나의 기운이 사그라진 이유를 간파해 냈다.
“미련한 년, 구속에서 풀려난 이후로 단 한 번도 인육을 입에 대지 않았나 보구나.”
겨우 몇 분 싸웠다고 기운이 다할 정도로 5성급 마물은 약하지 않다.
그럼에도 기력이 다했다면 그 이유는 몇 분밖에 싸우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져 있을 때뿐일 터.
어쩐지 승부를 서두르는 기색이 짙다 싶더라.
카라스코는 비웃음을 아끼지 않으며 마기를 두른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꿰뚫었다.
푸욱!
가슴을 꿰뚫은 손이 등 뒤로 튀어나왔다.
한데도 엘리나에게선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극심한 통증과 죽음의 그림자가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을 텐데 말이다.
엘리나는 오히려 그녀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 사람이 자주 짓던 표정을 그대로 자신의 얼굴에 덧씌웠다. 그에 따라 그녀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동시에 그녀의 손이 카라스코의 팔을 덥석 잡았다.
“붙잡았다. 도망칠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다 죽어 가는 년이 무슨 말을…….”
“보주를 희생하면서까지 남아 있는 이유를 말해 볼까요? 육지 3대 신기 중에 그쪽이 가장 두려워하는 무기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죠. 보주를 희생하면서까지 반드시 손에 넣고 싶었던 무기가 말이에요.”
육지의 3대 신기 중 하나인 ‘해방검’.
해방검은 모든 방어구를 관통하여 오로지 적의 육신만을 베어 낸다. 관통하는 물체는 오로지 물건에 해당하며 소멸의 기운이나 마나로 만든 실드는 관통하지 못하는 게 단점이긴 했다.
하지만 해방검의 진면목은 바로 ‘영혼 소멸’ 능력에 있었다. 해방검에 베인 자는 영혼이 서서히 붕괴되어 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소멸한다.
계약상 마물이나 언데드는 죽으면 마계로 이동하여 마물화나 언데드화에 마기를 제공해 준 마족의 부하로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녀 자신이 인육을 꺼린 것도 있긴 하다만 처음부터 해방검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일정 수준까지만 카라스코를 몰아넣은 것이다.
놈이 마계에서조차 존재하는 것을 허락지 않기 위해서.
엘리나는 바로 옆에 인위적인 형태로 쌓여 있는 시체 더미 안으로 팔을 쑤욱 집어넣었다. 그녀가 팔을 빼내었을 때, 그녀의 손에는 금으로 이루어진 황금검이 딸려 나왔다.
“아무쪼록 제 선에서 끝낼 수 있겠군요. 그 사람에게까지 차례가 가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무엇이… 무엇이 널 이렇게까지 하게 만드는 것이냐! 너 또한 평생을 당하고만 살아왔을 것이거늘!”
카라스코가 몸부림치며 팔을 빼내려 했으나 엘리나는 어깨를 오므려 가슴 근육을 한껏 조여선 도망을 허락지 않았다.
해방검이 뒤로 당겨졌다가 뻗어 나감과 동시에 엘리나가 아련히 중얼거렸다.
“그게 제 팔자인걸요.”
해방검의 검날은 먼저 하늘 고양이의 보주를 꿰고 있는 끈부터 잘라 내었다. 그러곤 카라스코의 갈비뼈를 부수며 몸을 관통하였다.
끈에 꿰어져 있던 보주 하나가 허공에 붕 뜨더니 엘리나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그녀는 카라스코의 몸을 발로 밀어내어 가슴에 박힌 손을 빼내었다. 그러고 나선 손바닥 위에 덩그러니 놓인 하늘 고양이의 보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가슴에 휑하니 구멍이 뚫리긴 했어도 보주를 목에 걸친다면 다시 살아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쓰는 대신 다른 이를 위해 쓰기로 결심했다.
저 멀리 시체 더미 아래에 있는 제랄드를 위해서 말이다.
엘리나는 이미 육체가 한계에 다다라 바닥에 엎어진 채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제랄드의 목에 보주를 걸어 주었다.
“제랄드 경, 앞으로도 그 사람을 잘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