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
183화 결국은 닿지 않더라 (1)
“스텔라, 제랄드에겐 내가 가 볼 테니 자네는 치료에 전념하게.”
달리는 말 위에서 러스트가 스텔라를 만류했다.
그녀의 몸 상태를 감안하면 혼자서 말을 몰고 있는 게 용할 정도였다. 두꺼운 화살촉이 어깨를 관통했는데, 제대로 된 응급 처치도 하지 않고 붕대만 감은 채로 달리고 있으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러스트의 옆에서 말을 몰던 스텔라는 엉성하게 두른 붕대를 강하게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뇨, 그이가 위험에 처했는데 저만 안전한 곳에 있을 순 없어요. 죽어도 그 사람 대신 제가 죽을 거예요. 그게 지금까지 사실을 숨겨 온 제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속죄예요.”
“속죄는 무슨. 자네가 밀정으로서 한 일이라곤 제랄드를 그 친구를 꼬드긴 게 전부잖은가. 미리 알려 두자면 결혼 활동은 위법이 아닐세.”
“그래도 밀정으로서 잠입해 있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어요.”
“흠, 실천하진 않았지만 의도는 있었느니 처벌해 달라는 건가. 빌로스의 법이 언제부터 생사람 잡는 법률이 되었지?”
“러스트 자작님.”
“그렇게 쳐다봐도 소용없네. 법은 사람을 벌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세. 유죄인 사람이 무죄가 될 수 없듯, 무죄인 사람이 유죄가 될 순 없네. 그리고 족장의 말로는 데메그리 교는 이미 오래전에 무너졌다지? 다시 말해 자네는 자기 혼자 데메그리 교의 밀정이라고 착각해 온 머리 이상한 여자였던 걸세.”
“이상한 여자라니…….”
직설적이다 못해 신랄하기 그지없는 말투를 구사하는 러스트였다.
한순간에 꽃밭을 뛰어다니는 여자가 되어 버린 스텔라는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황당해하는 스텔라의 모습을 본 러스트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대단한 부하에 이상한 여자라니, 이렇게 놓고 보니 끼리끼리 만난 셈이구만!”
스텔라는 부담감을 덜어 주기 위한 농담이라는 것을 알곤 피식 웃었다.
러스트에겐 백번 감사해도 모자라다.
제국군의 기습을 받아 어깨에 화살이 틀어박히고, 그 상태로 고군분투하며 간신히 버티던 참이었다. 아마 러스트가 1분만 늦게 도착했다면 그녀는 이미 백귀의 객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러스트, 그리고 원래는 제랄드의 부하 기사들인 자들이 가세해 둔 덕분에 제국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그 뒤 러스트에게 모든 사정을 설명했다. 데메그리 교는 이미 괴멸되었다는 것부터, 남부 요새로 제국 3성을 몰아넣은 것은 엘리나의 계책이며 얼른 병력을 이끌고 요새에서 멀리 벗어나야 한다는 것까지.
지금은 제랄드가 카라스코와 맞서 싸우기 위해 요새에 남았다는 얘기를 듣고 그를 지원하기 위해 서둘러 요새로 향하는 중이었다.
스텔라는 무의식중에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개량형 마검의 제어석을 건드리지만 않았다면 구해 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가느다란 희망을 품고서 말을 모는 스텔라를 두고 러스트는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제랄드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온 입장으로서 그가 이미 버서커화를 각오하고 싸움에 임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라스코의 무력을 모르는 만큼 감히 승패를 예상할 순 없었지만 제랄드가 이기든 지든 그를 살리진 못할 거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이미 결과를 아는 입장에선 극히 낮은 확률에 희망을 걸고 있는 스텔라의 모습이 측은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각자의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두 사람은 피와 살점이 흐르는 남부 요새에 도착했다.
* * *
전투가 끝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엘리나는 줄곧 제랄드의 상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크헉! 컥! 컥!”
버서커화의 부작용으로 제랄드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절명했다.
그의 생명이 다함과 동시에 숙주의 죽음을 감지한 마검이 손에서 떨어져 나왔다. 더하여 목에 걸린 하늘 고양이의 보주가 산산조각 났다.
파삭!
엘리나는 제랄드의 손에서 마검을 떨어뜨려 주었다.
기껏 살아났는데 또다시 숙주가 되어 버리면 말짱 도루묵이니까.
보주의 효과가 발동하면서 상했던 몸이 재생을 이루었고, 완벽하게 회복된 육체로 재구성되었다.
이걸로 혹사당했던 부위까지 모두 회복되었으리라.
제랄드의 숨이 되돌아오며 전신에 돋아나 있던 혈관이 가라앉았고, 이내 곧 피부에 혈색이 돌았다.
잠든 제랄드를 시체가 없는 위치까지 옮겨 주려던 순간, 요새 안으로 러스트와 스텔라가 들어왔다.
두 사람은 엘리나를 보자마자 움찔했다. 5성급 마물이 가슴이 뻥 뚫린 채로 서 있으니 당황할 수밖에. 그러나 이미 사정을 들은 후라서 금세 당황을 거두었다.
엘리나와 면식이 있는 러스트는 격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엘리나의 모습을 보고선 예를 갖췄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엘리나 왕녀님.”
“그 호칭은 됐어요. 왕족이라는 걸 한 번도 달갑게 여긴 적이 없거든요.”
“다크엘프 일족으로부터 모두 들었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같이 국왕 전하께 돌아가시지요.”
“말씀은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돌아가기엔 너무 많은 피를 묻혔거든요.”
“전하께선 상관하지 않으실 겁니다.”
“후후후. 네, 그 사람이라면 상관하지 않겠죠. 하지만 앞으로 꽃길만 걸으셔야 할 분이잖아요? 저주받은 존재를 품느라 고생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스스로를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자신을 받아들여 줄 장소가 필요했다. 자신을 허락해 주는 장소에서 가진 능력을 마음껏 펼치고 싶었다. 그 길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걸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거라 꿈꿨다.
그러나 하늘은 결국 그녀의 작은 소망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들에선 시체가 썩고, 강에선 피가 흐른다.
같은 논리라면 수없이 많은 전쟁을 거친 루크도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크의 경우 전쟁이고, 엘리나의 경우엔 학살이었다.
그 부분을 무마하기 위해 루크가 감당해야 할 고생을 생각하면 차라리 사라져 주는 게 맞다.
엘리나는 제랄드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며 입을 열었다.
“제랄드 경을 데려가세요. 몸 상태라면 하늘 고양이의 보주를 썼으니 걱정할 거 없어요.”
러스트는 제랄드의 가슴팍에 얹혀 있는 파편 조각을 확인코는 의문을 표했다.
“왕녀님의 몸 상태도 심각해 보이시는데 괜찮으십니까?”
“러스트 자작, 호칭요.”
“죄송합니다, 엘리나 양. 그보다 질문에 대답해 주십시오.”
“뭐, 보주를 2개 취했다면 저도 제랄드 경도 둘 다 무사했겠죠. 하지만 그러지 않고 1개만 취했어요. 그게 전부예요.”
“처음부터 이곳을 묫자리 삼을 생각이셨습니까?”
“…….”
확인을 요하는 질문에 엘리나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인간의 살점을 뜯지 않기로 결심한 시점에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생활이 시작된 셈이었다.
물론 편법으로 자신을 속이며 사는 방법도 있긴 하다. 사형수의 살점을 뜯는다거나, 이미 죽은 자의 시체를 뜯는다거나…….
하지만 그런 삶이 과연 정상적인 삶일까? 이 질문에 긍정을 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엘리나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말이다.
그냥 조만간 죽을 건데 그 시기가 앞당겨진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쪽이 마음이 편하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약간 떨어진 곳에서 리치 한 마리가 어기적어기적 몸을 일으켰다.
카라스코는 갈비뼈가 아작 난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허억! 빌어먹을 년, 네년을 위해 손을 쓴 게 얼만데 이렇게 방해를 해? 오냐, 하다못해 네년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그 자식만큼은 죽이고 가 주마. 반드시 죽인다. 반드시 죽이겠어.”
실성한 듯 중얼거리던 카라스코가 플라이 마법으로 몸을 띄워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러곤 혹여나 엘리나에게 따라잡힐까 봐 부리나케 퇴각했다.
멀어지는 카라스코를 두고 러스트와 스텔라가 다급하게 추격 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엘리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놔두세요. 해방검으로 베었으니 길어 봤자 두세 달이 한계일 거예요.”
마음 같아서 직접 쫓아가서 완전히 끝장을 내고 싶었지만 소멸의 기운을 쓸 수 없게 된 지 오래인 그녀에게 그럴 만한 힘은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러스트와 스텔라에게 물러나라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제랄드 경을 데리고 돌아가 주시지 않겠어요?”
적어도 죽을 때만큼은 추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그녀가 생각하기에 그녀의 인생은 충분히 추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양 하늘에서 거대한 새 한 마리가 요새 안으로 들어왔다.
푸른 눈을 지닌 새는 금세 엘리나의 지척에 착륙하였고, 창천 앵무의 등 위에서 한 사내가 뛰어내렸다.
마구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통해 그가 얼마나 급하게 날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사내와 엘리나의 눈이 마주쳤다.
사내의 눈동자에 엘리나의 모습이 담기면서 그의 입이 달싹였다.
“날개가 잘 어울리는데?”
루크다운 인사말이었다.
루크의 모습을 보자마자 원래 모습으로 둔갑하려 했으나 그의 칭찬을 듣고서 의도를 접었다.
엘리나의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루크… 전하.”
“루크면 돼.”
“루크, 전…….”
가슴은 휑하니 뚫렸는데 어째서 이렇게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까.
루크는 말을 잇지 못하는 엘리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 마당에 차갑게 식은 자신의 몸이 루크의 몸을 차게 만들까 봐 걱정되는 건 너무 바보 같은 생각인 걸까. 맞닿은 몸을 통해 그의 온기가 알알이 배어드는 듯하다.
눈물이 말라 버린 뺨을 타고 흐르며 턱 끝에 맺혔다. 이내 곧 턱 아래로 떨어진 물방울이 루크의 어깨에 눈물 자국을 남겼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자꾸만 입안에서 맴돈다.
예전에는 그리도 쉽게 입에 담았는데 여태껏 거쳐 온 시간의 공백이 보이지 않는 재갈이 된 듯 말을 내뱉길 허락지 않았다.
그 탓인지 심정과 다른 말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카라스코의 목숨은 두세 달이면 다할 거예요. 그 전에 수를 취할 테니 조심하세요.”
“하고 싶은 건 그 말이 아니잖아?”
“제가 사라지면 쟈칼이 마물과 언데드 군단을 이끌 거예요. 잘 대처하세요.”
“그 말도 아냐.”
“…….”
말을 하려는데 자꾸만 혀가 꼬인다.
엘리나는 눈을 깊게 감았다가 뜨며 루크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그토록 하고 싶었던 말이 흘러나왔다.
“사랑해요, 루크.”
그녀의 진심이 흘러나온 순간, 루크의 입이 달싹였다.
이미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른 그녀의 귀는 귀마개라도 착용한 양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주변의 모든 소음은 물론이고, 루크의 말까지 전부.
그러나 귀로 듣지 않아도 가슴이 그의 말을 이해했다.
[사랑해, 엘리나.]
어쩌면 이 한마디를 듣기 위해 태어난 걸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니 조금은 구원받은 기분이 들었다.
어느덧 동녘에서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빛줄기가 두 사람이 서 있는 자리를 비추며 긴 그림자가 늘어졌다.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짐과 동시에 그림자가 한 자리에 포개어졌다.
서로의 입술이 닿으려던 순간, 루크의 입술을 기다리고 있는 건 허공뿐이었다.
루크는 눈을 떴다.
방금까지 엘리나가 서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그녀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온기 없는 검은색 잿가루만이 흩날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