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
185화 금단의 마도서 (2)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녹색 착의 원피스를 입은 궁녀가 조신한 자세로 인사를 올리며 루크를 본 궁으로 안내했다.
본 궁으로 가는 내내 크레인 왕국의 귀족들이 길 양옆에 서서 허리를 45도로 숙이는 등 열렬한 환대 속에서 이동하게 되었다.
환대를 받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으나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환대의 수준은 필요의 수준과 비례한다. 작금의 환대는 크레인 왕국이 굉장히 궁지에 몰려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상대측에서 먼저 칼자루를 건네주는 경우는 오랜만인지라 괜스레 신선하게 느껴졌다.
루크는 부담스러우리만치 열렬한 환영 속에서 본 궁에 입궁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빌로스의 왕이시여. 어인 일로 이런 누추한 곳에 다 오셨습니까?”
호쿠 왕이 저 먼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소국이 대국에게 취해야 할 모범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루크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빌로스 왕국이 크레인 왕국을 경시하고 있지 않음을 표했다.
“이런 식으로 불쑥 실례를 끼치게 되어 죄송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리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대륙 정세가 불안정하니 크레인 왕국과 상의를 하기 위함입니다.”
손님으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예의를 차리는 루크였다.
별거 아닌 인사말에 불과했으나 그 여파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루크의 정중한 태도에 호쿠 왕을 비롯한 크레인 왕국의 중역들은 놀란 기색을 띠었다.
듣기론 이 루크란 사내는 겐크, 해저 섬, 신성제국, 거인국, 엘프의 숲 등등… 그 어떤 국가를 상대로도 공격적인 태도를 서슴지 않았던 사내로 알고 있다.
때문에 대륙 북동부 변두리의 국가들 사이에선 루크를 매우 공격적이고 정복욕이 넘치는 폭군의 이미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실제로 만나 보니 지극히 상식적이고 예를 갖출 줄 아는 군자의 인상이지 않은가.
신성제국이 몰락하면서 빌로스 왕국이야말로 대륙을 관통하는 유일 대국으로 우뚝 솟았건만 이와 같은 대국이 소국을 상대로 예를 다해 주는 것이 감격스러울 따름이었다.
호쿠 왕은 분에 넘치는 예우를 감사히 여기며 자리를 권했다.
“실례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시국이 시국인데 격식을 따지는 것이야말로 실례 아니겠습니까. 미약한 힘이나마 보탬이 된다면야 얼마든지 빌려 드리겠습니다. 자자, 계속 서 있기도 뭐하니 앉아서 얘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궁녀들이 바쁘게 움직여 준 덕에 본 궁 안엔 만찬회를 벌일 준비가 끝나 있었다.
루크와 호쿠 왕은 기다란 직사각형 테이블의 상석에 앉았다.
최상단에 누굴 앉히느냐를 두고 사소한 해프닝이 벌어졌었는데, 호쿠 왕은 루크를 상석에 앉히고 싶어 했으나, 아무리 그래도 손님이 타국의 왕이 앉을 자리에 앉자니 배려가 너무 과하여 극구 사양했다.
결국 호쿠 왕이 가운데 상석에 앉고, 루크가 상석의 오른쪽 대각 자리에 앉아 대화의 장을 열었다.
크레인 왕국의 특산물이자 과일향 나는 소고기로 유명한 과실우의 고기로 만든 각종 요리로 한 상 그득히 차려지는 가운데 호쿠 왕이 먼저 운을 띄웠다.
“상의를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역시 마물 군단과 관련된 건입니까?”
서로 용건을 짐작하고 있는 마당에 빙빙 돌려 말해 뭐하리.
루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호쿠 왕이 모르고 있을 정보를 알려 주었다.
“마물 군단을 이끌던 이가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쟈칼이 이끌고 있지요.”
“쟈칼이라면 그 학살자 용인 쟈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하면 엘리나는…….”
“말하자면 깁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가 이번 마물의 난을 뒤에서 주도한 자에게 크나큰 일격을 가하고 죽었다는 것이지요.”
“…….”
대부분의 정보가 생략된 설명이었지만 호쿠 왕은 구태여 설명을 요구하는 등의 촌스러운 행동은 하지 않았다. 루크의 눈동자에 일순 일렁였던 애절함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벌벌 떠는 동안 루크에게 많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고선 눈치껏 엘리나의 명예를 옹호했다.
“불명예를 짊어지는 용기야말로 진정한 용기라지요. 언젠간 음유시인들이 그녀의 영웅가를 만들어 부를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군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마물 군단은 제국 북쪽을 관통하여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네, 거기까진 저희도 파악해 둔 상태입니다. 다만 이곳 크레인 왕국에선 놈들을 막을 힘이 없다는 거지요.”
“조만간 빌로스 군과 거인, 엘프들이 북으로 올라올 겁니다. 원군이 도착하면 질과 양에 있어선 얼추 타산이 맞아떨어지겠지요.”
크레인 왕국에서 루크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다.
호쿠 왕은 자신이 가진 패 중에서 루크가 원할 만한 패를 짐작하여 입에 담았다.
“전력이 비등비등한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앞서는 편이 좋긴 하지요. 남 일이 아니니 기꺼이 병력을 파견하겠습니다.”
“크레인 왕국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는 변방 국가들까지 모두 설득해 주셨으면 합니다.”
변방 국가라곤 해도 최소 수비 병력만 남겨 두고 나머지 파견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차출하여 한데 모으면 3, 4만 명은 모일 것이다.
그만한 숫자라면 오히려 지기 힘들 정도의 전력을 갖추는 셈이다.
하지만 호쿠 왕의 반응은 썩 긍정적이진 않았다.
“설득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군요. 자기네들이 당장 급한 것도 아닌데 쉬이 병력을 내주진 않을 겁니다.”
“이쪽에서 내달라고 부탁하는 게 아니라 저쪽에서 돕게 해 달라고 매달리도록 만들어야지요.”
“그렇게 된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만, 그리 만들 방안이 있긴 합니까?”
“토벌 성과에 따라 제국의 땅을 차등 분배해 주겠다는 공약을 걸 생각입니다.”
현재 제국은 주인 없는 땅이 되었으며 먼저 차지하는 자가 임자인 상태에 놓여 있다.
순리대로라면 가장 먼저 토벌 작전에 임한 데다 가장 높은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빌로스 왕국이 제국 땅을 차지하는 게 맞긴 하다.
그럼에도 변방 국가들에 제국 땅의 일부를 차지할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변방 국가들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호쿠 왕은 너무 좋은 조건인지라 되려 불안해졌다.
“수지가 안 맞는군요. 보상에 조건이 달려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만.”
아니나 다를까 루크가 영토를 배분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조건을 덧붙였다.
“별로 어려운 조건은 아닙니다. ‘제국의 일원이 된다.’는 맹세만 한다면 얼마든지 영토를 분배받을 수 있겠지요.”
사실상 빌로스 제국의 건설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빌로스 왕국이 신성제국의 영토를 편입시킨다 하더라도 광활한 영토를 모두 관리할 만한 여력이 안 된다. 때문에 변방 국가들에 영토를 배분하려는 것이다. 마치 주군이 신하에게 영지를 하사하듯이 말이다.
토지를 하사받는 대가로 변방 국가들은 빌로스 제국과 충성 서약을 맺고 조공을 바치면 된다.
얼핏 보면 빌로스의 산하에 놓이게 되는 것이나 실상을 파헤쳐 보면 변방 국가들에겐 득이 되면 됐지 손실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계속 신성제국에 조공을 바쳐 왔지 않은가!
조공을 바칠 대상이 신성제국에서 빌로스 왕국으로 바뀔 뿐이다. 거기다 상당량의 영토까지 확보할 수 있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호쿠 왕은 합리적인 조건이라 판단하였다.
“알겠습니다. 북동부의 변방 국가들은 제가 설득하도록 하지요.”
“그리고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만.”
“하하하,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이 마당에 개인적인 부탁 하나 못 들어드리겠습니까.”
“크레인 왕궁 안에 있는 1급 서고에서 책 몇 권만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크레인 왕국은 지식 보존을 위해 전 대륙의 서적을 수집하여 보관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세간에 유출되면 위험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서적은 왕궁 내에 위치한 1급 서고에 보관 중이었다.
혹여나 위험한 서적을 원하는 게 아닐까 싶어 호쿠 왕의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워졌다.
“어떤 서적을 원하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흑마법과 관련된 서적 몇 권을 가지고 가고 싶습니다.”
“흑마법? 그… 혹시 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1급 서고에 있는 흑마법 서적들은 전부 금서입니다.”
“네, 그래서 이리 개인적으로 부탁드리는 것이지요.”
“직접 사용하실 겁니까?”
“구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말입니다.”
금서가 거론되는 내내 루크의 몸가짐에 흐트러짐이라곤 일체 없었다.
힘으로 얻으려고 하면 얼마든지 강탈해갈 수 있는 사내다.
그럼에도 양해를 구하고 있다. 하물며 루크 쯤 되는 사내가 더 강해지기 위해 흑마법을 원하는 것은 아닐 터. 흑마법 없이도 그는 이미 정점에 올라 있는 사람이다.
악용하기 위함이 아닌, 누군가를 구하기 위함이라는데 이번만큼은 금서 유출 금지 규칙을 깨도 되지 않겠는가.
호쿠 왕은 잠시 고민하더니 인자한 미소를 띠었다.
“흐음, 원래는 서적 유출이 금지되어 있지만 이번만큼은 예외로 두도록 하지요. 가져가십시오.”
* * *
연합군 형성, 제국 발족을 위한 주변국 설득, 거기에 금서 반출 허가까지.
크레인 왕국에서 하고자 했던 바를 모두 이루었다.
루크는 대화가 마무리되자마자 1급 서고로 안내받았다.
먼저 왕궁 마법사의 안내를 받으며 왕궁 1급 서고가 있는 지하로 이동했고, 두꺼운 철문을 지나 각종 보안 마법을 통과하여 책장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안내역을 맡은 왕궁 마법사가 한편에 놓인 책장 앞에서 멈춰 서며 말을 꺼냈다.
“금서들은 전부 소형 결계로 보호되고 있습니다. 원하시는 서적을 고르시면 꺼내드리겠습니다.”
금서로 지정된 책들은 일반적인 방식으로 꽂혀 있지 않고, 표지가 훤히 보이도록 낱개로 누여져 있었다.
금서마다 푸른 기류가 흐르고 있었고, 소형 결계를 풀지 않고 억지로 꺼내려 하면 결계가 금서를 태우도록 설정되어 있다고 한다.
루크는 나열된 금서를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책 세 권을 골랐다.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걸 꺼내 줘.”
루크가 고른 책은 흑마법이라기보단 마계와 관련된 내용이 담긴 책이었다.
[자가 언데드화 -마계 생성편-]
[마계 역사와 사상 -마계 7기둥의 세상-]
[마기 변환의 서]
척 봐도 마계에서 활동할 때나 유용할 법한 서적들뿐이었다.
특이한 선정에 마법사가 다소곳하게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긴 했으나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서적을 제공하라는 왕명이 있었기에 군말 없이 결계를 해제해 주었다.
원하는 바를 모두 얻은 루크는 책 세 권을 꽁꽁 동여매어 챙겼다. 그러곤 누구도 보지 못하게 로브 안쪽 깊숙이 넣고서 1급 서고를 빠져나왔다.
지하 계단을 밟아 막 지상으로 올라온 찰나, 크레인 왕궁 내에 위치한 초소에서 녹색 깃발이 펄럭이는 게 보였다. 누군가가 상공에서 왕궁 내부 착륙 요청했고, 왕궁에서 착륙을 허가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광경이었다.
허가가 떨어지면서 낯익은 모습의 날짐승이 크레인 왕국 안으로 들어왔다.
삼색제비였다.
삼색제비는 정확히 루크의 코앞에 착륙했으며, 제비의 등에 올라타 있던 레이아가 부랴부랴 전달사항을 알렸다.
“전하! 카라스코의 위치를 알아냈어요! 어서 움직여야 할 것 같아요! 놈이 미친 짓을 시도하려 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