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186화 금단의 마도서 (3)
레이아의 경우 바이스와 함께 군을 이끌며 북상하고 있던 참이었다.
스텔라로 하여금 바이스에게 전언을 전하라고 한 게 보름 전이고, 스텔라가 아무리 빨리 이동하더라도 바이스와 만날 때까지 닷새는 걸렸을 거다.
즉, 열흘 남짓한 시간 안에 카라스코를 발견한 데다 크레인 왕국까지 날아와 보고를 올린 것이었다.
“의외로군. 놈이라면 좀 더 은밀하게 움직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말이지.”
아무래도 엘리나 건으로 굉장히 심사가 뒤틀렸나 보다.
수백 년을 묵묵히 참아왔던 놈이건만 고작 2, 3달을 못 참고 바로 실행에 나섰다. 이는 곧 놈의 특기인 잠복을 포기할 만큼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창 심각하게 생각에 잠겨 있던 중 레이아가 두 손을 가지런히 한데 모으고선 다소곳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이 꼭 눈치를 보느라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비단 착각이 아닐 것이다.
“뭐 할 말이라도 있어?”
레이아는 속으로 셈을 하듯 입으로 ‘하나, 둘, 셋’을 중얼거리곤 심호흡을 했다.
“후우, 얘기 들었어요.”
그녀가 기력을 짜내어 겨우 꺼낸 말이라곤 ‘얘기 들었다.’ 이 한마디뿐이었다.
여기서 얘기가 지칭하는 사건이 엘리나와 관련된 사건임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무척 짧은 한마디였지만 말 속에 미안한 감정과 안쓰러워하는 감정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토록 루크를 위해 희생한 여인을 대신하여 자신이 루크의 옆자리를 차지해도 될지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지며 내적 갈등을 자처했다.
루크는 레이아를 포근하게 끌어안으며 손으로 그녀의 찰랑이는 은발을 쓸어내렸다.
“걱정 마. 다 잘 될 거야.”
“제가 행복할수록 엘리나의 불행이 부각되는 것 같아서 망설여져요.”
“방금도 말했지만 다 잘될 거야. 그러니 동정하지 마. 엘리나는 끝까지 긍지 높은 왕족이었어.”
그녀가 보여 준 희생 정신과 끝까지 인간의 긍지를 갖춘 채로 죽으려 했던 모습은 왕족의 정신 그 자체였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왕족임을 그토록 싫어했던 여인이 구 겐크 왕가의 마지막 항렬 중에서 가장 왕족다운 왕족으로서 죽어 갔으니 말이다.
잘될 거라는 말이 연거푸 반복될 때마다 레이아의 안색이 눈에 띄게 나아졌다.
레이아 본인은 루크가 자신을 달래기 위해 꺼낸 말 정도로만 여겼다. 실제로 수많은 상황에서 위로의 용도로 쓰이고 있는 말이니 말이다.
이야기가 샛길로 새었기에 다시금 분위기를 갈무리하고선 본제로 돌아갔다.
“하던 얘기로 돌아가자고. 카라스코가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게 무슨 의미야?”
“천공섬 아시죠?”
“파이의 고향이자 용인의 영역이지. 거긴 왜?”
“카라스코가 용인들과 새들을 전멸시키고 천공섬을 차지했어요. 그리고 천공섬의 제어 장치를 이용해서 곧장 빌로스 왕국으로 가고 있고요.”
천공섬은 어지간한 중소 도시급의 규모를 자랑하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섬이며 섬 아랫부분의 암석이 부유석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하늘을 떠다닐 수 있다.
오래전, 용인들은 부유석으로 이루어진 지반에 마법진을 새겼고 제어 장치를 통해 마법진을 조정하여 온 대륙을 떠다니고 있었다.
용인들이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계속 이동하는 이유는 단순히 유희 때문이었다. 지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구경하며 천공섬에서만 생산이 가능한 넥타란 술을 마시는 게 그들의 유일한 낙이자 일거리였다.
좋게 말하면 풍류를 즐기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관음증 환자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 생각하니 용인들 사이에서 지내다가 미쳐 버린 쟈칼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천공섬을 차지하여 빌로스 왕국으로 이동하는 것만으로는 ‘미친 짓’이라 칭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카라스코가 거창한 이동 수단으로 이동 중이라는 정보가 전부라면 다른 의미에서 미친 짓이긴 하군.”
“아직 제 말 끝나지 않았어요. 중요한 건 천공섬이 점점 고도를 낮춰 가면서 가속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어딘가에 부딪히려는 것처럼?”
“그렇죠. 얼추 계산해 봤는데 한 달 내로 헤테룬과 충돌할 거란 계산이 나왔어요.”
“오차는?”
“100킬로쯤 돼요.”
“천공섬의 질량을 감안하면 오차는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
“네, 말씀대로예요. 천공섬만 한 거대 섬이 지면에 떨어지면 도시 한두 개 날아가는 걸로 끝나지 않겠죠.”
“이제야 올바른 의미에서 미친 짓으로 보이기 시작하는군.”
루크가 어스를 손에 넣음으로써 그간 준비해 온 건물형 마물을 이용한 대테러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그러니 건물형 마물의 대안으로 아예 천공섬을 지면에 떨어뜨린다는 무식한 작전을 획책한 것이다.
루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곧 상념에서 벗어나며 지시를 내렸다.
“넌 제랄드, 바이스와 함께 쟈칼의 군단을 처리하도록 해. 난 곧바로 헤테룬에 가겠어.”
“보쌈 전문 도마뱀에게 철퇴를 내려라, 이 말씀이시죠?”
레이아가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펴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본인은 자신 있는 것 같지만 쟈칼은 자신감만으로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마나 면역을 갖춘 드래곤 스케일은 마나 공격 위주의 마법사인 레이아과 상성을 이룬다.
루크 또한 과거에 마나 대신 해왕검의 예리함과 순수 검술만 이용하여 쓰러뜨릴 수밖에 없었는데, 레이아가 같은 방법으로 쟈칼을 제압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하다못해 놈에게 유효한 무기만이라도 갖춰 주고자 해방검을 내밀었다.
“이걸 가져가. 신기라면 놈의 비늘을 뚫을 수 있겠지.”
“해방검? 신기라면 더더욱 전하께서 가져가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해왕검이 있으니까 됐어. 참고로 영혼 소멸 능력은 봉인 상태야. 카라스코가 죽기 전까진 다른 사람에게 걸 수 없어.”
해방검의 영혼 소멸 능력은 1회 1인까지만 적용된다. 다른 이를 지정하여 영혼을 소멸시키려면 기존에 영혼 소멸 능력에 걸려 있는 자가 죽은 후에나 가능하다.
레이아는 해방검을 받아쥐고선 각오를 다지듯 머리를 세로로 흔들었다.
“최대한 잘 활용해 볼게요.”
“혹시라도 제대로 못 다룰 것 같으면 제랄드에게 넘겨. 괜히 서투르게 사용하다가 빼앗겨서 역으로 찔리지 말고.”
“후후, 그럴 일은 없을 걸요? 절 찌를 권리는 전하만 가지고 있잖아요?”
농담을 날리는 걸 보니 엘리나 사건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났나 보다.
루크는 레이아의 이마에 가볍게 검지를 튕기고선 씨익 웃으며 파이의 등에 올라탔다.
* * *
연합군 지휘를 레이아에게 맡긴 루크는 그대로 속도를 붙여 빌로스 왕국으로 돌아갔다.
파이가 밤낮 가리지 않고 전력 질주를 해 준 데다, 라그나로스의 열막을 통하여 체력 손실을 최대한 줄였기에 기존의 대륙 종단 기록을 단숨에 갈아치울 수 있었다.
열흘 남짓한 시간을 소요하여 헤테룬에 복귀하자 그란데 공작이 기다렸다는 듯 루크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먼 길 달려오느라 힘드시겠지만 지금은 바로 회의에 들어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 현재 상황은 어떻지?”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시지요. 천공섬의 생존자가 찾아와 전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회의장 안으로 들어가니 귀족들이 양옆으로 일렬로 서 있었고, 단상 아래에 푸른 비늘을 지닌 용인 한 명이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용인은 루크와 마주하자마자 자신의 이름이 ‘레버’라는 것과 카라스코를 상대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임을 밝혔다.
루크는 간만에 단상 위의 왕좌에 앉으며 몸을 깊이 파묻었다. 속도 위주의 여정을 거친 탓에 다리에서 노곤거리는 느낌이 올라왔지만 개의치 않고 대화를 이어 갔다.
“오는 내내 몇 가지 방법을 떠올려 봤는데 그중에서 카라스코를 처치하고 제어 장치를 되찾는 게 가장 현실적인 것 같다만, 현지인으로서 견해는 어떻지?”
푸른 비늘의 용인, 레버는 여전히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외람되오나 그 방법으로는 천공섬을 멈추지 못합니다. 녀석은 천공섬의 추락 궤도를 설정해 놓은 후에 제어 장치를 파괴했습니다.”
“카라스코가 죽어도 천공섬은 추락한다는 거군.”
“네. 말씀대로입니다.”
“차선책으로 천공섬 자체를 상공에서 파괴하는 방안도 생각해 뒀다만.”
“이론상으로는 가능합니다만 그만한 화력을 갖추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서…….”
일개 도시를 초토화시키는 것이라면 모를까, 일개 도시만 한 크기의 돌덩이를 완전히 가루로 만드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부유석의 강도는 평범한 돌덩이와는 궤를 달리하는 것으로 유명하며 그 단단함은 강철에 버금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라스코를 죽여도 천공섬은 떨어지며 천공섬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결국 물리적인 힘을 가해서 직접 멈추는 게 유일한 해결 방안이라는 거군.”
레버가 뭔가 말하려다 말고 입을 오므렸다. 마찬가지로 그란데 공작을 비롯한 빌로스의 귀족들도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지금 말하면 왠지 트집처럼 될 것 같아 쉬이 입에 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건지 대강 짐작은 간다.
물리적으로 천공섬을 멈춰 세우는 것 또한 이론상으로만 가능하지 실제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론상으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천공섬 자체를 상공에서 파괴시키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루크의 생각은 달랐다. 적어도 지금까지 나열된 선택지 중에서 가장 현실성 있는 방안이라 여겼다. 그래도 혹시 몰라 다른 이들의 의견을 물었다.
“혹시라도 다른 방안이 떠오른 사람이 있다면 가감 없이 얘기해 줬으면 좋겠군.”
의견은 많을수록 좋으니 발언할 기회를 주고자 귀족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하지만 달리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지 장내 곳곳에서 고민에 빠졌을 때나 발생하는 침음이 흘러나왔다.
대부분의 귀족은 지식과 경험에 의존한다. 한데 이번 일은 문헌으로 남겨진 바가 없는 데다 그 누구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건이다.
이례 없는 사건인 만큼 쉽게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충분한 시간을 주었음에도 아무도 대답이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루크의 안이 채택되었다.
“그란데 공작, 천공섬과의 예상 충돌 시간까지 얼마나 남았지?”
“마탑 수장들의 계산에 의하면 20일가량 남았다고 합니다.”
“레이아의 계산과 일치하는군. 헤테룬에서 떨어진 곳에서 멈춰야 할 테니 실질적으로 남은 시간은 17, 18일 정도인가.”
“물리적인 힘을 가하여 멈춘다고 하셨는데 정말로 가능하겠습니까?”
루크는 왕좌에서 일어나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안 되면 되게 만들면 돼.”
이후에 루크의 명령에 따라 천공섬 추락을 막기 위한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기 위한 준비로써 가장 먼저 해저섬에서 가져온 막대한 양의 오션마린을 헤테룬 북부 황무지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