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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재능으로 환생-187화 (187/200)

# 187

187화 내 역할이 뭔지 알았을 뿐이야 (1)

천공섬 추락 건 때문에 빌로스 왕국에서 한창 대책을 강구하고 있는 가운데, 대륙 북쪽에선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신성제국 북부 지방을 횡단하고 있던 쟈칼은 뒤늦게 엘리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뭐? 엘리나가 죽어? 그 사기적인 능력을 가지고 죽었다고?”

엘리나가 지니고 있던 소멸의 기운의 사기성은 줄곧 곁에서 보아 온 쟈칼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소멸의 기운이야말로 무형의 기운 중에서 최상위권에 놓여 있는 기운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야말로 무적이며 그 괴물 같은 루크 놈을 죽여 줄 거라 생각했기에 군말 않고 따랐던 것이다.

쟈칼은 마물들을 앞에 두고 의미 없는 각종 제스처를 취하며 불안증세를 보였다.

“좋아, 죽을 수도 있지. 그럼 그럼 그렇고말고. 전장에선 누군들 죽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말이야. 근데 그년이 그렇게 뒈져 버리면 우린 어떻게 하지? 이제부터 뭘 해야 하냐고.”

군대로 치면 간부급에 해당하는 4성급 마물들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뭘 그리 고민해? 그냥 여태까지 했던 대로 인간들을 죽이고 먹으면 그만이지.”

“음, 학살이라. 그건 이미 질리도록 했어. 너희 마물들은 먹는 재미라도 있지만 우리 언데드들에겐 그마저도 없으니 문제지.”

현재 쟈칼은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다.

살아 있을 적에는 학살에서 오는 쾌감을 알알이 느끼며 혈향과 비명 소리를 즐겼다.

그러나 언데드가 되고 나서부턴 아무리 죽여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언데드가 되면서 오감이 둔해진 나머지 이젠 피 냄새를 맡아도 비린내의 여운만 잠깐 느껴질 따름이고, 학살이 취미가 아닌 업무의 일환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예전만큼 즐겁지가 않았다.

으레 아무리 좋아하는 취미라도 일이 되어 버리면 즐거움이 반감한다고 하지 않은가.

그건 살육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아닌 듯했다.

엘리나의 명령이라 제국의 영토를 휩쓸며 이동하는 중이었는데, 막상 명령을 내린 엘리나가 죽었다고 하니 굳이 억지로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밀려왔다.

4성급 마물은 쟈칼의 모습에서 번아웃 증세를 감지했다.

“그냥 네가 엘리나의 뒤를 잇지그래? 재미가 있건 없건 인간 놈들이 싫은 건 사실이잖아?”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싫어하는 쪽이겠지. 그런데 말이야, 인간들 측엔 루크라는 놈이 있거든? 그놈과 다시 싸우는 건 사양이야.”

인간 말살 계획도 엘리나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엘리나가 진심으로 나선다면 루크 그놈도 어쩌지 못할 테니까.

반대로 말하면 엘리나가 없으면 루크를 죽이지 못한다는 게 된다.

직접 부딪쳐 본 쟈칼이기에 뼈저리게 알고 있다.

놈은 괴물 중의 괴물이라는 걸.

반면에 마물들은 마물화되며 생전의 기억을 잃었기에 루크의 강함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마물들의 입에선 연신 속 편한 의견만 튀어나왔다.

“알아, 안다고. 그놈이 정점이라 불린다는 얘기만 하더라도 귀에 딱지 앉도록 들었어. 근데 정점이라곤 해도 인간 중에서만 그렇다는 거잖아? 그게 뭐 어때서?”

“그 호칭이 생물 중에서 정점이란 뜻을 함축하고 있다는 게 문제지.”

“호들갑도 유분수지. 쟈칼, 네가 그렇게 겁쟁이일 줄은 몰랐는걸?”

“이런 답답한 것들.”

당연한 사실을 알려 준 것일 뿐인데 돌아오는 것이라곤 겁쟁이라는 비난뿐이니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차라리 그냥 떠나 버려?

숨어 사는 것도 비참한 건 마찬가지겠지만 적어도 주제를 모르는 푼수들과 운명을 함께하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갈등하던 중 전방에 있는 산 너머에서 심상치 않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쿵! 쿵!

흡사 거대한 무언가가 군단이 있는 진영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듯한 소리였다.

걸음의 간격으로 예상컨대 2족 보행을 하는 생물체로 추정되었다.

혹시 거인일까? 충분히 가능하긴 하다만 발소리의 크기가 거인과는 궤를 달리하는 음량을 자랑하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는 미지의 생물체 때문에 수만에 달하는 마물과 언데드들이 긴장 상태에 빠졌다.

모두의 시선이 산 너머에 집중된 가운데 산등성이 빗면 위로 정체불명의 거대 생물체가 머리를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언데드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 누군가가 거대 생물체의 정체를 언급했다.

“타, 타이탄!”

바실리스크, 레비아탄과 더불어 신이 만든 3대 고대 병기라 불리는 타이탄이었다.

하늘을 떠받치는 거석이라 불리는 이 거인은 덩치가 산과 맞먹을 정도로 거대했으며 전신이 시커멓게 그을린 용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용암석의 틈새에선 마그마가 피를 대신하듯 혈관을 따라 순환하는 중이었다.

예고 없이 등장한 고대 병기는 쟈칼을 비롯한 마물 군단에게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다.

쟈칼은 마기를 끌어 올리며 경계태세를 취했다.

“고대의 병기여, 오래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자취를 감췄다고 들었다만 이제 와서 우리에게 무슨 볼일이지? 인간들이 우릴 처리하랍시며 보내기라도 했나 보지?”

변방 국가들이 마물 군단을 막고자 대륙 어딘가에 숨어 있던 타이탄을 깨워서 보낸 걸지도 모른다.

경위야 어찌 됐든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타이탄은 화로 속 숯덩이처럼 이글거리는 열기를 뿜어내며 산 능선에 걸터앉았다. 겨울이 되어 말라붙은 산기슭의 나무에 불길이 일면서 산 전체가 순식간에 불로 이루어진 의자와 같은 형상이 되었다.

“오래전에 옛 친구와 맺은 약속을 지키러 왔다.”

타이탄의 언행에서 적의가 느껴지진 않았다.

아무래도 적이 보낸 건 아닌 듯하다.

대화를 원하는 듯한 분위기가 풍겨 왔기에 쟈칼도 경계태세를 풀고서 자신들을 찾아온 경위를 물었다.

“맥락을 알 수 없어서 그런데 좀 알아듣게 설명해 주지그래?”

“고대에 나를 포함한 3대 병기들은 병기 생활에 지쳐 있었지. 그래서 카라스코와 약속을 맺었다. 병기 생활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는 대신 때가 되면 단 1회에 한해서 놈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카라스코가 살아 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미 쟈칼의 가슴속에서 인간 말살 계획을 강행할 의욕 따윈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식사도 한 번 흐름이 끊기면 식욕이 뚝 끊긴다지 않은가. 엘리나가 죽었다는 걸 알자마자 의욕이 송두리째 뽑혀나가선 돌아오질 않는다.

그녀에게 존경이나 애정의 감정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보단 공감에 가깝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 싶다.

사랑하는 이가 있었지만 끝내 이어지지 못하고, 악으로 분류되고 만 그녀의 처지에 공감했었다.

쟈칼의 경우엔 자의적으로 업보가 쌓여 악으로 분류됐다만 엘리나는 타의에 의해 그리되고 말았잖은가. 그녀가 어떻게 군단의 수장이 되었는지 일일이 봐 왔기에 따를 마음이 생겼던 거다.

이를 두고 과몰입이라 하던가? 그래, 굳이 정의하자면 과몰입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이제 와서 직접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는 이가 보낸, 고대의 병기가 가세한다고 꺼졌던 의욕이 되살아날 리 만무했다.

머릿속에선 어차피 남 일이라는 생각만 맴돌았다.

쟈칼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타이탄은 카라스코로부터 들은 정보를 줄줄이 읊었다.

“엘리나는 인간의 편으로 돌아서서 카라스코에게 대항하다가 죽었다. 인간몰살을 부르짖어 놓고 뒤에선 인간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지.”

이제야 엘리나의 진의를 알게 된 마물들은 길길이 날뛰며 분개했다.

“이런 빌어먹을 년을 봤나! 인간 말살 어쩌구저쩌구 지껄인 것 자체가 다 거짓말이었다 이거야?”

“그런 짓을 해서 대체 뭐가 남는데? 참 나, 도무지 이해가 안 되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생각해 보면 그년이 고기를 입에 대는 꼴을 본 적이 없다니까.”

마물들은 엘리나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간다며 비난을 일삼았다.

그나마 4성급 마물들은 말을 골라서 하고 있으나 그 이하의 마물들은 상스러움이 풀풀 풍기는 단어를 서슴없이 입에 담았다.

수만 마리에 이르는 마물들이 욕지거리를 내뱉다 보니 마치 언어로 이루어진 오물통 안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물들은 엘리나를 비난했으나 쟈칼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엘리나가 지나가듯이 말했던 말을 떠올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제야 그때 했던 말이 이해가 가는군.”

엘리나가 남쪽으로 가기 직전에 쟈칼에게 했던 말이 있다.

-누구나 세상에서 한 가지 배역을 맡고 있다죠. 조금은 제 역할이 뭔지 보이네요.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이제는 이해가 간다.

아무리 불합리한 배역이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배역에 걸맞은 행동을 할 때가 가장 빛나는 순간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사방에서 들려오던 비난의 목소리가 가라앉을 즈음 타이탄이 하던 말을 이었다.

“지금은 누가 군단을 이끌고 있느냐?”

엘리나의 후임을 거론하자 4성급 마물들이 쟈칼을 쳐다보았다.

그나마 전쟁 경험이 풍부하여 대규모 병력을 통솔할 지휘력을 갖추고 있는 데다 마물과 언데드 양측을 중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쟈칼이었다.

쟈칼은 자신에게 쏠린 이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호하게 부정했다.

“아직까진 미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 뭣 하면 형씨가 맡지그래?”

“그러면 카라스코와의 약속이 끝날 때까지만 너희들을 이끌어 주마.”

“미리 말해 두겠지만 적군에는 루크란 자가 있어.”

“놈에 대한 얘기라면 카라스코에게 들었지. 놈은 카라스코가 맡을 테니 안심해라. 그보다 우린 연합군을 쳐부수는 데 집중한다. 연합군을 이끄는 자는 레이아란 계집이라더군. 그년은 내가 죽일 테니 너희는 조무래기 사냥에 전념하도록.”

쟈칼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타이탄이 읊은 말 속에 도저히 그냥 흘려넘길 수 없는 이름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아가 빌로스군에서도 중역에 속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는 건 알고 있는 바이다.

엘리나가 루크를 향해 증오의 감정을 쏟아 낼 무렵엔 그래도 조금이나마 희망을 가졌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기 전에 레이아를 빼내기만 하면 그 뒤는 기세로 몰아붙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마저도 엘리나가 죽으면서 이젠 요원한 소망이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쟈칼은 타이탄의 말이 끝나자마자 질문을 날렸다.

“궁금한 게 있는데, 똑같이 카라스코와 약속을 했던 바실리스크와 레비아탄은 이번 일에 가세하지 않는 건가?”

“녀석들이 있으면 일이 좀 더 수월했겠지만 아쉽게도 무산되었지. 바실리스크는 사정이 있어 오지 못하게 되었고, 레비아탄은 어디로 숨었는지 찾을 수가 없다는군.”

“그럼 카라스코가 보낸 원군은 너 하나밖에 없다는 거군.”

“거기에 불만이라도 있는 건가?”

불만 여부를 묻는 타이탄의 질문에 쟈칼이 초연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렸다. 자신이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다는 것에 스스로 놀라면서 말이다.

“아니, 불만 같은 건 없어. 그냥 이제야 내 역할이 뭔지 알았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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