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188화 내 역할이 뭔지 알았을 뿐이야 (2)
레이아는 크레인 왕국에 머무르며 변방 국가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호쿠 왕이 각 왕국에 사절단을 파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변방 국가들로부터 대답이 돌아왔다.
대답은 승낙이었다.
모든 변방 국가들이 마물 군단에 맞서 싸우기 위한 병력을 파견하기로 약조했다.
그렇다고 크레인 왕국의 사절단이 특별히 뭔가 한 건 아니다.
변방 국가들을 움직이게 만든 건 다름 아닌 루크가 내건 공약이었다.
신성제국의 영토 중 절반에 해당하는 땅을 기여도에 따라 분배하겠다는데 누가 거절하리. 변방 국가 신세를 면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를 그냥 흘려보낼 자는 없었다.
“병력은 얼마나 도착했나요?”
연합군 소집 현황을 묻는 질문에 크레인 왕국의 귀족들이 바쁘게 준비한 서류를 뒤적였다.
“어제 리튼 왕국에서 1만의 병력을 보내왔습니다. 지금까지 약 5만 명이 모였지요.”
“아직 병력을 보내지 않은 국가들이 있는 걸로 아는데, 그쪽은 어떻게 됐죠?”
“나머지 국가들도 며칠 내로 도착한다고 합니다. 만약 지금 오고 있는 병력들까지 모두 합류하면 총합 6만 명이 모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원래 예상 소집 병력은 3만 명이었는데 예상 수치의 2배에 달하는 병력이 소집되었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하게 느껴지곤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크레인 왕국을 완충제 삼아 추이를 지켜보려던 입장을 고수하던 이들이었지 않은가.
그런데 빌로스 왕국에서 영토 분할을 약속하자마자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뒤처질세라 더 많은 병력을 보내지 못해 안달이다.
이렇듯 누구도 예외 없이 한결같기에 조종하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는 것이다.
레이아는 크레인 왕국의 군량 및 장비 보유량이 적힌 서류를 찬찬히 살폈다.
“크레인 왕국의 재정 상태론 오랫동안 6만 대군을 감당할 여력이 없어요. 그러니 준비된 병력부터 전선에 보내도록 하죠. 엘프 군과 거인 군, 빌로스 군에도 바로 전선으로 향하라고 전해뒀어요.”
“그리하겠습니다. 레이아 양께선 언제 출발하실는지요?”
“저도 내일 출발할 생각이에요. 오늘 회의 내용은 보고서 형식으로 편집해서 호쿠 국왕 전하께 올리도록 하세요.”
레이아가 연합군 운용에 대한 부분을 총괄하고 있는 동안 호쿠 왕은 크레인 왕국의 중역들과 함께 보급 물자를 확보하기 위하여 밤낮 가리지 않고 업무에 매진하고 있었다.
막대한 보급 물자를 감당하는 만큼 전후에 기여도를 논할 때 크레인 왕국이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할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호쿠 왕도 군말 없이 당장 발생할 막대한 손해를 군말 없이 감수하고 있는 것이고 말이다.
회의를 마친 레이아는 떠날 채비를 갖추기 위해 숙소로 돌아갔다.
현재 레이아는 수도 외곽에 위치한 고급 여관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왕궁 안은 갖가지 준비로 혼잡하여 삼색제비가 머무를 공간이 없기도 했고, 마나 호흡에 집중하기엔 밤낮 가리지 않고 소음이 난무하는지라 일부러 조용한 장소를 고른 것이었다.
삼색제비를 타고 고급 여관에 딸린 별관 앞에 착지한 순간, 여관 종업원이 기다렸다는 듯 쪼르르 달려왔다.
“레이아 님, 어떤 남자분이 편지를 남기고 가셨어요.”
레이아는 종업원이 내미는 편지봉투를 건네받으며 봉투를 앞뒤로 훑었다.
북상 중인 바이스나 제랄드가 보낸 편지라면 군용 소인이 찍혀 있을 터. 그런데 봉투에는 소인은커녕 보낸 이의 이름조차 적혀 있지 않았다.
혹시 편지 안에 이름을 적어 두지 않았을까 싶어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하나 편지에는 매우 단편적인 단서만 나열되어 있었다.
[카라스코가 살아 있으며 놈이 모든 일의 배후다. 고대 병기 타이탄이 카라스코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물 군단을 이끌고 이동 중. 연합군과 레이아 당신을 섬멸하기 위해 크레인 왕국으로 진격 중이니 조심할 것.]
카라스코가 살아 있다는 것쯤은 레이아도 알고 있다. 하지만 타이탄이 마물 군단에 합류했다는 소식은 금시초문이다.
고대 병기 중 하나로 분류되고 있는 타이탄이 마물 군단에 합류했다면 군단을 상대로 승리를 따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최신 정보를 어디서 알아낸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정체를 밝히지 않고 익명으로 편지를 남긴 것일까?
서신을 거듭 읽어 내리던 중 문체에서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일부러 티 나지 않게 또박또박 적은 것 같긴 해도, 몇몇 글자를 약식으로 표기했다가 고쳐 쓴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인간을 제외한 타 종족이 대륙 공용어를 사용할 때 약식 표기를 사용하곤 한다.
레이아는 종업원에게 편지를 전달해 준 이에 대해 물었다.
“편지를 전달해 준 자를 직접 봤나요? 인간이던가요, 아니면 타종족이던가요?”
“잘은 모르겠지만 인간은 아니었어요. 전신을 붕대로 감고 있어서 전장에서 온 것 같기도 했고……. 아! 주둥이가 살짝 튀어나온 도마뱀의 윤곽을 띠고 있었던 것 같아요.”
도마뱀이었다는 말에 범인의 정체가 대강 짐작되었다.
그가 어째서 정체를 숨기면서까지 정보를 제공하러 왔을까?
중요한 건 군단의 핵심 전력이 아군 진영 깊숙이 들어왔다는 점이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든 간에 위험 요소를 그냥 돌려보낼 순 없다.
“혼자 왔었나요? 언제 이 편지를 가져왔죠? 어디로 가던가요?”
질문이 속사포처럼 쏟아지면서 종업원이 대량의 주문을 맞이한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레이아가 차분하게 한 번 더 되묻자 그제야 호흡을 한 번 고르고선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혼자 왔었고, 1시간 전에 들렀었어요. 그리고 편지를 전해 주자마자 서쪽으로 갔고요.”
“당장 왕궁으로 가서 정예 병력 파견을 전달해 주세요. 제 이름을 대면서 쟈칼이 침투했다고만 전하면 돼요.”
“아, 네? 아! 네! 그렇게 할게요!”
1시간이면 아직 국경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
레이아는 종업원에게 말을 전해 줄 것을 부탁하고선 삼색제비의 등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 * *
크레인 왕국의 수도에서 빠져나온 쟈칼은 인적 드문 벌판에서 로브를 벗었다.
일부러 원래 사이즈보다 세 단계나 큰 로브를 둘러 특징적인 신체 부위를 가리고 있었다. 들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으나 의외로 쟈칼을 수상하게 여기는 자는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생각보다 남의 일에 깊이 관여하지 않는다. 특히 요즘처럼 타국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고 있는 시기에는 더더욱 경계심이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잘 전해졌으려나 모르겠군.”
타이탄이야 워낙에 눈에 띄는 체형이니 연합군 측에서 벌써 정보를 입수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혹시 몰라 군단을 잠시 이탈하는 위험을 감수하고서 직접 정보를 전해 주러 크레인 왕국 깊숙이 들어온 것이었다.
군단에 복귀하기 위해 날개를 펼쳤는데, 머리 위에서 강한 주문 영창이 들려왔다.
“라이트닝 바인드!”
영창과 함께 쟈칼의 몸 주위에 전격이 흐르고 있는 둥근 고리가 생성되었다. 고리는 금세 수축되어 밧줄처럼 쟈칼의 몸을 죄었다.
전격이 비늘을 타고 흘렀지만 마나 이뮨 효과를 지닌 드래곤 스케일 앞에선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쟈칼은 라이트닝 바인드에 묶인 채로 무심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상공에선 레이아가 삼색제비를 부리며 제자리 비행을 하고 있었다.
“네 쪽에서 먼저 찾아와 주다니, 이거 영광인걸.”
실없는 농담에 레이아가 미간을 좁히며 편지를 쥐고 흔들었다.
“이제 와서 속죄라도 할 생각인가요?”
쟈칼의 행동에 담긴 의미를 나름대로 추측해 본 모양이다.
항복이라면 이름을 밝혔을 터이나 그러지 않은 점에서 속죄의 연장선에 놓인 행동으로 여긴 듯하다.
쟈칼은 힘으로 라이트닝 바인드를 끊어 버리고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거창한 게 아냐.”
“이런다고 제가 당신을 재평가할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에요.”
“훗,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았어. 무슨 짓을 해도 가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냥 뭐랄까, 어디서 굴러들어 왔는지도 모를 병기 따위에게 죽게 놔두고 싶진 않았거든.”
“그 말이 사실이라고 치죠.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해 온 모든 행위를 묵인할 순 없어요.”
“그건 내 방식대로 청산할까 해. 그러니 지금은 모른 척해 주지 않겠어? 솔직히 말하면 다시는 너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거든.”
쟈칼이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레이아를 바라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마주치면 버렸던 미련이 돌아올 것만 같아서 말이지.”
청산한다는 말이 영향을 미쳤는지 레이아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절 원하죠? 아무리 닮았다 한들 전 아예 다른 사람이에요.”
“그때 그 상황을 재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시도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지.”
“그때 그 상황? 100년 전 그분이 다가온 것도 함정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까지…….”
100년 전, 쟈칼이 사랑했던 그녀는 쟈칼을 사로잡기 위해 투입된 작전 세력의 일원에 불과했다.
물론 쟈칼 본인도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한데도 어째서 아직까지 마음에 두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쟈칼의 대답은 낙관적인 성향이 다분했다.
“그런 함정이라면 몇 번을 되풀이하든 환영이야.”
함정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그 순간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도 좋을 정도로 달콤하고도 감미로웠기에, 잠깐이라도 좋으니 당시의 감미로움을 다시 맛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상대방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은 건 인정한다. 그리고 여태까지 행해 온 방법이 잘못된 것도 전부 인정한다.
하지만 그건 이제 와서 논해 봤자 불필요한 변명, 즉 사족에 불과하다.
쟈칼은 날개를 펼치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아까도 말했지만 청산은 확실히 하고 가겠어. 그러니 나 따위에게 힘 빼지 말라고.”
계산은 각자 알아서.
남남인 관계에 대신 계산을 해 주는 것도 웃기지 않은가.
각자 갈 길 가는 게 지극히 올바른 타인 간의 관계이다.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겨우 정상적인 관계로 재정립되었다.
레이아도 쟈칼의 뜻에 긍정하듯 스태프를 거두었다.
“다시는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스태프를 거두는 과정에서 레이아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적나라케 드러났다.
반지에 달린 보석에 햇볕이 부딪쳐 산산이 부서지면서 쟈칼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쟈칼은 금세 반지에서 시선을 거두며 서쪽으로 몸을 틀었다.
“피차일반이야.”
* * *
고속 비행을 통해 국경을 넘은 쟈칼은 조용히 마물 군단에 복귀했다.
하루 남짓 자리를 비우긴 했지만 그 정도 시간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군단장 자리를 거부하며 일개 언데드 병사가 되길 자처한 자를 누가 신경 쓰겠는가.
대부분의 마물과 언데드는 쟈칼에게 일절 신경 쓰지 않았지만 단 한 명, 타이탄만이 쟈칼의 움직임을 수상하게 여겼다.
“쟈칼,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어디 있었는지 설명하거라.”
타이탄이 손바닥을 쟈칼의 머리 위에 가져다 대며 진실을 요구했다.
대답 여하에 따라 당장이라도 짓누를 기세였다.
이글거리는 열기가 쟈칼을 옥죄는 가운데 쟈칼의 입에서 질문과 동떨어진 대답이 튀어나왔다.
“예전에 루크 그놈이 내 불꽃을 두고 양초 불붙이는 용도로나 쓰면 딱이겠다고 한 적이 있었지.”
“뚱딴지같은 소리 말고 질문에나 대답하도록.”
“양초에 불이나 붙여볼까 싶어서 말이야.”
쟈칼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세상만사가 신이 짜놓은 대본대로 흘러가는 것이라면 지금 이 순간이 쟈칼이란 배역의 종장일 터.
fin이라는 문구에 다다르기 전에 커다란 양초 하나 지펴 놓고 갈까 싶다.
들이마신 숨을 내쉴 때 쟈칼의 입에서 강렬한 화염의 브레스가 뿜어져 나오며 타이탄의 손을 지지기 시작했다.
화르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