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
191화 그래도 할머니보단 낫네 (2)
레이아가 타이탄을 쓰러뜨리면서 전세가 연합군 측으로 크게 기울었다.
마물 군단이 유일하게 앞서는 부분이 질적인 차이였는데 그마저도 뒤집히면서 더 이상 형세 역전은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어쩌면 쟈칼의 저항이 눈덩이가 되어 비탈길을 구르면서 점점 불어나 지금에 이르게 된 걸지도 모른다.
타이탄에게 타격을 입힌 것이 전부가 아니다.
쟈칼이 사라짐으로써 군단은 섬세함을 잃었다.
타이탄이 군단을 이끌긴 했으나 놈은 병기로서 전쟁에 많이 참가했다 뿐이지 지휘관으로서 참가한 것이 아니다.
그나마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자는 쟈칼뿐이었고, 그래서 마물들도 엘리나 사망 직후 쟈칼에게 리더 역할을 맡기려 했던 거다.
중요한 건 쟈칼이 도움이 된 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의 공을 기억하는 자는 없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은 채로 생을 마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쟈칼이 스스로 택한 자기만의 과오 청산 방식이었다.
* * *
당연한 일이겠지만 전투는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연합군의 피해도 만만찮았던 대신 군단을 거의 궤멸시키는 데 성공했다. 8만에 달하던 마물 중에 살아남은 건 고작 수천에 불과했으며 남은 잔당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뭐, 고작이라고 칭하긴 했어도 마물 수천 마리가 어디 보통 숫자던가.
8만 마리가 수천 마리로 줄었다 뿐이지 살아남은 수천 마리가 전부 마물 본연의 야생 포식자 활동을 개시하면 굉장히 성가셔질 것이다.
레이아는 연합군 각 부대의 지휘관들을 불러다 전후 처리 지시를 내렸다.
“마나마스터 분들은 소수 정예 부대를 편성해서 잔당 처리에 임해 주세요. 그리고 거인 분들도 토벌에 임해 주셨으면 해요.”
모건은 망치에 붙은 이물질을 손톱으로 깔짝깔짝 떼어 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라면 하기야 하겠는데 식량이 부족하지 않겠어?”
“해상 루트를 뚫어 두었으니 드래프트 영지에서 곧바로 식량을 날라다가 공급하면 돼요. 러스트 자작님, 요즘 드래프트 영지 수확량은 어떤가요?”
러스트는 송곳니를 씨익 드러내더니 익살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드래프트 영지에선 거지들까지 비만이라 운동하러 다닌다지.”
“그럼 보급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아참, 모건.”
러스트의 부름에 모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용건을 물었다.
“왜?”
“레이아 양에게 그거 알려 주게. 해상 루트 오면서 있었던 일 말일세.”
“응? 아~ 깜빡할 뻔했구만.”
“무슨 얘기예요?”
“그 왜, 나더러 서쪽 해상을 지키고 있는 샤크족을 뚫고서 해상 루트를 확보하라고 했잖아? 근데 막상 배를 타고 오는 내내 샤크족은 코빼기도 안 비치더라고.”
“한 번도요?”
“응, 한 번도 없었어.”
“도망쳤나 보네요. 원래 그런 녀석들이니까 무시하죠.”
샤크족은 이미 싸움에 참가하지 않고 도망친 전적이 있다.
루크가 옥토버 부족을 토벌할 때 샤크족은 옥토버와 동맹을 맺었는데도 전투에 가담하지 않고 내뺐었다.
인육을 즐기고 식욕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마물과 다를 바 없는 녀석들이다.
아니, 마물은 먹기 위해 싸우는 건 당연하다고 여기데 샤크족은 싸우지 않고 배만 채우는 걸 좋아하니 마물보다 더 악질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곤 해도 마물 군단까지 무너진 마당에 더 이상 육지에 관여하진 않을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듯하다.
한창 잔당 토벌에 대한 얘기가 오가던 중 레이아는 문득 간부 중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자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스텔라 경이 안 보이네요. 바이스 경과 함께 올라오는 거 아녔나요?”
거인족을 데리러 갔던 러스트가 이 자리에 있고 엘프를 데리러 갔던 제랄드가 이 자리에 있다.
한데 바이스에게 진군 속도를 높이라고 전하러 갔던 스텔라만 이 자리에 없었다.
혹시 전투 중에 전사한 게 아닐까 싶어 염려되는 마음에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바이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제랄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스텔라 경은 몸 상태를 고려해서 본국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남부 요새에서 스텔라는 화살에 맞은 이력이 있다.
설마 그때 입은 상처가 악화된 걸까?
하지만 상처가 악화된 거라면 바이스가 웃을 이유가 없다. 오히려 낯빛이 어두워져야 정상이다.
모두가 의아해하고 있는 가운데 바이스가 능청스러운 말투로 제랄드에게 질문을 날렸다.
“제랄드 경, 뭐 짐작 가시는 거 없습니까?”
“무슨 말인지 당최… 뜸 들이지 말고 그냥 말해 주면 안 되나?”
“몇 달 뒤엔 부모가 되실 예정이라는 것만 알려 드리겠습니다.”
“…….”
제랄드는 눈을 끔뻑이며 한동안 할 말을 잃었다.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는지 그답지 않게 몇 번이고 ‘아.’, ‘허.’, ‘진짜?’ 등의 각종 반응을 내비치더니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주변에서 무수한 축하의 말이 쏟아지는 가운데 제랄드는 말을 더듬으며 스텔라의 상태부터 물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됐지? 잠깐만, 그 상태로 따라온 거야? 상태는? 몸 상태는 어때?”
아무리 초기였다곤 해도 말을 타는 것이 몸 상태에 좋은 영향을 미칠 리 만무했다. 말 타는 게 어디 보통 일이던가.
거기다 전투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고, 밀정으로 의심받으며 각종 스트레스를 받은 데다 화살까지 맞았다.
혹시라도 아이에게 악영향이 미칠까 걱정부터 앞섰다.
다행히 별문제는 없다고 한다.
너무 호들갑 떠는 건지는 몰라도 이 순간만큼은 신에게 감사드리고 싶어진 제랄드였다.
제랄드는 공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개인사가 주가 된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며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지금쯤이면 천공섬이 빌로스에 다다랐겠군요. 대책이 세우셨을는지…….”
보통 사태가 아닌 만큼 마물 군단을 상대하면서도 모두가 가슴 한편에 불안감을 품으면서 싸워야 했다.
그 불안감은 아직도 가슴속에서 서려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빌로스 왕국, 그리고 루크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을 사태이니 말이다.
하지만 정작 가장 불안해해야 할 레이아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루크가 있을 남쪽을 바라보며 걱정을 일축했다.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전하 걱정이라잖아요? 아마 괜찮을 거예요.”
* * *
한편 빌로스 왕국에선 한창 천공섬 추락에 대비한 움직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루크는 헤테룬에서 북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황무지를 쭈욱 둘러보았다.
“오션 마린의 양은 이게 전부인가 보지?”
황무지 한복판에는 대량의 오션 마린이 쌓여 있었다. 쌓아 둔 오션 마린의 금전적 가치는 족히 천억 루소에 달할 만큼 막대한 양이었다.
기어코 황무지까지 따라 나온 그란데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네, 현 상황에서 모을 수 있는 최대 한도입니다. 부족할 것 같습니까?”
“많을수록 좋긴 한데… 뭐, 이게 한계라면 지금 가진 것만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겠지.”
“혹시 모르니 헤테룬과 그 인근에 있는 백성들을 피난시키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피난 간다고 영향권에서 벗어날 규모가 아냐.”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 봐야지요.”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군. 내가 막아 내면 괜스레 수백만 난민만 만든 꼴이 되잖아?”
걱정해서 막을 확률이 올라간다면 천 번 만 번 걱정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걱정할 시간에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루크처럼 담이 큰 건 아니었다.
보통은 그란데 공작처럼 반응하기 마련이다.
“후우, 뭐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말이죠. 전하께선 막아 낼 확률이 얼마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무조건 막는다는 것밖에 없어.”
“무조건… 평소의 전하라면 보험을 들어 둬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텐데 말입니다.”
“이번에는 중간 따윈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이번 충돌에 이익과 불이익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가 사생 결단을 결심하고서 자폭 전술을 구사하고 있는 마당에 효율이 무슨 소용이랴.
0 아니면 100.
중간 따윈 존재하지 않는 싸움에서 피난이니 차선책이니 하는 보험은 무의미하다.
오히려 어설픈 보험은 마음의 기압을 낮추는 행위밖에 안 된다.
카라스코는 1 아니면 6밖에 없는 주사위를 준비했다. 그런데 3이나 4의 눈이 나오길 바라는 건 모순이지 않은가. 그러니 무조건 6을 노리는 마음가짐으로 임할 수밖에 없다.
“전하! 남동부 일곱 관문 기사 일동,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북동부 엘프의 숲 국경수비대 소속 기사 일동,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하니온 지방 순찰부대 소속 기사 일동, 전하를 알현하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천공섬을 멈춰 세우면 섬 위로 올라가 카라스코를 처리해야 한다.
카라스코가 저 혼자 섬 위에 상주하고 있진 않을 것이다.
놈은 흑마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고, 용인과 천공섬의 새를 학살하여 그들의 시체를 취했다. 하면 천공섬 위에 널려 있는 소재를 이용하여 상당수의 수하를 만들어 냈을 터.
상대가 용인과 천공섬의 새를 소재로 한 언데드를 만들어 냈다면 일반 병사들은 상대도 되지 않을 거다.
고로 어설프게 병력을 모아 진격하느니 소수 정예만 모아 진격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상당수의 병력은 마물 군단 토벌을 위해 북진시켜서 운용할 수 있는 병력이 얼마 없기도 하고 말이다.
그간 오션 마린을 이용한 마나 유저 및 마법사 육성 정책을 펼친 덕에 기사와 마법사의 숫자는 차고도 넘쳤다.
루크는 북서쪽 하늘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슬슬 보일 때가 됐는데 말이지.”
내로라하는 마탑의 마법사들이 모여서 계산한 결과 천공섬은 오늘 헤테룬 북쪽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멀리 떨어진 상공에서 점 하나가 거뭇거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의 크기는 점점 커졌으며 금세 천공섬의 거대한 실체를 실감할 수 있는 위치까지 다가왔다.
천공섬은 산… 정확히는 기다란 산줄기를 거대한 스푼으로 떠낸 듯한 형상을 띠고 있었다.
천공섬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곳은 흡사 밤이라도 찾아온 양 캄캄해져 있었다. 천공섬의 윗부분엔 볕이 한껏 내리쬐는데, 그 아래는 밤처럼 깜깜하다. 극명한 명암 대비가 천공섬의 위압감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정찰을 나갔던 삼색제비 부대, 그리핀 라이더들이 루크가 있는 장소로 복귀하며 실황을 알렸다.
“전하! 천공섬의 용인들과 새들이 언데드화되어 섬 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놈들을 뚫지 않는 이상 상공 루트로의 접근은 힘들 것 같습니다!”
“병력을 전부 뒤로 물려. 지금부터 천공섬의 추락 궤도를 바꾼다.”
천공섬의 지면 충돌부터 막아야 전투를 하든, 유인을 하든 작전을 개시할 수 있다.
충돌을 막지 못하면 병력의 유무 따윈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반드시 막겠다고 선언했으니 실제로 반드시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말만 번지르르하게 늘어놓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다.
루크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오션 마린을 향해 정령석 4개를 던졌다.
“기상 시간이다, 꼬꼬마들. 오늘은 아무리 소리 질러도 혼나지 않는 날이니 실컷 날뛰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