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
193화 천공섬 추락 (2)
파이를 타고 날아오른 루크는 천공섬에 접근했다.
가까이서 직접 확인한 천공섬 윗부분의 주거지역은 참혹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언데드화 술식을 버텨 내지 못한 시체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으며 세월이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신전풍의 주거 건물들은 대부분이 무너져 폐허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섬의 지면엔 언데드화가 된 용인들이 머무르고 있었고, 섬의 상공에는 언데드화가 된 천공조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침입자에게 적나라한 적의를 드러냈다.
“적 말살! 적 말살!”
천공조 떼 사이에서 익숙한 말투의 외침이 들려왔다.
파이와 매우 흡사한 말투다.
설마 하는 마음에 루크와 파이가 동시에 외침이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천공조 사이에 파이와 매우 흡사한 외견을 지닌 새 한 마리가 섞여 있었다. 파이에서 몸집을 한참 늘리고, 목소리를 좀 더 중후하게 만든 느낌이었다.
전체적으로 비슷한 편이긴 하나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놈의 몸 곳곳이 썩어 문드러져 있다는 것이었다.
‘구울… 인가.’
스켈레톤보다도 하위에 속하는 언데드인 구울. 몸이 썩어가는 와중에 언데드화된 자들이 주로 되는 언데드이다.
생전의 능력을 고스란히 갖춘 채로 탄생하는 여타 언데드와 다르게 구울은 생전의 능력 중 7, 8할만 가진 채로 재탄생한다.
본래 소재가 창천앵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구태여 입 밖에 내진 않았다.
파이는 아직 자신이 어쩌다가 루크에게 길러졌는지 모른다. 순수(?)한 애를 상대로 ‘넌 탁란당해서 지상에 떨어졌어.’라고 말할 순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혹시라도 파이가 저 구울 창천앵무의 정체를 알아차리기라도 한다면 파이의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심란해질 것이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파이도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던 듯 시종일관 차분했다.
“섬멸! 섬멸!”
죽어 버린 것은 어쩔 수 없다. 죽은 자를 품에 끌고 안고 징징거리느니 현실을 보겠다.
그리고 낳아 준 은혜가 하늘 같다 할지라도 길러 준 은혜 또한 하늘 같을지니.
지금은 루크와 함께 적을 섬멸하는 것에만 집중하겠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파이에게 괜찮은지 물어보는 것은 괜한 사족에 불과할 것이다.
때문에 루크 또한 파이의 전의를 달갑게 받아들이며 해왕검에 마나를 부여했다.
“모처럼 의욕을 드러내는 게 보기 좋군. 그럼 의욕이 식기 전에 참전하자고.”
“돌격! 돌격!”
파이가 속도를 붙이며 천공조 떼가 모여 있는 장소를 향해 돌진했다.
루크의 돌격을 신호 삼아 마찬가지로 상공에 떠 있던 삼색제비 비행부대, 그리핀 라이더들도 일제히 움직였다.
천공섬 상공에서 빌로스 비행부대와 언데드 천공조 떼의 공중전이 펼쳐졌다.
천공조 떼가 죄다 구울로 재탄생한 터라 실질적인 전력은 생전의 7, 8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천공조 떼를 상대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천공섬에서 가장 흔한 새인 삼색제비는 말할 것도 없고, 천공섬에서도 최고봉으로 추앙받던 창천앵무, 뇌운조, 피닉스까지 모두 전투에 가담하면서 빌로스 비행부대를 유린했다.
“전하! 천공조 떼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길을 열 테니 전하께선 카라스코가 있는 곳으로 향해 주십시오!”
“아니, 섬멸하고 내려간다. 등 뒤에 적을 남겨 둔 채론 찝찝해서 말이지.”
“저희를 좀 더 믿어 주십…….”
번쩍!
비행부대 대원들의 간청이 쏟아지던 중 상공에서 밝은 빛이 번쩍였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란 말을 그대로 재현한 듯 급작스러우면서도 위협적인 현상이었다.
번개를 만들어 낸 범인은 뇌운조였다.
노란 깃털을 지닌 거조의 모습을 띠고 있는 뇌운조는 구름 사이를 누비며 벼락을 떨어뜨리는 능력을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방금 번쩍인 섬광은 뇌운조가 루크를 향해 번개 공격을 강행하면서 발생한 것이었다.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은 강렬한 섬광과 함께 루크에게 굵직한 전격이 떨어졌다.
루크는 동물적인 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머리 위에 투영검을 소환했다.
파지지지직!
떨어진 벼락이 투영검에 적중하며 강한 스파크를 일으켰다.
벼락이 번쩍인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으나 일순 루크가 눈을 감으면서 잠깐 주변 상황을 포착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졌다.
그 찰나의 순간을 노리고 측면에서 창천앵무가 날아들었다.
“사살! 사살!”
한시라도 조용히 있지 못하는 건 창천앵무란 종족의 특성인 걸까.
본능에 따라 부리를 재잘거려 준 덕분에 측면에서 공격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미리 감지할 수 있었다.
루크가 따로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파이가 눈치껏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고도를 낮추었다.
휘이잉!
간발의 차이로 창천앵무가 루크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며 후폭풍이 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한고비 넘기고 또 한고비 넘겼는가 싶었는데 쉴 틈도 없이 또 다른 거조의 공격이 루크를 기다리고 있었다.
화르륵!
이번에는 불로 이루어진 깃털을 가지고 있는 거조, 피닉스가 루크를 향해 날개를 퍼덕였다.
죽으면 알이 되어 다시 태어난다고 전해지는 새인 만큼 피닉스를 언데드화시키는 건 불가능할 터. 그래서인지 피닉스만큼은 언데드화가 아닌 마물화가 되어 있었다.
피닉스의 몸뚱이에는 본래 지니고 있어야 할 붉은 불꽃의 깃털 대신 검은 불꽃의 깃털이 불타오르는 중이었다.
피닉스의 날갯짓에서 파생된 검은 불덩이가 루크를 노리고 낙하했다. 알알이 불타오르고 있는 불덩이가 한없이 쏟아지는 모습이 마치 검은 유성우가 떨어지는 듯했다.
루크는 불덩이가 쏟아지는 방향을 향해 마나를 배열했다.
“실드.”
조곤거리는 듯 차분한 영창과 함께 전방위에 넓은 실드가 펼쳐졌다.
실드 위로 불덩이가 빗방울처럼 떨어지며 폭우를 맞는 창문과 같은 소리를 자아냈다.
후두둑! 후두두둑! 후두둑!
그러는 사이 벌써 뇌운조는 다음 벼락을 준비 중이었다.
뇌운조의 벼락이 떨어진다, 섬광이 번뜩이는 틈을 타 창천앵무가 덤벼든다, 창천앵무의 속도에 대응하는 동안 피닉스가 화염 유성우를 준비한다.
이 세 가지 패턴이 도돌이표라도 찍은 양 반복되고 있었다.
루크는 뇌운조의 깃털에 전격이 충전된 것을 보고선 미간을 살짝 좁혔다.
“이대로 가다간 끝이 없겠군.”
다른 빌로스 군은 배제한 채 루크만 노리는 걸로 봐선 사전에 카라스코의 특명이 있었던 듯하다.
이는 곧 카라스코가 ‘천공섬 충돌 계획’이 실패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패를 염두에 뒀다면 만약을 대비한 함정도 여럿 준비해뒀을 것이다.
주의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아까부터 자꾸 깐족거리는 새대가리 세 놈부터 정리해야겠다.
뇌운조의 벼락은 투영검으로도 충분히 흘려 낼 수 있다는 게 증명되었고, 창천앵무의 속도는 파이의 속도로 제치는 게 가능하며 피닉스의 불꽃은 실드로도 능히 막을 수 있다는 걸 확인했다.
기본 스펙에서 한 수 이상 차이가 난다는 걸 알았는데 무엇을 망설이랴.
루크는 가장 먼저 전격을 뿜으려고 준비 중인 뇌운조에게 투영검을 날렸다. 투영검의 속도도 느린 편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공중을 제집 삼아 날아다니는 뇌운조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뇌운조는 신속하게 비행 궤도를 틀며 투영검을 피해 냈고, 몸을 기울인 채로 나선 궤적을 그리면서 루크에게 벼락을 떨어뜨렸다.
파지지직!
섬광이 번쩍이며 일순 시야를 가렸고, 벼락이 파이에게 직격했다.
천년 거목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수준 높은 전격이었건만, 사전에 파이의 몸 주위에 실드를 둘러두었기에 전격은 실드를 지지는 데 그쳤다.
섬광이 사라진 순간, 섬광에 의해 가려져 있던 파이의 전신이 적나라케 드러났다.
한데 파이의 등에 올라타 있던 루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섬광의 번뜩임으로 인해 시야가 가려지는 건 비단 루크와 파이만이 아니다.
세 마리의 거조들도 마찬가지로 섬광 때문에 눈이 부셔 루크와 파이를 똑바로 직시하지 못한다.
즉, 뇌운조의 섬광을 역으로 이용하여 찰나의 순간에 ‘블링크, 실드, 플라이 마법’을 한꺼번에 시전한 것이었다.
사라진 루크는 뇌운조의 머리 위에서 나타났다. 뇌운조에게 있어선 사각이나 다름없었고, 놈은 루크가 머리 위에 있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루크가 검을 세로로 세우며 떨어질 때까지 말이다.
푸욱!
뇌운조의 머리 위로 떨어진 루크가 거꾸로 세운 검을 그대로 놈의 정수리에 꽂아 넣었다.
한 번 전격을 쏘아 내어 방전 상태에 빠진 뇌운조의 깃털은 루크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덕분에 루크는 아무런 저항 없이 마나 블레이드가 깃든 해왕검을 깊게 찔러 넣을 수 있었다.
“삐애애애애액!”
새 특유의 높고 가느다란 톤의 비명 소리가 널리 울려 퍼지며 뇌운조의 날갯짓이 멎었다.
동시에 루크의 입이 달싹였다.
“일단 하나.”
아직 루크의 공격은 끝난 것이 아니다.
해왕검을 아래로 내리꽂으면서 상공에 체류하고 있던 투영검이 루크의 동작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
투영검의 낙하지점에는 파이를 노리고 쇄도하고 있는 창천앵무가 있었다. 아까 뇌운조에게 투영검을 날린 것은 창천앵무의 쇄도 루트 근처에 미리 투영검을 가져다두기 위한 포석이었던 것이다.
루크의 움직임이 반영된 투영검이 아래로 떨어지며 창천앵무의 몸을 가차 없이 관통했다.
서걱!
투영검은 해왕검으로 찌르는 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위력을 발했다.
투영검에 관통당한 창천앵무의 몸이 세로로 쪼개지며 아래로 추락했다.
추락하는 창천앵무를 바라보는 파이의 모습이 쓸쓸해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루크는 추락하는 뇌운조의 머리 위에 올라타 있다가 파이와 같은 고도까지 떨어졌을 때 주문을 영창했다.
“블링크.”
루크의 신형이 뇌운조의 머리에서 파이의 등 위로 옮겨 갔다.
모든 동작은 신속, 정확하게 이루어졌으며 둘 사이의 호흡에 있어 불안정한 기색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수년간 손발을 맞춰온 루크와 파이 사이의 호흡은 고도의 속도전 속에서도 단단한 안정감을 자랑했다.
세 마리의 거조 가운데 남은 거조는 피닉스뿐. 녀석은 저 혼자 남았는데도 카라스코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려는 양 날개를 퍼덕였다.
루크는 시름에 잠겨 있는 파이에게 전의가 불타오를만한 말을 해 주었다.
“파이, 저 녀석이 알 시절일 때 널 둥지 밖으로 몰아낸 진범이야.”
“덕분! 덕분!”
“녀석 덕분에 나랑 만나긴 했지. 하지만 청산할 건 청산해야 하지 않겠어?”
“이자까지! 이자까지!”
“그래, 이자까지 쳐서 받자고.”
피닉스를 죽이면 알 상태로 돌아간다. 알은 깨진다 하더라도 다시 알의 형태로 재생되니 말 그대로 불사조인 셈이다.
하면 마물화된 피닉스가 죽어 알 상태로 돌아가도 마물화 술식이 유지될까? 아니면 고대 정령왕 때처럼 마물화가 풀리면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까?
후자 쪽이라면 피닉스를 손에 넣을 수 있을 터.
파이의 ‘이자까지!’라는 발언은 단지 사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추후에 험하게 부려 먹는 것까지 포함된 말일 것이다.
루크는 파이의 열렬한 요청을 받아들여 투영검의 검끝을 피닉스에게로 옮겼다.